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광개토태왕(호태왕) 비문 속 “비려(碑麗)”와 “염수(鹽水)”의 위치를 찾았다 - 최초주장
호태왕 비문 영락 5년(A.D.395) 조를 보면,
“영락 5년은 을미년이다.
왕이 비려(碑麗)가 (붙잡아간) 사람들을 돌려보내지 않으므로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였다.
부산(富山) 부산(負山)을 지나 염수(鹽水)에 이르러
세 개 부락 6, 7백영(營)을 격파하고,
셀 수 없을 만큼의 소, 말, 양떼를 노획하고 개선했다.
양평도를 지나 동쪽으로 ◯성 역성 북풍(北豐)을 거쳐왔다.
왕이 사냥을 준비시켜 국경도 구경하고 사냥도 즐기면서 돌아왔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아직까지 이 “비려(碑麗)”와 “염수(鹽水)”의 위치를 정확히 밝힌 사람은 없었다.
학자들은 비려가 거란의 한 일파였다고 알고 있으면서도 염수를 시라무렌강 상류쯤이라고 추정하고 있는데, 필자가 보기에 이는 기본적으로 우리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중심 강역을 한반도로 인식하고 있고, 연나라와 거란의 중심 강역을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있어 비려와 염수의 위치도 엉뚱한 곳에 비정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광개토대왕은 비려 정벌에 앞서 392년 9월에 서북쪽의 거란을 쳐서 남녀 5백명을 포로로 잡고 또 포로로 거란에 잡혀갔던 백성 1만 명을 불러 타일러 귀환시켰었고,
호태왕비문에 의하면, 395년에 이르러 비려를 치게 되는데, 비려를 쳐서 셀 수 없을 만큼의 양떼와 소, 말을 노획했다고 했다.
이는 비려라는 곳이 초원지역으로서 유목민들이 목축을 생업으로 하면서 살던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고,
이후 고구려는 지금의 하북성 보정, 역현 부근에 위치해 있던 후연(後燕)과의 사이에 갈등이 생겨 상당기간 공방전을 펼치게 된다.
☆ 거란의 먼 선조는 고조선 때의 부여로서 우리와 혈통적으로 통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이 비려는 지금의 산서성 북쪽 내몽골 오란찰포 부근으로서 고구려의 서쪽 또는 서북쪽에 위치했을 것이라는 비정이 가능해 진다.
호태왕 비문을 보면, 광개토대왕은 비려를 친 후 양평(襄平)을 지나 고구려의 서쪽 국경도 구경하고 사냥을 하면서 동쪽으로 개선했다고 기록되어 있어 옛 요동인 지금의 북경 부근이 당시 고구려의 서쪽 국경에 해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비려는 고구려의 서쪽인 지금의 내몽골 오란찰포(烏蘭察布) 부근에 위치했었다는 말이 되는데, 이 오란찰포 바로 북쪽 찰합이우익후기(察哈尒右翼後旗)에 지금도 “염호(鹽湖)”라고 부르고 있는 매우 큰 호수가 있다.
그렇다면 이 염호가 바로 광개토대왕이 영락 5년에 정복했던 비려의 염수(鹽水)이고, 이때 광개토대왕은 지금의 내몽골 오란찰포 부근지역을 정복하고 동쪽으로 장가구를 지나고 북경 부근을 지나 당시 고구려의 도읍 평양성(황성)이었던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 부근으로 돌아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찰합이우익후기는 지금도 산서성 대동에서 북쪽으로 내몽골 오란찰포를 지나 몽골의 도읍인 울란바토르로 통하는 길목으로서 교통의 요충지이다.
고구려가 이 오란찰포, 찰합이우익후기 부근을 차지하고 있으면 내몽골 정람기 부근에 위치했던 동부여와 하북성 역현 부근에 위치했던 연나라와의 교통로가 차단되고 만다.
그렇게 될 경우 연나라는 동부여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게 되고, 동부여는 모피와 모직물, 말 그리고 황금 등을 연나라와 교역할 수 없게 된다.
이때 고구려가 두 나라의 목줄을 조일 수 있는 요충지를 차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되자 후연과 동부여는 연합하여 이 교통로를 뚫기 위해 고구려를 침공하게 되는데, 얼마 후 후연이 멸망하게 되자 광개토대왕은 영락 20년(A.D.410)에 이르러 동부여가 조공을 바치지 않는다는 명분을 내세워 몸소 군사를 이끌고 동부여를 침공하여 64개성, 1,400개 촌을 빼앗아 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고 지금의 요하 동쪽에 고구려가 위치하고 있었고, 고구려의 도읍 국내성이 호태왕비가 서 있는 집안(集安)이며, 평양성, 황성은 북한 평양이고, 연나라가 요하 서쪽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이해함으로써 광개토대왕이 서북쪽으로 대흥안령 부근에 위치한 비려를 정벌했고 따라서 염수가 시라무렌강(서랍목륜하) 상류를 말한다고 엉뚱한 해석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는 호태왕 비문 속의 부산이 지금의 의무려산을 말하는 것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순 엉터리 비정이다.
광개토대왕이 비려를 정벌하기 위해 출발했던 평양성(황성)은 지금 중국 하북성 승덕시였고, 왕이 몸소 군사를 이끌고 갔던 염수는 지금의 대흥안령 부근이 아니라 산서성 북쪽 내몽골 찰합이우익후기에 있는 “염호(鹽湖)”를 말하는 것이었고, 비려는 그 부근에 위치했던 나라였다.
이로써 천년이 넘도록 그 위치를 알 수 없어 한 없이 찾아 헤맨 호태왕비문 속의 “염수(鹽水, 필자주 : 이곳이 곧 대염박이다)”를 찾은 것이고, “비려(碑麗)”의 위치를 찾은 것이다.
역사를 억지로 해석하지 말고 필자의 주장에 따라 역사 기록을 다시 꼼꼼하게 해석해 보라.
조금의 의문도, 혼란도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