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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전연 모용황의 고구려 환도성 침공로를 밝힌다 - 최초공개

윤여동 2010. 7. 12. 03:37

윤여동설 - 전연 모용황의 고구려 환도성 침공로를 밝힌다 - 최초공개

 

 

 

 

 

 

 [방산 유리하진 부근의 고죽성터와 용성(화룡성)터 추정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16대 고국원왕 12년(A.D.342) 조를 보면,

  “봄2월 환도성을 보수하고 또 국내성을 쌓았다.

가을 8월 왕이 환도성으로 옮겨왔다.

겨울 10월 연나라(전연) 임금 황(모용황)이 용성(龍城: 화룡)으로 도읍을 옮겼다.

 입위장군 한(모용한)이 황(모용황)에게 청하기를 ‘고구려를 먼저 빼앗은 다음 우문(우문선비)을 쳐부숴야만 중원을 도모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고구려로 가는 길은 두 길이 있는데, 북쪽 길은 평탄하고 넓으며(?), 남쪽 길은 험하고 좁기 때문에(?) 군사들이 북쪽(?) 길로 가자고 하였다.

  한이 말하기를 ‘적국이 우리의 대군이 반드시 북쪽(?) 길로 올 것이라고 생각하여 북쪽(?)에 치중하고 남쪽(?)을 가볍게 여길 것이니 왕께서는 마땅히 정예부대를 거느리고 남쪽(?) 길로 나가 그들이 뜻하지 않은 때에 치게 되면 북쪽(?)의 성들은 칠 필요도 없을 것이며 따로 소부대를 북쪽(?) 길로 보내면 다소 실수가 있다 하더라도 그들의 심장부가 이미 무너졌으므로 팔다리는 꼼짝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니 황이 그 말을 따랐다.

 

  겨울 11월 연나라 임금 황이 친히 강병 4만을 거느리고 남쪽 길로 나와서 모용한과 모용패로서 선봉을 삼고, 따로 장사 왕우 등을 보내 군사 1만5천명을 거느리고 북쪽 길로 나와서 침입하게 하였다.

  왕(고국원왕)이 아우 무를 시켜 정예부대 5만을 거느리고 북쪽 길을 방어하게 하고 자신은 약한 군사를 거느리고 남쪽 길을 방비하고 있었다.

  이때에 모용한 등이 먼저 와서 교전하고 황이 대군으로서 잇따라 쳐들어오니 우리 군사가 크게 패했다.

  좌장사 한수가 우리 장수 아불화도가를 죽이니 모든 군사들이 이긴 틈을 타서 드디어 환도성(丸都城)으로 들어왔다.

 왕이 초췌한 모습으로 단웅곡을 향하여 도망치니 연나라 장군 모여니가 뒤쫓아 와서 왕의 어머니 주씨와 왕후를 사로잡아 가지고 돌아갔다.

  이때에 왕우 등은 북쪽 길에서 우리 군사와의 전투에서 모두 전사했다.

  이로 인하여 황은 더 이상 추격하지 않고 사람을 보내 왕을 초청했으나 왕이 가지 않았다.

  황이 돌아가려 할 때에 한수가 말하기를 ‘고구려 땅을 수비군을 두어 지킬 수는 없습니다. 지금은 그들의 임금이 도망하고 백성들은 흩어져 산골짜기에 숨어 있으나 우리 대군이 돌아간 뒤에는 반드시 다시 모여들어 전쟁 뒷수습을 할 것이니 이것이 근심거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왕의 아버지 유골을 파서 싣고 살아 있는 왕의 어머니를 잡아가지고 돌아갔다가 고구려왕이 스스로 와서 사죄하기를 기다려 돌려주어 은혜와 신의로서 무마하는 것이 상책일까 합니다.

  연왕 황이 그의 말에 따라 미천왕의 능을 파서 그의 유골을 싣고 대궐 창고에 있는 역대의 보물들을 탈취하고는 남녀 5만여명을 사로잡고 궁실을 불태운 뒤 환도성을 허물어버리고 돌아갔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이 전연과 고구려의 전쟁에서 고구려가 전연의 기만전술에 속아 참패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 북사 고구려전에도, “을불리(미천왕)가 죽고 아들 쇠(고국원왕)가 대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북위 건국 4년(A.D.342) 모용외의 아들 모용황이 고구려를 정벌하였다. 남쪽(북쪽의 오기) 좁은 길로 쳐들어가 목저에서 쇠의 군사를 대파하고 추격하여 환도(환도성)에 이르니 쇠는 혼자서 도망하였다. 모용황은 쇠의 아버지 무덤을 파헤치고, 그의 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진귀한 보화를 노략질하고 남녀 5만명을 사로잡았으며 그의 궁실을 불태우고 환도성을 허문 뒤 돌아왔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때 전연의 도읍 용성(龍城: 화룡)은 지금의 방산시 유리하진 부근이었다.

  이곳이 바로 전연 모용황이 건설했던 용성의 화룡궁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그리고 이때 고구려의 환도성은 지금 북경 북쪽 발해진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으므로 모용황은 고구려군을 헷갈리게 하기 위하여 일부 소수 군사를 주력군으로 위장하여 북쪽으로 향하게 하여 평탄한 북쪽 길로  환도성으로 향하게 했고, 실제 주력군은 험한 남쪽 길을 택하여 환도성으로 향하게 함으로써 작전상 고구려군을 둘로 나누게 한 후 허를 찔러 환도성을 쉽게 함락 시킬 수 있었다고 보여진다.

[필자주 : 그런데 현지 지형상 북쪽 길이 험하고, 남쪽길이 평탄하니 남과 북이 바뀌어 기록된 것은 아닐까?]

  우리 고대 역사의 진실을 찾으려면 북경 부근을 눈여겨 보라. 

  그 부근에 졸본도 있었고, 국내성도 있었으며, 환도성도 있었고, 요동성도 있었으며, 신성도 있었으니.................. 

  이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역사의 진실에 가까워질 수 있고, 이를 믿지 못하면 영원히 진실을 밝힐 수 없을 것이다.

  필자의 말을 귀담아 들어 손해볼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