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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신라 탈해왕의 출생지 다파나국(多婆那國)의 위치를 찾았다 - 최초주장

윤여동 2010. 4. 19. 07:50

윤여동설 - 신라 탈해왕의 출생지 다파나국(혹은 용성국)의 위치를 찾았다 - 최초주장

 

 

  신라 4대 탈해이사금의 출생지는 용성국 혹은 다파나국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그 나라는 과연 지금의 어디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일까?

  삼국사기는 다파나국(多婆那國)이 왜국 동북쪽 1천리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삼국유사는 용성국(龍城國, 정명국, 완하국, 화하국이라고도 한다)이 왜국 동북쪽 1천리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결국 다파나국과 용성국은 동일한 지역에 있던 나라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어찌되었든 탈해는 그 나라를 떠나 신라로 오게 되었고, 신라 2대 남해왕의 부마가 됨으로써 늦은 나이에 신라의 4대 왕위에 올랐고, 그 후손들 역시 신라의 왕위에 오를 수가 있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2대 남해차차웅 조를 보면,

  “5년(A.D.8) 봄정월 왕이 탈해가 어질다는 소문을 듣고 그의 큰 딸을 주어 아내로 삼게 했다.”

  "7년(A.D.10) 가을7월 탈해를 대보로 삼아 군사와 국정을 위임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3대 유리이사금 조에는,

  “앞서 남해(남해차차웅)가 죽고 유리(유리이사금)가 왕위에 오르게 되었을 때 대보 탈해가 원래 덕망이 있으므로 그에게 왕위를 양보하려 했는데, 탈해가 말하기를 ”신이 사용하는 그릇은 큰 보배여야 하므로 보통 사람으로서는 그 소임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하면서 유리에게 왕위를 양보 했다는 기록이 있다.

 

☆ 이때 유리이사금이 탈해에게 왕위를 양보하려고 했던 것은 전왕인 남해차차웅이 죽으면서 “내가 죽거든 너희는 박씨, 석씨 두 성씨가 나이가 많(거나 현명한) 사람으로서 왕위를 잇도록 하라”고 유언하고 죽었다는 기록과 또 유리왕이 죽으면서 유언했다고 하는 “선대 임금이 유언하기를 ‘내가 죽은 뒤에 아들과 사위를 막론하고 나이가 손위이거나 또는 현명한 사람으로서 왕위를 잇게 하라’ 하셨는데 내가 먼저 왕위에 올랐으니 이제는 마땅히 왕위를 탈해에게 전해야겠다” 하였다는 기록을 감안해 볼 때 탈해가 유리보다 나이가 많았기 때문에 유리가 매부인 탈해에게 왕위를 양보하려 하였을 것으로 판단되고, 탈해는 자신이 비록 나이는 많았지만 유리가 더 그릇이 크고 현명하다는 이유를 내세워 처남인 유리에게 왕위를 양보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자 유리왕은 죽으면서 자신이 먼저 왕위에 올랐던 것이 미안했던지 다음 왕위를 탈해에게 전하고 눈을 감는다. 그 처남에 그 매부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4대 탈해이사금 조를 보면,

  “탈해이사금(토해라고도 한다)이 왕위에 오르니 나이가 62세였다.

  성은 석씨요 왕비는 아효부인이다.

  탈해는 본래 다파나국(多婆那國)에서 태어났는데, 그 나라는 왜국에서 동북쪽으로 1천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처음에 그 나라 왕이 여국왕(女國王)의 딸과 혼인하여 아내를 삼았는데, 임신한지 7년 만에 큰 알을 낳았다. 왕이 말하기를, '사람으로서 알을 낳았으니 상서롭지 못하다 버려야 한다'라고 했다.

  그 여인이 차마 버리지 못하고 비단으로 알과 보물을 함께 싸서 궤 속에 넣어 바다로 띄워 보냈다. 그 궤가 처음에는 금관국 해변에 닿았으나 금관 사람이 괴이하게 여겨 주워들이지 아니했고, 또 진한의 아진포에 닿으니 이때가 시조 혁거세 재위 39년(B.C.19)이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삼국유사 기이 제1 제4대 탈해왕 조를 보면, 탈해가 신라 아진포에 도착한 후 스스로 자신을 소개하기를 “나는 본래 용성국(정명국 혹은 완하국이라고도 한다. 완하는 또 화하국이라고도 한다. 용성은 왜국 동북쪽 1천리 떨어진 곳에 있다) 사람입니다.....................(중략)....................부왕 함달파왕이 적녀국 왕의 딸을 맞아들여 왕비로 삼았는데, 오래도록 아들이 없자 아들 낳기를 기원하여 7년 만에 커다란 알 한 개를 낳았습니다. 이에 대왕은 신하들을 모아 말하기를 ‘사람으로서 알을 낳았으니 고금에 없는 일이다. 이것은 아마 길조는 아닐 것이다’ 하고는 (왕비에게 아이를 버리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왕비는 어쩔 수 없이) 궤를 만들어 나를 그 속에 넣고 칠보와 노비들을 함께 배안에 실은 뒤 바다에 띄우면서 ‘부디 인연있는 곳에 닿아 나라를 세우고 한 집안을 이루도록 하라’ 기원하자 갑자기 붉은 용이 나타나더니 배를 호위해서 지금 여기에 도착한 것입니다”라고 했다고 기록되어 있어 삼국사기의 다파나국과는 달리 탈해가 태어난 나라가 용성국(정명국, 완하국, 화하국이라고도 한다)이었다고 하고 있다.

  그런데 용성국 역시 다파나국과 같이 왜국 동북쪽 1천여리에 위치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그렇다면 혹시 용성국이 멸망하고 정명국, 완하국, 화하국, 다파나국 등으로 국호가 바뀌었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 삼국사기에서 서기 57년에 탈해가 왕위에 오를 때의 나이가 62세였다고 하는 기록과 기원전 19년(혁거세 재위 39년)에 신라 아진포에 도착했다고 하는 기록은 사실은 연대가 맞지 않는다. 왜냐하면 탈해가 실제 기원전 19년에 태어났다면 그가 신라의 왕위에 오를 때인 서기 57년에 그의 나이는 76세가 되어야 하고, 서기 57년에 실제 탈해의 나이가 62세였다면 그는 기원전 5년에 태어났을 것이므로 탈해가 신라의 아진포에 온 때는 혁거세 재위 39년(B.C.19)이 아니라 재위 53년(B.C.5)으로 기록되었어야 앞뒤가 맞는다. 어느 기록이 역사적 사실인지 잘 알 수 없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이러한 변천이나 연대가 맞지 않는다는 것을 따지려는 것이 아니라 탈해가 태어났다고 하는 용성국 혹은 다파나국의 위치와 신라의 위치 그리고 탈해의 항해로를 찾아보려 한다.

  기록 속에서 용성국 혹은 다파나국은 왜국의 동북쪽 1천여리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하므로 우선적으로 왜국의 위치를 찾으면 다파나국의 위치도 찾을 수 있게 되고, 신라의 위치를 찾으면 탈해가 어느 바다를 건너 신라로 오게 되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2대 유리왕 22년(A.D.3) 12월 조를 보면,

  “왕이 질산 북쪽에서 사냥하면서 5일 동안이나 돌아오지 않았다. 대보 협보가 간하여 말하기를 ‘왕께서 새로 도읍을 옮겨서 백성들이 아직 안정되지 못했으니 마땅히 행정과 치안에 힘써야 할 것인데, 이런 것에는 신경을 쓰지 않고 사냥만 하고 있으니 만일 허물을 고치고 결심을 새롭게 하지 않는다면 장차 정치는 어지러워지고 백성들은 흩어져 선대 임금의 업적이 땅바닥에 떨어질 것을 저는 두려워합니다’ 했다. 왕이 이 말을 듣고 대노하여 협보의 관직을 박탈하고 관가의 정원을 관리하게 했더니 협보가 분개하여 남쪽의 한으로 가버렸다”라고 기록하고 있고, 정사로 인정되지는 않지만 환단고기 태백일사 고구려국 본기에는 남쪽의 한으로 갔던 협보와 그를 따라온 수백가는 마한의 산중에서 살다가 구사한국으로 갔고, 다시 아소산으로 옮겨가서 살았는데, 이를 다파라국(多婆羅國)의 시조라 한다고 기록하고 있어 왜국 동북쪽 1천리에 있었다는 다파나국(다파라국)이 우리 역사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다만 협보가 아소산으로 옮겨간 때가 서기 3년 이후로 나타나고, 탈해가 신라로 온 때는 그보다 앞선 시기로서 다파라국이 세워지기 전이었다고 생각되므로 탈해의 출생지는 탈해 스스로 말했듯 용성국이었다고 보아야 할 듯하다.    

 

  후한서 한전을 보면,

  "한은 삼종이 있는데, 마한, 진한, 변진(변한)이다.

  마한은 서쪽에 있는데, 54국이 있고, 그 북쪽은 낙랑, 남쪽은 왜와 접했다.

  진한은 동쪽에 있는데, 12국이 있으며 그 북쪽은 예맥과 접했다.

  변진(변한)은 진한의 남쪽에 있는데, 역시 12국이 있으며 그 남쪽은 왜와 접했다. 모두 78국이며 백제는 그 중의 한 개 나라이다." 라고 기록하고 있고, 후한서 왜전에는 “왜는 한의 동남 대해 중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삼국지 왜 전에는, “왜인은 대방동남 대해 가운데 있다. 산과 섬에 의지하여 국읍을 이루었는데 옛날에는 100여국이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수서 신라전을 보면,

  "신라국은 고구려의 동남쪽에 있다.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사는데, 혹은 사라라고도 불렀다"라고 기록하고 있고, 수서 왜국 전에는 “왜국은 백제, 신라의 동남쪽에 있는데 수륙3천리 (떨어진 곳)에 있고, 대해 가운데 산과 섬에 산다”고 기록되어 있고, 북사 왜국 전에도 수서와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다.

  또한 신라와 아주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던 당나라의 역사서인 신당서에는,

  "신라는 변한(필자주 : 북사에는 신라는 그 선조가 본래 진한의 종족이라고 기록되어 있다)의 먼 후예이다.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사는데, (강역이) 횡으로는 1천리, 종으로는 3천리이다. 동쪽은 장인국에 닿았고, 동남쪽은 일본, 서쪽은 백제, 남쪽은 바다에 닿아 있으며, 북쪽에는 고구려가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종합해보면 결국 왜국은 마한, 변한의 남쪽 또는 한의 동남쪽 바다 가운데에 위치했고, 대방 동남쪽 대해 중에 위치했으며, 백제. 신라의 동남쪽 대해 가운데에 위치했음을 알 수 있는데, 후한 때의 낙랑군은 하북성 승덕시 흥륭현 일원을 말하는 것이며, 대방군은 북경 동쪽 준화 부근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신라는 요녕성 호로도 금주시 일원, 백제는 난하 하류 부근에 위치했음이 밝혀졌다.

  결국 지금의 난하, 산해관을 중심으로 그 부근이 우리 삼국 역사의 중심인 것이고, 그 부근에 낙랑과 대방도 위치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난하 하류에서 동남쪽 방향으로 가보면 왜국에 이르를 수가 있을 것인데, 그곳은 바로 지금의 요동반도이다.

  옛 기록들은 고대의 왜국이 일본열도가 아닌 지금의 요동반도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알려주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의 요동반도가 고대의 왜국이었다면, 탈해왕이 태어난 용성국(혹은 다파나국)은 지금 요동반도에서 동북쪽으로 1천여리 떨어진 곳에 위치했었다는 말이 되는데, 요동반도 부근으로부터 동북쪽으로 1천여리는 통구 쯤에 해당된다.

  이는 지금의 길림성 통구 부근이 옛 용성국(혹은 다파나국)이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탈해는 지금의 일본열도에서 한반도로 항해해 왔던 것이 아니라 길림성 통구 쯤에서 출발하여 강을 타고 내려온 후 발해를 건너 호로도 부근으로 항해해 왔던 것인데, 지금까지 우리가 옛 기록을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고, 탈해왕이 살다 죽어 묻힌 곳은 지금의 중국 요녕성 금주시(錦州市) 부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탈해왕의 능은 한반도 경주가 아닌 요녕성 금주(錦州) 부근에 조성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한반도 경주에 탈해왕릉이라는 무덤이 있고, 사람들은 아무 것도 모른 채 그 무덤이 진짜 신라 탈해왕릉이라고 믿고 있으니 참으로 답답-한 일이다. 

 

 

                                                      [한반도 경주에 있는 가짜 탈해왕릉]

 

☆ 한반도 경주에 있다고 하는 신라왕릉들이나 김유신 묘 등은 실제 신라의 왕들이 묻힌 곳이 아니고 김유신이 묻힌 곳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