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고려의 도읍 개경은 발해 북쪽 지금의 중국 하북성 관성현(寬城縣, 寬城滿族自治縣)이 확실 - 최초주장
역사를 연구하는 방법에는 크게 나누어 두 가지가 있다고 보여진다.
즉, 현재로부터 근세, 고대, 상고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방법과
상고로부터 고대, 근세, 현재로 내려오는 방법이다.
우리가 지금 한반도 대한민국에 살고 있으니 그 바로 앞 왕조인 조선이 한반도에, 또 그 앞 왕조인 고려 역시 한반도에, 후삼국도 한반도에, 삼국과 가야, 삼한과 위만조선, 고조선도 한반도를 중심으로 존속했다고 인식하는 논리가 역사를 현재로부터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며 고찰하는 방법인데, 강단사학은 이 방법을 채택한 것이다.
그런데 재야사학은 역사란 사건의 발생순서에 따르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보아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는 연구방법을 채택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 역사를 현재로부터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우리 역사강역의 중심이 한반도라고 인식할 수밖에 없는데, 상고로부터 현재로 내려오는 방법을 택하고 있는 재야사학의 주장은 상고시대로부터 삼국시대까지 또는 고려까지도 우리 역사의 중심이 한반도가 아니라 대륙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다보니
강단사학에서는 재야사학의 주장을 말도 안되는 엉터리 주장이라 하면서 노인네들이 소설을 쓰고 있다고 무시해버리고, 재야사학은 언젠가는 되찾아야할 드넓은 우리의 잃어버린 옛 땅이 발해 북쪽 대륙에 있어 후손들에게 그를 가르쳐주어 한민족의 웅혼한 기상을 일깨워 고토를 회복해야 하는데도 강단사학자들이 그를 모르고 엉터리 역사를 학생들에게 가르침으로써 민족정기를 흐리게 하고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고 강단사학을 비난한다.
따라서 같은 고대사서의 기록을 가지고도
한편은 한반도를 중심으로 해석하고,
다른 한편은 대륙을 중심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단적인 예로 우리 역사를 해석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한사군의 "낙랑군(樂浪郡)"의 위치에 대하여
강단사학은 북한 평양부근이 낙랑군이었다고 하고,
재야사학은 북경, 하북성 부근이 낙랑군이었다고 주장한다.
“대방군(帶方郡)”에 대하여도
강단사학은 한반도 황해도에 위치했었다고 하고,
재야사학은 북경 부근에 위치했었다고 주장하는 식이다.
우리 고대역사의 중심 강역을 인식하는 자체가 한반도와 대륙으로 판이하게 다른 것인데, 학문이기 때문에 물건처럼 상대편에게 양보할 사항이 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두 연구집단 사이는 접점없이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고, 아마 이러한 현상은 앞으로도 상당기간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진실은 오직 하나 뿐일 것이다.
그렇다면 어느 한 편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말이 되는 것인데,
과연 강단사학이 거짓말을 하는 것일까,
재야사학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
지금 많은 사람들은 고려의 도읍 개경을 한반도 황해도 개성으로 인식한다.
조선의 도읍 한양이 지금 한반도의 서울이었기 때문에 바로 앞 왕조인 고려의 도읍을 황해도 개성으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원나라 이전의 고지도들을 보면 삼국과 고려의 위치를 장성의 동쪽 끝인 당산, 진황도 부근에 그려 놓았으나 명, 청대의 지도들은 조선의 위치를 한반도에 그려 넣고 있는 것이다.
이는 명, 청 대에 무언가 변화가 있었는데, 우리가 지금 그를 확실하게 모르고 있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이는 조선이 대륙에서 고려를 멸망시키고 건국된 후 한반도의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고 나서 대륙의 지명을 한반도로 그대로 교치시켰고, 대륙의 땅은 명나라 또는 청나라에게 빼앗겨버렸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 아닌가 싶은 것이다.
따라서 신라의 뒤를 이어 건국된 고려의 도읍 개경은 한반도 황해도의 개성이 아니라,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살았다고 사서에 기록된 신라가 위치했던 발해 북쪽 요녕성 호로도와 금주시(錦州市) 부근, 신라의 서쪽인 난하 부근의 백제가 위치했던 대륙에서 찾아야 하는 것인데,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 관성현(寬城縣: 관성만족자치현)이 바로 고려의 도읍 개경으로 비정되는 곳이다.
[개경 북쪽 송악산에 나타난다는 어머니 무릎에 앉아있는 어린아이 형상]
신증동국여지승람 개성부 상 산천 조를 보면,
“송악(松嶽: 송악산)”이 개성부의 북쪽 5리에 있는데, 처음 이름은 부소(扶蘇: 부소산, 필자주 : 부소는 단군왕검의 둘째 아들이름이다. 혹시 고조선 때 이 부근이 부소에게 봉해졌던 영지였을까?) 또는 곡령(鵠嶺)이라 하였다.
신라의 감간 팔원이 풍수에 능하였는데, 부소군에 이르러 살펴보니 산의 형세가 좋고 어린아이(童)가 보이므로(新羅監干八元善風水到扶蘇郡見山形勝而童) 강충에게 말하기를 “만약 군(郡)을 산 남쪽으로 옮기고 소나무를 심어 암석이 드러나지 않게 하면 삼한을 통합할 인물이 출현할 것이다” 하니 강충이 사람들과 함께 산 남쪽으로 이사해 살면서 소나무를 온 산에 심고 송악이라 불렀는데 또 숭산(崧山)이라 하기도 하고 신숭(神嵩)이라고도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당시 풍수가인 팔원이 보기에 송악산의 지형에서 어린아이 모습을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말을 했을 것이고, 또 후대에도 송악산에서 어린아이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에 사서에 기록될 수 있었을 것이다.
[개경 서쪽 강가에 있다는 명당 군자가 말탄 형국의 지세 : 지금 폭하 강물의 흐름이 마치 사람이 말탄 형상이다]
또한 고려사절요 문종인효대왕 10년(A.D.1056) 12월 조를 보면,
“장원정(長源亭)을 서강의 병악(餠嶽) 남쪽에 지으니 도선(道詵)의 송악명당기(松岳明堂記)에 서강(西江) 가에 군자가 말을 탄 형국인 명당자리가 있으니 태조(왕건)가 통일한 병신년(A.D.936)으로부터 120년이 되거든 여기에다 집을 지으면 국업이 연장된다”하였으므로 이때에 이르러 태사령 김종윤 등에게 명하여 터를 보아 짓게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개경 선죽교 남쪽에 위치했다는 좌견리(坐犬里)의 위치 : 산세가 마치 앉아 있는 개의 형상이다]
그런데 비록 천년의 세월이 흐르기는 했지만 지금도 여전히 송악산에서는 어린아이 형상을 찾을 수 있어야 하는데 지금 북한 개성에 있는 송악산은 요리조리 아무리 살펴보아도 어린아이 형상은 보이지 않고, 서쪽 강가에서도 말의 형상은 찾을 수 없다.
매우 이상한 것이다.
그런데 필자는 고려의 개경이 한반도 황해도의 개성이 아니라 지금 난하 반가구수고 동북쪽 중국 하북성 관성현(寬城縣, 관성만족자치현)으로 비정된다고 하였고, 앞 글들에서 신라의 서라벌(금성)을 요녕성 금주시(錦州市) 부근, 고구려 평양성을 하북성 승덕시 부근, 요동성을 북경부근으로 비정했다.
이는 그곳들이 수많은 역사서의 기록들을 완벽하게 충족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려의 개경으로 비정되는 하북성 관성현 북쪽에는 지금도 어린아이 형상이 나타나는 산이 있는 것이다.
그곳이 바로 고려시대의 송악산이었던 것이고, 또 관성현의 서쪽을 흐르는 폭하변에는 군자가 말탄 형상이 선명하게 나타나고 있으며, 개경 선죽교 남쪽에 위치했다는 좌견리(개가 앉아 있는 형상이 있는 동네)도 있는 것이다.
이는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 그곳이 바로 진짜 고려의 도읍 개경이었기 때문에 그곳에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전해진 어린 아이 형상과 말의 형상을 찾을 수 있었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이를 어떻게 단순히 우연의 일치로만 볼 수 있을까?
따라서 하북성 관성현이 고려의 도읍 개경이 확실하다면, 사서들의 기록을 전혀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고려 사람인 이승휴가 원나라의 대도(大都)에 사신 일행으로 갔다가 돌아와서 쓴 사행록인 “빈왕록(賓王錄)”을 보면,
1273년 윤6월 9일 개경 출발
6월 11일 패강(浿江) 도하
6월 12일 황해도 평산군 금암면 통과
6월 29일 원 동경 요양(遼陽) 도착
7월 9일 심주(瀋州) 도착
7월 16일 악두참(渥頭站) 도착
7월 29일 신산현(神山縣) 도착
7월 30일 병풍산 경유 황애봉 등정
8월 4일 원나라의 대도인 연경(燕京) 도착으로 나타나는데, 원나라의 도읍 대도(연경, 중도)는 지금의 하북성 역현 부근으로 비정되고, 고려의 개경은 하북성 관성현이었다.
# 지금 중국에서는 하북성 장가구시 장북현에서 발굴된 옛 성터를 원중도유지(元中都遺址)라 부르고 있는데, 이는 거짓말이다. 지금의 원 중도유지라 하는 곳은 고구려 유리명왕대의 기록에 나타나는 옛 황룡국의 도읍이었다
[위 : 중국에서 원 중도유지라고 하는 옛 성터인데, 이곳은 황룡국의 도읍이었다]
그렇다면 이때 이승휴는 한반도의 개성을 출발하여 지금의 북경으로 갔던 것이 아니라 고려의 도읍 개경이었던 하북성 관성현(관성만족자치현)을 출발하여 요동성(동경요양부로서 지금의 북경)을 지나 원 대도(연경)인 지금의 하북성 역현 부근까지 갔다왔다고 할 수 있는 것이고, 지금 강단사학에서 원 동경이었다고 지목하고 있는 요녕성 요양은 원나라의 동경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원나라의 동경 요양은 지금의 요하 동쪽 요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요나라, 금나라가 동경요양부라 했던 바로 그곳 지금의 영정하(고대 요수) 동쪽 북경 부근인 것이다.
따라서 이는 우리의 고대사를 모두 다시 해석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인데, 아직까지도 이러한 필자의 주장을 이해하지 못하고 한반도 개성을 중심으로 고려사를 해석하려는 사람들이 많이 있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그러나 어찌 하겠는가!
스스로 깨우칠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