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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북연의 도읍 용성(화룡)은 지금의 어디를 말하는가? - 최초주장

윤여동 2010. 6. 14. 00:01

윤여동설 - 북연의 도읍 용성(화룡)은 지금의 어디를 말하는가? - 최초주장

 

 

 

 

 

 

 

 

  북연의 도읍 용성(화룡)이 어디인지 아직까지도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우리가 우리의 역사도 아닌 북연의 용성(화룡)을 찾으려 애쓰는 것은 그곳이 고대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유성(柳城)이고, 고구려 장수왕 때의 고구려 서쪽 경계일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용성의 위치를 찾으면 옛날 춘추전국시대에 연나라의 진개가 고조선을 침공하여 1천여리(2천여리라고도 한다)의 땅을 빼앗아 설치했다는 연5군의 위치를 알 수 있게 되어 고조선의 옛 땅이 어디까지였는지도 알 수 있어 우리의 고대역사 해석을 지금과는 전혀 새롭게 할 수 있게 된다.

  우리의 고대역사에서 지금까지 확실하게 밝히지 못했던 잃어버린 고리 하나를 찾아 역사 복원에 한발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 역사연구자 중에 요녕성 조양을 북연의 용성(화룡)이라 주장하는 사람이 있으나 이는 틀린 것이다. 연나라는 역사상 지금 북경 동쪽을 흐르는 백하, 조백하 동쪽으로 진출한 적이 없다.

 

  서기 435년 가을.

  북위가 북연을 빈번히 공격하니 북연은 위험이 날로 더해갔다.

  그러자 북연의 왕 풍홍은 “만일 사태가 위급해지면 동쪽의 고구려에 잠시 의탁하고 있다가 후일을 도모하겠다”고 생각하고는 사신 양이를 고구려 장수왕에게 보내 망명을 받아주기를 요청하게 된다.

  그런데 436년 4월에 이르러 북위가 북연의 도읍 용성과 가까운 곳에 위치한 백랑성(白狼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켜버리자, 장수왕은 북연의 멸망이 가까워졌다고 판단하고 장수 갈로맹광으로 하여금 군사 수만명을 거느리고 사신 양이와 함께 화룡(和龍: 북연의 도읍 용성에 있던 왕궁 화룡궁을 말한다)으로 가서 북연의 임금 풍홍을 맞아오게 한다.

   이때 북연왕 풍홍은 용성(龍城)에 남아있는 주민들을 인솔하여 동쪽으로 옮기고는 궁전인 화룡궁에 불을 지르니 불이 열흘 동안이나 꺼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나서는 부녀자들에게는 갑옷을 입혀 가운데에 서게 하고 정규군은 바깥에 서게 한 다음 갈로맹광은 기병을 거느리고 맨 뒤에 서서 수레를 나란히 하여 나아가니 그 행렬이 80리에 이르렀다고 전한다.

 

☆ 연나라는 춘추전국시대의 연나라로부터 진, 한, 당 등을 지나면서도  “연(燕)”이라는 명칭을 계속 사용하여 왔고, 지금도 연산(燕山 : 현재의 연산은 지명이 이동되었다)이라는 산맥이름이 남아 있어 그 위치를 가늠해 볼 수 있게 한다.  

  여기에서는 5호 16국 시대의 전연, 후연, 북연 등에 관한 것인데, 용성(龍城)으로 도읍을 옮긴 때는 전연의 모용황 때로서 서기 342년 10월이었고, 유성(柳城)을 고쳐 용성(龍城)이라 했다고 하고, 용산에 흑룡과 백룡이 나타나자 궁궐의 이름을 화룡궁(和龍宮)이라 했다고 한다. 유성과 용성, 화룡이 같은 지역을 말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기 438년 봄 3월초에 북연왕 풍홍이 고구려의 요동(遼東)에 도착하니 장수왕은 사신을 보내 “용성왕 풍군이 들에서 묵으니 사람과 말들이 피로해서 어찌하오?” 라고 하면서 위문을 빙자하여 조롱한다.

 

☆ 북연의 풍홍이 용성의 화룡궁을 떠나 요동에 도착할 때까지 약 2년이 걸린 것으로 나타나는데, 거리상으로는 그리 먼 거리가 아닌데, 왜 그렇게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는지 모르겠다. 혹시 이때 풍홍이 고구려 땅에 일단 정착하여 잃어버린 북연의 옛 땅을 회복하려 하다가 여의치 않자 그를 포기하고 요동으로 왔던 것일까? 

 

  북연왕 풍홍은 부글부글 끓었겠지만 이미 나라를 잃어버린 처지였기 때문에 장수왕이 정해준 곳인 평곽(平郭)에 임시로 거처했다가 얼마 후 다시 북풍(北豊)으로 옮기게 되는데, 장수왕은 풍홍이 자신의 처지를 인식하지 못하고 황제인양 계속 거들먹거리자 그 시종들을 빼앗고 태자 왕인을 볼모로 데려와 버린 후 결국에는 풍홍 일가를 죽여 버리게 되는 것이다.  

  고구려가 연나라에 맺힌 한이 많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 용성은 옛 유성의 북쪽에 위치했다고 하는데, 유성은 옛날 고죽국이 있던 곳이었다. 지금 북경 방산구 유리하진 부근은 옛 유적들이 즐비한 곳이다.

 

  그렇다면 북연의 풍홍은 이때 용성(화룡궁)을 떠나 북쪽으로 향하여 요동성인 지금의 북경 부근에 일단 도착한 후 그 부근의 평곽이라는 곳으로 옮겨 살다가 다시 북풍으로 옮겨 그곳에서 죽었다는 말이 된다.

  고구려 요동성이 지금의 북경 부근으로 비정되고, 한서 권28하 지리지 제8하 요동군 조를 보면, 요동군의 속현 18현 중에 “평곽현(平郭縣)”이 있는데, 이 평곽은 지금의 북경 북쪽 부근으로 비정되고 북풍의 위치는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그런데 고구려의 태도가 점점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북풍에 있던 풍홍은 신변의 위협을 느끼게 되어 다시 송나라로의 망명을 추진하게 되고, 송 태조가 사신 왕백구 등을 보내 장수왕에게 풍홍을 송나라로 보내 주기를 요청하게 되는데, 이때 장수왕은 “풍홍을 남쪽으로 가게 하는 것이 싫어서................” 풍홍과 그의 자손 열명을 함께 북풍에서 죽여 버렸다는 것이다.

 

 

☆ 사서의 기록을 보면 북연은 낙랑군이 고구려 미천왕에 의해 축출된지 100년도 더 지난 뒤에 세워진 나라였는데, 북연의 공주를 “낙랑공주” 라고 부른 것으로 나타난다. 북연의 도읍이었던 용성(화룡궁) 부근에 낙랑군이 위치했다는 말로 이해가 가능한데, 이를 보면 313년에 고구려 미천왕이 지금의 북경부근에 위치했던 후한낙랑군을 침공하여 그 땅을 빼앗아가자 낙랑군을  용성 부근으로 옮겨 유지했었기 때문에 북연의 공주를 낙랑공주라고 부를 수 있었을 것이다.

  낙랑군은 서기 313년에 완전히 소멸한 것이 아니라 장소를 옮겨 그 후에도 상당기간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