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임나국(任那國)은 충주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다 - 최초주장
문헌비고 충주목 조를 보면, “본래는 임나국(任那國)이었는데, 백제의 영토가 되어서는 낭자곡성(狼子谷城)이라 하였다.[낭자성이라고도 하고, 미을성이라고도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우리의 일반적인 상식과는 달리 임나국이 충주 부근에 위치하고 있던 나라였음을 알게 한다.
☆ 동국문헌비고는 조선의 문물제도를 분류 ·정리한 백과사전식의 책으로 목판본이며 100권 40책으로 되어 있다.
조선 영조의 명을 받아 1769년 12월 편찬에 착수하여 다음 해인 1770년(영조46년)에 완성되었다. 이때 문헌비고 찬집청을 설치하고, 홍봉한을 도제조로 하여 당상과 낭청을 각각 9명씩 임명했다.
체제는 중국 원나라 마단림이 저술한 『문헌통고(文獻通考)』의 예에 따라 상위(象緯;권1∼5) · 여지(輿地;권6∼22) · 예(禮;권23∼38) · 악(樂;권39∼51) · 병(兵;권52∼55) · 형(刑;권56∼62) · 전부(田賦;권63∼66) · 재용(財用;권67∼70) · 호구(戶口;권71) · 시려(市閭 ;권72∼73) · 선거(選擧;권74∼82) · 학교(學校;권83∼90) · 직관(職官;권91∼100)의 13고(考)로 나누어 수록하였다.
그 후 이를 다시 증보하여 고종 때인 1903년 1월 법무국장 김석규의 건의가 채택되어, 홍문관 안에 찬집소(纂輯所)를 두고 박용대(朴容大)· 조정구(趙鼎九)· 김교헌(金敎獻)· 김택영(金澤榮)· 장지연(張志淵) 등 33인이 찬집을 맡고, 박제순(朴齊純) 등 17인이 교정을 맡았으며, 한창수(韓昌洙) 등 9인이 감인(監印)을 맡고, 김영한(金榮漢) 등 3인이 인쇄를 맡아 5년 만에 완성시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라 하고는 250권으로 간행하였다.
그리고 삼국사기 권제35 잡지제4 지리2 중원경 조를 보면,
“중원경은 본래 고구려의 국원성인데 신라가 이를 평정하여 진흥왕이 소경(小京)을 설치하였고, 문무왕 때에 여기에 둘레가 2,592보인 성을 쌓았고, 경덕왕이 중원경으로 개칭한 것인데 지금의 충주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
조선시대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 권지14 충청도 충주목 건치연혁에도, “본래 고구려의 국원성인데[혹은 미을성이라고도 하고 혹은 완장성이라고도 한다] 신라가 빼앗아 진흥왕이 소경을 설치하여 귀척의 자제와 6부의 호족과 백성들을 옮겨 채웠고, 경덕왕이 중원경으로 고쳤다. 고려 태조23년에 지금 이름(충주)으로 고쳤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고구려의 국원성, 신라의 중원경, 고려의 충주가 곧 같은 곳을 말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 강수 열전을 보면,
“강수는 중원경(충주) 사량 사람인데 그 아버지는 석체 나마이다. 그 어머니가 꿈에 뿔 있는 사람을 보고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의 머리 뒤에 불거진 뼈가 있었다. ...............태종대왕이 왕위에 오른 뒤에 당나라 사신이 와서 조서를 전하였는데, 그 조서에 이해할 수 없는 곳이 있어 왕이 강수를 불러 물으니 그가 왕 앞에서 한번 보고도 의심스러운 데가 없이 해석하였다. 왕이 놀랍고 기뻐서 서로 늦게 만난 것을 한탄하고 그의 성명을 물으니 강수가 대답하기를 ”저는 원래 임나가량(任那加良) 사람이며 이름은 자두입니다"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그대의 두골을 보니 강수선생이라고 불러야 되겠다” 하고는 당나라 황제의 조서에 회답하는 표문을 지으라 하였다. 그의 글이 세련되고 뜻이 충분하게 함축되어 있으므로 왕이 더욱 그를 기특하게 여겨 이름을 부르지 않고 다만 임생(任生: 임선생, 또는 임나출신이라는 의미로 보인다)이라고 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강수가 충주 부근 출신이고 그곳이 임나가량(임나가라)이었으며, 강수의 성씨를 임씨로 추정해 볼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신증동국여지승람 충주목 인물 조를 보면, 신라 “임강수(任强首)”라는 인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임강수는 그 어머니가 꿈에 뿔 있는 사람을 보고 임신하였는데, 낳으매 머리 뒤에 높은 뼈가 있고 또 사마귀가 있었다. 장성하자 그 아버지 석체가 묻기를.........태종왕이 즉위하자 당나라 사신이 와서 조서를 전하는데 해득하기 어려운 곳이 있었다. 왕이 강수를 불러 물으니 한번 보고는 해설하여 막히는 곳이 없었다. 왕이 놀라고 기뻐하여 서로 늦게 만난 것을 한하고 회사하는 표문을 짓게 하니 문장이 묘하고 할 말을 다 하였다. 왕이 더욱 기이하게 여겨 이름을 부르지 않고 항상 임생(任生)이라고 불렀다. 집이 가난하여도 태연하였다. 왕이 유사에게 명하여 해마다 신성의 조세 1백석을 주었다. 문무왕 때에 사찬을 제수하고 녹봉으로 벼2백석을 더 주었다. 신문왕 때에 죽으니 관가에서 그를 장사 지냈다...........”라고 기록하고 있어 삼국사기 강수 열전에 기록되어 있는 강수(强首)와 동일인물 임을 알 수 있는데, 삼국사기에서 분명하게 밝히지 않은 강수의 성씨를 “임(任)”씨로 확실하게 기록하고 있다.[강수의 아버지가 석체(昔諦) 나마라는 기록에 근거하여 석씨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문헌비고에서 말하는 임나국(任那國)이라는 의미는 혹시 임씨의 나라 즉 임씨가 왕위에 올라 있던 조그만 소국이라는 의미가 아닌가 싶다.
일본서기 10세 숭신천황 65년 조를 보면, “가을 7월 임나국이 소나갈질지를 보내 조공하였다. 임나는 축자국에서 2천여리 떨어진 곳에 있다. 북쪽으로는 바다(큰 강?, 큰 호수?)로 막혀 있고 계림의 서남에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고 또 11세 수인천황 2년 조를 보면, “이해 임나인 소나갈질지가 나라에 돌아가고 싶다고 말하였다. 아마 선왕 대에 내조하여 아직 돌아가지 않았던 것인가? 고로 소나갈질지에게 후하게 상을 주었다. 붉은 비단 백필을 주어 임나의 왕에게 하사하였다. 그런데 신라인이 길을 막고 빼앗았다. 두 나라의 원한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일설에 말하기를, 숭신천황 대에 이마에 뿔이 난사람이 배 한척을 타고 월국(越國)의 사반포(笥飯浦)에 정박하였다. 고로 그곳을 각록(角鹿)이라 한다. 어느 나라 사람인가 물으니 ”의부가라국(意富加羅國)의 왕자로서 이름은 도노아아라사등(都怒我阿羅斯等), 다른 이름은 우사기아리질지간기(于斯岐阿利叱智干岐)라 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임나국이 일찍부터 왜국과 교류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하고, 일본서기에 나타나는 임나국이 바로 문헌비고에서 말하는 임나국과 동일한 나라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지금까지 그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없었던 임나국은 충주 부근에 있었던 조그만 소국이었다고 할 수 있으므로 임나국이 없었다는 주장으로부터 임나국이 대마도를 말한다고 하는 주장 또는 임나국이 남해안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주장들은 틀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이 이러하다면 임나국에 대한 지금까지의 해석을 전혀 달리해야 하고, 강수의 원래 조상은 충주 부근에 위치하고 있던 소국인 임나국의 왕이었으나 언젠가 백제에게 병합을 당했고, 그 땅이 고구려에 속했다가 다시 신라 땅이 되었는데, 태종무열왕 때에 이르러서 강수의 학문이 신라 땅에서 꽃을 피우게 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