윤여동설 - 금관가야(金官伽倻)의 건국시조 수로왕의 혈통 - 최초주장
삼국유사 가락국기를 보면, 후한 광무제 건무 18년(A.D.42) 3월에 아홉 간인 아도간, 여도간, 피도간, 오도간, 유수간, 유천간, 신천간, 오천간, 신귀간 등이 물가에 모여서 술을 마시다가 구지봉을 바라보니 이상한 기운이 있었다. 가서 본 즉 자색 새끼줄로 금합을 매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었다. 금합을 열고 보니 해처럼 둥근 여섯 개의 금빛 알이 있었으므로 아도의 집에 가져다 두었다. 이튿날 아홉 사람이 다시 모여서 열어보니 알 여섯 개는 껍질이 쪼개져 여섯 동자가 되어 있었다. 나이는 열다섯 살쯤 되었고, 용모가 매우 거룩하여 모두 절하며 축하하였다. 동자는 나날이 자라 10여일을 지나니 키가 9척이나 되었다.
무리들이 드디어 한 사람을 받들어서 임금으로 삼으니 이가 곧 수로왕(首露王)이었다.
금합에서 태어났다하여 성을 김(金)씨라 하고 나라 이름을 가야(가락국)라 하였는데, 신라 유리왕 18년((A.D.41) 때의 일이었다. 나머지 다섯 사람도 각자 헤어져 가서 다섯 가야 임금이 되었는데, 동쪽은 황산강, 서남쪽은 바다, 서북쪽은 지리산, 동북쪽은 가야산을 경계로 하였다. 수로왕이 왕위에 있은 지 158년 만에 죽고 다음은 거등, 마품, 거질미, 이시품, 좌지, 취희, 지지, 감지, 구해가 서로 이어 왕이 되었는데, 나라가 있은 지 무릇 491년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6가야는 김해의 금관가야, 고령의 대가야, 고성의 소가야, 성주의 벽진가야, 함안의 아나가야, 함창의 고령가야를 말하는데, 그 중 김해의 금관가야(金官伽倻)의 건국시조 수로왕의 원래 신분은 전해지지 않았다.
이때 어딘가로부터 변한 땅으로 와서 나라를 세웠고 그가 바로 금관가야(가락국)의 건국시조 수로왕인 것인데, 필자가 추정하기로는 왕망의 신(新)나라 멸망, 광무제의 한(후한) 복국과 관련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다.
이는 서안에서 발견된 대당고김씨부인묘명(大唐故金氏夫人墓銘)을 보면, “태상천자(太上天子)께서 나라를 태평하게 하시고 집안을 열어 드러내셨으니 이름하여 소호씨금천(少昊氏金天)이라 하니, 이분이 곧 우리 집안이 (김씨) 성씨를 받게 된 세조(世祖)이시다. 그 후에 유파가 갈라지고 갈래가 나뉘어 번창하고 빛나서 온 천하에 만연하니 이미 그 수효가 많고도 많도다. 먼 조상 이름은 일제(日磾)시니 흉노 조정에 몸담고 계시다가 서한(西漢)에 투항하시어 무제(武帝) 아래서 벼슬하셨다. 명예와 절개를 중히 여기니 (황제께서) 그를 발탁해 시중(侍中)과 상시(常侍)에 임명하고 투정후(秺亭侯)에 봉하시니, 이후 7대에 걸쳐 벼슬함에 눈부신 활약이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경조군(京兆郡)에 정착하게 되니 이런 일은 사책에 기록되었다. 견주어 그 보다 더 클 수 없는 일을 하면 몇 세대 후에 어진 이가 나타난다는 말을 여기서 징험할 수 있다. 한(漢)이 덕을 드러내 보이지 않고 난리가 나서 괴로움을 겪게 되자, 곡식을 싸들고 나라를 떠나 난을 피해 멀리까지 이르렀다. 그러므로 우리 집안은 멀리 떨어진 요동(遼東)에 숨어 살게 되었다. 문선왕(文宣王.공자의 시호)께서 말씀하시기를 말에는 성실함과 신의가 있어야 하고 행동에는 독실하고 신중함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비록 오랑캐 모습을 했으나 그 도(道)를 역시 행하니, 우리 집안은 요동(遼東)에서 불이 활활 타오르듯 다시 번성했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투후 김일제의 후예들이 왕망의 신(新)나라가 멸망하고 광무제에 의해 한(후한)이 복국되는 난리통에 요동으로 피난했음을 알게 한다.
물론 이때 투후 김일제의 후손인 투후 김성을 따르는 일파는 한반도 남부 경주, 김해지역으로 도망쳐 와서 다시 나라를 세우고 왕위에 올랐던 듯한데, 대당고김씨부인묘명에 나타나는 나머지 김일제의 후예들은 요동으로 도망쳐 그곳에서 신분을 감추고 숨어살아야 했던 듯하다.
후한 광무제에게 잡히면 역적으로 몰려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비록 장안, 낙양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인 요동으로 도망쳐 왔다 하더라도 신분을 감추고 눈에 뜨지 않도록 행동을 조심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광무제 당시에 후한이 여전히 요동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금관가야 수로왕의 후예인 김유신의 비문에 “軒轅之裔少昊之胤(헌원의 후예요 소호의 자손이다)”라고 새겨져 있었다고 하고, 삼국사기 권 제 41 열전 제1 김유신 (상)에도, “김유신은 서울 사람이다. 그 12세조 수로왕은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 그는 후한 건무 18년 임인에, 구봉(龜峰)에 올라가 가락의 9촌을 바라보고, 드디어 그 곳에 가서 나라를 열고 이름을 가야(가락국)라 하였다. 후에 금관국으로 고쳤다. 그 자손이 서로 계승하여 9세손 구해에 이르렀다. 구해는 혹 구차휴라고도 하며, 유신의 증조이다. 신라 사람들이 스스로 이르기를, 소호금천씨의 후예이므로 성을 김이라 한다.고 하였으며, 유신의 비에도 “헌원의 후예요 소호의 자손이다” 하였으니, 남가야의 시조 수로왕과 신라는 같은 성씨였다.
(三國史記卷第四十一 列傳 第一 金庾信 (上)
金庾信 王京人也 十二世祖 首露 不知何許人也. 以後漢建武十八年壬寅 登龜峯 望駕洛九村 遂至其地 開國 號曰加耶 後改爲金官國 其子孫相承 至九世孫仇亥 或云仇次休 於庾信爲曾祖 羅人自謂少昊金天氏之後 故姓金 庾信碑 亦云 軒轅之裔 少昊之胤 則南加耶始祖首露 與新羅同姓也)”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김유신이 황제헌원의 후예이고, 소호금천씨의 후예임을 자처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수로왕이 가락국을 세운 때가 후한 광무제 때라고 하였으니 김일제의 후예들이 난을 피해 요동으로 온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때였다.
당시의 상황을 유추해 보면,
고구려의 대무신왕이 서기 37년에 낙랑군을 쳐서 빼앗았는데 7년 후인 서기 44년에 이르러 후한 광무제가 군사들을 보내 낙랑군을 쳐서 살수이남 땅을 다시 되찾아 낙랑군(후한낙랑군)을 다시 설치하게 되는데, 가락국이 세워진 때가 바로 그 즈음인 것이다.
그렇다면 수로왕 일파는 비록 낙양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변방 요동으로 도망쳐 와서 신분을 숨기고 살고 있었겠지만 그 때쯤 신분이 노출되었거나 더 이상 요동에서 살수 없는 상황이 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요동을 떠나 또 다시 어디론가로 도망쳐야 할 상황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수로왕 일파는 요동을 떠나 변한 땅으로 갔던 것이 아닌가 싶은 것이고, 그곳에 가서 구지봉 부근의 땅을 차지하고 나라를 세우고 왕위에 올랐을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수로왕은 왕위에 올라서도 조심스러웠던지 자신의 혈통에 대하여 공개적으로 말하지 않았을 것인데, 이는 후한낙랑군이 건재해 있었고, 변한 가까이에 위치한 동예와 맥국도 또한 후한낙랑군의 영향권 아래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신분을 밝히는 것이 전혀 이로울 것이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사서에도 수로왕의 혈통에 대하여 기록되지 못했을 것인데, 수로왕의 후손들은 후한이 멸망하고 나서야 자신들의 선조가 황제헌원이고, 소호금천씨이며, 투후 김일제 임을 밝힌 것이 아닌가 싶은 것이다.
그리하여 김유신이 황제헌원의 후예이고 소호금천씨의 자손이라고 기록되었을 것이고, 또한 김알지의 묘예이며, 수로왕의 먼 외손인 신라 문무왕도 용삭 원년 신유(A.D.661) 3월에 조서를 내려 “가야국 시조의 9세손 구형왕이 이 나라에 항복할 때 데리고 온 아들 세종의 아들인 솔우공의 아들 서운 잡간의 딸 문명왕후께서 나를 낳으셨으니 시조 수로왕은 나에게 외15대조가 된다. 그 나라는 이미 없어졌지만 장사지낸 사당은 지금도 남아 있으니 종묘에 합해서 계속하여 제사를 지내게 하리라” 하였다고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기록되어 전한다.
그리하여 필자는 가락국(금관가야)의 건국시조 수로왕이 바로 황제헌원의 아들이라는 소호금천씨를 시조로 하는 투후 김일제의 후예일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하고 있고, 따라서 그 후손인 김유신도 황제헌원, 소호금천씨, 투후 김일제의 먼 후손일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하고 있다.
다만 왕망의 신나라가 멸망한 후 한반도 경주, 김해지역으로 도망쳐 와서 흉노족왕국을 세웠던 성한왕 투후 김성 일파와 변한 땅으로 가서 가락국을 세웠던 수로왕 일파가 무슨 관계인지는 아직 확실하게는 알 수 없고, 또 한반도 남부와 발해 북쪽에 각각 나라를 세운 후 그들이 상호 교류했었는지도 아직 잘 알 수 없지만 추정해보면 충분히 교류가 가능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무광왕의 한반도백제와 난하 부근의 대륙백제가 빈번히 교류했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