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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송막기문을 지은 홍호의 유배지 냉산(冷山)을 찾았다 - 최초공개

윤여동 2010. 7. 26. 07:36

윤여동설 - 송막기문을 지은 홍호의 유배지 냉산(冷山)을 찾았다 - 최초공개

 

 

  고려사절요 예종 10년(A.D.1115) 조를 보면,

  『생여진의 완안아골타가 황제라 칭하고 이름을 민이라 고쳤으며, 국호를 금(金)이라 하였다.

  그 풍속이 흉노와 같아서 모든 부락에 성곽이 없고, 산과 들에 흩어져 거주하며 문자가 없어 끈을 매어 약속한다. 그 지방에 돼지, 양, 소, 말이 많은데, 말은 준마가 많다.

  사람들은 사납고 날래며 어릴 때부터 활을 당겨 새나 쥐를 쏘기 때문에 장성하여 활을 쏘지 못하는 사람이 없으며, 말을 달리고 전투를 익혀 강병이 되는데, 여러 부락이 제각각 우두머리라 하여 통일이 되지 못하였다.

  그 지방이 서쪽은 거란이요, 남쪽은 우리나라(고려) 땅이기 때문에 그들은 일찍부터 거란과 우리 조정을 섬겼는데, 조회하러 올 때마다 부스러기금, 담비가죽과 말을 폐백으로 삼았으며, 우리 조정에서도 은과 폐백을 후히 주어 해마다 그렇게 하였다.

  혹자는 말하기를, “옛날 우리나라(고려) 평주의 중 '금준(今俊)'이 도망하여 여진으로 들어가서 아지고촌(阿之古村)에 살았는데, 이가 금나라의 시조라 한다”고 하며,

  혹자는 말하기를, “평주의 중 금행(今幸)의 아들 극수(克守)가 처음으로 여진에 들어가서 아지고촌에 살면서 여진여자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았는데, 고을태사라 하며, 고을이 활라태사를 낳고, 활라는 아들이 많았다. 장자를 핵리발, 막내아들을 영가라 하였는데, 영가가 제일 영걸스러워 여러 사람의 마음을 얻었다. 영가가 죽으니 핵리발의 장자 오아속이 지위를 계승하고, 오아속이 죽으니 아우 아골타가 섰다”고 한다 』

  라고 기록되어 있어 금나라의 건국과 그 왕실의 혈통을 대강은 알 수 있게 한다.

 그런데 금나라 왕실의 선조가 고려에서 여진으로 이주해 간 고려사람 금준 또는 극수라는 것이다.    

  또한 금사 태조본기에도 “금나라 시조의 이름은 함보(函普)로서 고려로부터 왔다”고 기록되어 있고, 또 함보가 금태조 아골타의 7대조로 기록되어 있으니 금나라의 역사는 마땅히 우리 역사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생각된다.

 

★ 송나라의 홍호가 지은 송막기문에는 금왕의 9대조가 감복(龕福)이라 기록되어 있고 신라인이라 기록되어 있는데 금왕(金王)이란 홍호가 냉산에 억류되어 있을 때의 금나라 3대 황제 희종(아골타의 손자)을 말하는 듯하다.

 

  금나라(1115-1234)는 여진족(시기에 따라 숙신, 읍루, 물길, 말갈이라고도 불렀다)이 중심부족으로서 1115년에 건국되어 1125년에는 산서성 북부와 그 북쪽 내몽골에 위치했던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천조제를 포로로 잡게 되며, 1126년에는 송나라의 도읍 개봉을 공격하여 빼앗고, 송 휘종과 흠종을 포로로 잡게 되어 대제국으로 발돋움하게 되고, 송나라는 양자강 남쪽으로 옮겨 임안(臨安 : 지금의 항주)에 도읍하고 금나라에 포로로 잡혀간 휘종의 아들이며 흠종의 동생인 조구를 황제(남송 고종)로 추대하고 다시 송나라를 재건하게 되는데, 역사에서는 이를 남송이라 부른다.

 

★ 금나라는 상경회령부, 북경대정부, 중도대흥부, 동경요양부, 서경대동부, 남경개봉부를 설치하게 되는데, 그 위치에 대하여 현재 정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리하여 남송의 고종은 아버지인 휘종과 형인 흠종의 송환을 협상하기 위해 홍호를 사신으로 파견하게 되는데, 금나라에서는 사신으로 온 홍호까지도 억류해 냉산(冷山)으로 유배를 보내게 되어 홍호는 그곳에서 유배생활을 하게 되는데, 냉산의 위치에 대해서도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러다가 10여년 후에야 홍호는 금나라에서 송환되어 남송으로 돌아가게 되고, 금나라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들은 이야기들을 기록으로 남겼는데,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송막기문(松漠記聞)이다.

  송막에서 들은 이야기를 기록했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송막기문을 보면 홍호는 자신이 유배생활을 했던 냉산이 연산(燕山)에서 3천리 떨어진 곳이고, 금나라의 도읍(상경회령부)에서 2백리(필자주 : 천이백리의 오기로 보인다] 떨어진 불모지였으며, 냉산의 동남쪽 1천여리에 장백산이 있으며, 장백산에서 흑수가 발원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필자주 : 지금의 흑룡강이 발원하는 곳은 대흥안령 아이산 부근이므로 홍호가 말한 흑수는 지금의 흑룡강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금나라가 건국된 상경회령부(上京會寧府)는 지금의 어디이고 또 장백산(長白山)은 지금의 어느 산을 말하는 것일까?

  연산산맥은 지금도 북경 북쪽을 가로질러 산해관까지 이어지고 있는 산맥인데, 냉산(冷山)은 바로 이 연산산맥에서 3천리 떨어졌다는 것이고, 금나라의 도읍(상경회령부)에서 2백여리(필자주 : 천이백여리의 오기로서 千(천)자가 탈락한 것으로 생각된다) 떨어진 불모지였으며, 냉산에서 동남쪽으로 1천리 떨어진 곳에 장백산이 위치한다는 것이다.

  여러 사서들의 기록들을 종합하여 판단해 보면,

  장백산은 지금의 칠로도산산맥 중 대광정자산(大光頂子山)을 말하는 것이 분명하고,

  금나라의 상경회령부는 발해의 상경에 세웠다고 했고, 그곳이 곧 영고탑이라고 사서들에 기록되어 있는데,

  필자가 찾아낸 발해의 상경은 지금의 내몽골 파림좌기(巴林左旗)이고, 발해의 중경은 지금의 파림우기(巴林右旗)이다.  

  이를 보면 금나라는 발해의 옛 도읍 상경이었던 지금의 내몽골 파림좌기와 중경이었던 파림우기 부근을 차지하고 그 부근에서  일어나 금나라를 세웠던 것이고, 서남쪽의 요나라를 쳐 멸망시키고, 다시 남쪽으로 진군하여 송나라의 도읍 개봉을 쳐 빼앗아 대제국이 되었던 것이고, 지금의 북경 동쪽 난하 부근에는 우리의 고려가 위치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고려사에 금나라의 남쪽에 고려가 위치했고, 금나라의 서쪽에 요나라가 위치하고 있었다고 기록했을 것이다.  

  금나라의 상경회령부는 지금의 내몽골 대흥안령의 파림좌기 부근인 것이다.

  금나라의 상경회령부가 지금의 파림좌기였고, 장백산이 지금의 대광정자산을 말하는 것이 확실하다면,

 홍호는 상경회령부인 지금의 파림좌기로부터 서쪽으로 1,200리쯤 떨어진 곳에서 유배생활을 했을 것이고 그곳이 곧 냉산(冷山)일 것인데, 지금 파림좌기의 서쪽 내몽골 석림호특(錫林浩特) 부근을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홍호는 그곳 냉산으로부터 장백산까지가 1천여리라는 기록도 남겼는데,

  냉산에서 상경회령부까지가 약 1,200리(원문에는 2백여리로서 천자가 탈락되었을 것이다)였다고 하였고,

  냉산의 동남방 1천여리에 장백산이 위치한다고 하였는데, 장백산은 지금의 대광정자산을 말하는 것이므로 방향과 거리가 거의 정확하다. 따라서 냉산은 지금의 내몽골 석림호특 부근에 위치한 산이었던 것이다.

  송막기문의 기록은 거의 정확했던 것이다. 

  

  이로써 지금까지 아무도 그 위치를 알 수 없었던 냉산을, 홍호가 송막(송림 수천리와 사막사이를 말하는 것으로서 옛 거란지역)에서 유배생활을 했던 때로부터 900여년이 흐른 이제야 거의 정확히 찾은 것이고,

  지금까지 그 확실한 위치를 몰라 주장들만 분분했던 금나라의 상경회령부(上京會寧府)가 지금의 내몽골 파림좌기(巴林左旗)이었음을 밝힌 것이고, 옛 태백산, 장백산이 지금의 대광정자산이었음도 밝힌 것이다.       

 

 

☆ 지금 중국 역사학자들은 금나라의 상경회령부 터가 흑룡강성 합이빈(하얼빈) 아성(阿城)에 있는 토성지(북성과 남성이 연결되어 있다)로 비정하고 있고, 그곳의 고총을 금태조능이라고 하고 있으나 내몽골 파림좌기가 금나라의 상경회령부였고, 영고탑이었다면 아성의 매우 큰 토성지와 고총은 해석을 달리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