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북송의 휘종과 흠종이 포로로 잡혀와 살다 죽은 태백산(장백산) 동쪽 오국성(五國城)의 진짜 위치 - 최초공개
북송의 휘종과 흠종은 1126년 도읍인 개봉을 함락당하고 포로로 잡혀 금나라로 끌려가 억류생활을 하다가 죽은 비운의 황제들이다.
나라를 망쳤으니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죄과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인데, 역사에서는 이를 정강의 변이라 부른다.
이때 금나라는 북송 휘종과 흠종을 비롯한 황후, 황태자, 친왕, 공주, 황족 등 무려 3,000여 명을 포로로 잡아 이들을 북쪽으로 끌고 와 태백산(장백산) 동쪽 오국성(五國城)에 억류하고는, 휘종에게는 중혼후(重昏候), 흠종에게는 혼덕공(昏德公)이라는 모멸적인 칭호를 붙이는데, 그들은 그곳에서 포로생활을 하다가 죽게 된다.
금나라는 후일 휘종이 죽은 뒤 휘종(당시 남송 고종의 아버지)의 유해와 남송 고종의 생모인 위씨는 송환했다지만 흠종은 끝내 송나라로 돌려보내지 않아 그는 오국성에서 죽어 그 부근에 묻혔다고 한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이 오국성의 정확한 위치를 알지 못하고 있고, 따라서 북송 흠종의 능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 오국성을 한반도 백두산 부근에서 찾으려 하는 사람도 있으나 이는 역사를 바로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고려사절요 인종 무신 6년(A.D.1128) 조를 보면, 남송에서 고려에 사신을 보내,
“......요즈음 난국을 당하여 국가에 일이 많더니 뜻밖에 오랑캐가 농간을 부려 마침내 2성(휘종과 흠종)이 먼 곳으로 가 계시니 상하가 근심과 걱정으로 편안할 겨를이 없습니다..........지금의 황제(남송의 고종)께서 처음으로 왕위에 올라 사신을 보내 국왕을 위문하고 나아가서 뱃길로 두 분의 황제를 모셔오도록 부탁하였습니다...............귀국에서 말하기를 ‘금나라로 가는 도로가 험난하여 갈 수 없다’고 하나 조종조 때 금나라 사람이 귀국의 사자를 따라 입공한 적이 있으니 당시에는 길이 개통되어 있었으며, 사람이 통행할 수 없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귀국은 또한 금나라 사람들도 이 길을 통행할까 염려하는 듯하나 금나라가 거란을 파한 뒤부터는 모두 하동과 산북(필자주 : 하동은 황하의 동쪽인 산서성, 산북은 내몽골을 말하는 것임)을 경유하여 사절이 왕래하니 반드시 이 길을 통과하지 않을 것이며, 귀국은 만에 하나 금나라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문제 삼지 않을까 염려하겠지만 양응성 등이 이번에 사절로 가는데에는 비무장 인원 110명으로 다만 국서와 예물을 가지고 가서 강화를 하려는 것이며 싸움을 하려는 것이 아니니, 귀국에서는 다만 길을 인도하여 사절 일행이 국경에 이르러 먼저 금나라 사람에게 보고하여 그 가부를 듣고 혹 인원을 줄이라 하면 모든 것을 하자는 대로 따를 것이니 이것으로 인하여 문제가 생길 일은 없을 것입니다.
만일 귀국의 길을 통하여 두 분의 황제를 맞아들인다면 2백년동안 충성으로 따르던 의리가 어긋나지 않을 것이며, 또한 여러 왕이 대우하여 주신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하게 되고,
고려에서는,
“여진은 처음에 부락에 흩어져 살아 일정한 군주가 없었기에 일찍이 우리나라에 예속되어 간혹 우리 사절을 따라 중국에 들어가 조공하더니 그 뒤로 점점 강성하여져서 항상 변경의 걱정거리가 되었습니다.
근자에는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을 침범하여 이로부터 무력이 더욱 커져서 우리나라로 하여금 칭신하게 하고 의례를 정하는데 일체를 옛날에 요나라를 섬기던 예절대로 하라하여 우리나라는 어쩔 수 없이 그대로 따랐습니다. 그 풍속이 싸움을 좋아하고 항상 우리가 중국을 따르는 것을 싫어하여 왔는데, 근자에는 국경에다 성과 보루를 수축하며 병사를 모아 주둔하여 우리나라를 침략하려 하고 있으니 만약 사절이 길을 빌려 저들의 국경으로 들어간다는 말을 들으면 반드시 시기하고 의심하여 문제를 삼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만약 답례의 사절을 보낸다는 명목으로 우리나라의 길을 빌려 입조하겠다고 하면 우리는 장차 무슨 말로 거절할 수 있겠으며, 만일 (금나라가) 바닷길이 편리한 줄을 알게 된다면 우리나라의 보전이 어려울 것이요 회남과 양절 연해의 지역도 그들이 넘겨다 볼 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하게 된다.
한 마디로 남송에서는 금나라에 포로로 잡혀간 북송 휘종과 흠종의 송환협상을 위해 고려를 경유하기를 간절히 원하니 제발 통행을 허락해 주고 길을 안내해 달라는 애원이고, 고려에서는 이런 저런 이유를 대서 그를 거부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 기록을 세밀히 보면 남송에서 오국성을 갈 때 반드시 고려를 거치지 않으면 갈 수 없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 고려는 한반도가 아닌 지금 중국 북경 동쪽 난하를 중심으로 하는 그 부근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고려의 도읍 개경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관성현이었다.
사실 고려는 한반도가 아닌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 당산시, 진황도시, 요녕성 호로도시, 금주시(錦州市) 일원과 내몽골 적봉, 통요 일부를 차지하고 있었고, 금나라가 그 북쪽 내몽골에 위치하고 있었다.
당시 금나라에서는 북송 휘종과 흠종 등 포로 3천여 명을 끌고 와서 태백산 동쪽 오국성에 억류해 놓고 외부인과의 접촉을 철저하게 차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임안(남송의 도읍으로서 지금의 절강성 항주)에서 뱃길을 이용하여 고려의 북쪽에 위치한 금나라의 오국성으로 가려한다면 항주에서 출발하여 북쪽으로 동중국해의 연안항로를 따라 항해하여 산동반도를 돌아 발해로 들어서서 고려의 강역을 반드시 통과해야 하므로 고려가 통행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다른 길이 없는 상황인 것이다.
그래서 남송에서는 고려의 협조가 절실히 필요했기 때문에 사신을 보내 애원을 했던 것이고, 고려는 금나라와의 관계상 남송 사신이 고려강역을 통과하여 오국성으로 간다면 여러가지 복잡한 문제가 생길 것을 염려하여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거절했던 것이라 할 것이다.
그렇다면 태백산(太白山 : 장백산, 백두산)은 지금의 어느 산을 말하는 것이고, 오국성(五國城)은 지금의 어디에 위치했던 것일까?
태백산(장백산, 백두산)은 바로 지금의 대광정자산(2,067m)을 말하는 것이고, 오국성은 바로 그 태백산(장백산)의 동쪽에 위치한 지금의 옹우특기 일원을 말하는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지금의 시라무렌하 상류 남쪽지역으로 보이는데, 당시 금나라의 상경회령부가 지금의 내몽골 파림좌기였으므로 오국성은 곧 금 상경회령부의 서남쪽에 위치한 곳이었다.
당시 금나라에서는 옛 북옥저 지역(고려의 관북지역에 해당한다)이었고, 옛 초기 현토군 지역이었던 지금의 내몽골 옹우특기 부근에 송 휘종과 흠종 등 포로들을 억류해 놓았던 것이다.
날씨가 따뜻한 개봉에서 살았던 그들에게는 무척이나 추운 곳이었을 것이다.
이제 오국성의 위치를 찾았으니 북송 흠종의 능을 찾는 것은 시간 문제일 뿐이다.
또한 이 오국성 부근은 해동청(海東靑)이라는 사냥매로도 유명한 곳이다.
오국성 동쪽 고려와의 국경지역에 해동청이라는 매가 많이 잡히는데, 사냥 능력이 매우 뛰어 났다고 한다.
그리하여 중국의 역대 왕조에서 자꾸만 해동청을 요구하여 매우 골치 아파했다는 기록이 전하고 있어 그를 알 수 있는데, 이는 오국성이 고려와 금나라의 국경 부근에 위치했음을 알 수 있게 하는 기록들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