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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백제 무령왕에게는 출생의 비밀이 있었다 - 최초주장

윤여동 2010. 9. 16. 22:42

윤여동설 - 백제 무령왕에게는 출생의 비밀이 있었다 - 최초주장

 

 

 

 

 

   우리나라 사람치고 백제 25대 무령왕(서기 461년 6월1일에 출생하여 523년 5월7일에 사망함)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고, 많은 사람들은 충남 공주에 있는 무령왕릉도 구경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아버지인 곤지와 곤지의 집안 형수였던 개로왕의 왕비 사이의 불륜 관계로 태어났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고, 삼국사기를 보고 무령왕을 동성왕의 둘째 아들로 아는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다.  

 

☆ 동성왕과 무령왕은 부자간이 아니라 이복 형제 사이로서 동성왕이 형이고 무령왕이 동생이다.

 

  그러나 일본서기 웅략천황 2년(A.D.458) 조를 보면,

  "가을 7월 백제의 지진원(池津媛)은 천황이 장차 부르려고 하였는데 석천순(石川楯)과 간통하였다. 천황이 크게 노하여 대반실옥대련에게 명하여 내목부로 하여금 부부의 사지를 나무에 묶어 놓고 불로 태워 죽였다.

  [백제 신찬에 이르기를, 기사년에 개로왕이 즉위하였다. 천황이 아례노궤를 보내 미녀를 청했다. 백제는 모니부인의 딸을 단장시켜 적계여랑이라 하여 천황에게 바쳤다] 라고 기록하고 있고,

  웅략천황 5년(A.D,461) 조에는,

  "여름 4월 백제의 가수리군(개로왕)은 지진원을 불태워 죽였다는 말을 전하여 듣고는, '옛날 여인을 바쳐 채녀로 하였다. 그런데 무례하여 나라의 명예를 떨어뜨렸다. 지금부터 여인을 바치지 말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아우 군군(곤지)에게 '너는 일본으로 가서 천황과 협상하라' 고 말하자 군군이 대답하기를 '상군의 명에 따르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원하노니 군의 부인을 저에게 주신 연후에 떠나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가수리군은 임신한 부인을 군군에게 시집보내고 말하기를 '내 임신한 부인은 이미 산달이 되었다. 만약 도중에 출산하거든 배에 태워 속히 돌려 보내라' 하였다. 드디어 헤어져 (왜국) 조정으로 보냈다.

  6월 병술 삭(초하루) 임신한 부인은 과연 가수리군의 말대로 축자의 각라도(各羅嶋)에서 출산하였다. 그리하여 그 아이의 이름을 도군(嶋君)이라 하였다. 군군은 배 한 척을 마련하여 도군을 그 어머니와 함께 백제로 돌려보냈다. 이를 무령왕이라 한다. 백제 사람들은 이 섬을 주도(主嶋)라고 부른다.

 

☆ 백제 개로왕 때 대륙백제의 도읍 한성은 지금의 진황도 도산 남쪽에 위치하고 있었고, 왜국은 지금의 요동반도를 중심으로 위치했다. 그렇다면 곤지는 지금의 사하, 청룡하, 난하를 타고 내려가 발해를 건너 왜국으로 갔을 것이므로 무령왕이 출생했다는 각라도(주도)는 발해 중의 어느 섬을 말할 것이다.

 

  가을 7월 군군이 경(왜국의 서울)에 도착했다. 이미 다섯 명의 아들이 있었다.[백제신찬에 이르기를, 신축년에 개로왕이 아우 곤지군을 보내 대왜에 가서 천왕과 만나게 하였다. 형왕의 기대에 부응했다]" 라고 기록하고 있어, 이때 곤지가 지진원 화형사건을 해결하기 위하여 왜국에 개로왕의 특사로 가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동생인 곤지가 형인 개로왕에게 임신하여 만삭이 된 형수를 자기에게 달라고 하자, 개로왕은 두 말하지 않고 만삭인 자신의 부인을 곤지에게 주어 혼인시킨 후 왜국으로 보냈는데, 도중에 아이를 출산하게 되자 곤지는 새로 태어난 아이와 그 어머니를 다시 되돌려 보내고 자신은 다섯 아들과 함께 왜국으로 갔었다는 말이 되는데, 이는 도덕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

  어떻게 동생이 형에게 만삭이 된 형수를 달라고 할 수 있으며, 또 그 형인 개로왕은 동생이 자기 부인을 달란다고 해서 두 말 하지 않고 줄 수 있단 말인가?

  이 기록 속에는 지금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비밀이 들어 있음에 틀림없다.             

 

  그런데 일본서기 웅략천황 21년 조의 주를 보면,

  "문주왕은 개로왕의 동복동생이다(汶洲王蓋鹵王母弟也)"라고 기록하고 있을 뿐 곤지가 이들과 동복이라 기록하지 않고 있고, 삼국사기에는 곤지가 문주왕의 동생이고 동성왕의 아버지라고 기록하고 있고, 남제서에는 동성왕의 할아버지를 백제 모도왕이라고 했다.

  이는 결국 개로왕과 문주왕은 동복 형제이고, 곤지는 집안 동생쯤 된다고 할 수 있다.

  남제서의 기록과 일본서기의 기록 그리고 삼국사기의 기록을 종합해 보면,

  개로왕과 문주왕은 동복형제로서 비유왕의 아들들이고, 곤지는 모도왕의 아들로서 동성왕의 아버지였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이때 곤지는 집안 형인 개로왕에게 만삭인 형수를 달라고 하였고, 그녀와 혼인한 후 무령왕 사마를 낳았다는 말이 된다.

  이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그런데 일본서기 무열천황 4년(A.D.502) 조에는,

  "이해 백제의 말다왕이 무도하여 백성에게 포학하게 하였다. 나라 사람들이 제거하고 도왕을 세웠다. 이를 무령왕이라 한다.

  [백제 신찬에 이르기를 말다왕이 무도하여 백성에게 포학하게 하였다. 나라 사람들이 함께 제거하고 무령왕을 세웠다. 이름은 사마왕이다. 이는 곤지왕자의 아들이다. 즉 말다왕이 (무령왕의) 배다른 형이다(卽末多王異母兄也)]" 라고 기록하고 있다.

 

# "卽末多王異母兄也"라는 기록을 보고 무령왕이 동성왕의 배다른 형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는 잘못으로서 이 기록은 동성왕이 무령왕의 배다른 형이라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곤지가 왜국으로 갈 때 곤지에게는 이미 5명의 아들이 있었고, 왜국에 가는 도중에 사마를 낳았다고 하기 때문이다. 즉 동성왕은 곤지의 둘째 아들이었던 것이고, 무령왕은 곤지의 여섯째 아들로 태어났다는 말이되는 것이다.

 

  백제신찬의 기록대로 말다왕(동성왕)이 무령왕의 이복형이라면, 이때 곤지는 형수였던 개로왕의 왕비와 불륜관계에 있었다는 말이 된다.

  상황을 유추해 보면,

  무령왕이 태어나기 전에 곤지에게는 이미 5명의 아들이 있었다고 했으므로 이때 곤지에게는 첫 부인이 있었고 이미 다섯 명의 아들을 두고 있었다.

  그런데 반도백제의 태자였을 곤지는 두 백제의 통합을 추진하기 위하여 대륙백제에 건너가 있었다.

  그러다보니 곤지와 대륙백제 개로왕의 왕비는 집안 형수와 시동생 사이로서 궁중에 함께 머무르고 있었을 것이고, 개로왕의 왕비는 한반도로부터 멀리 대륙으로 건너와 머무르고 있는 곤지가 생활하는데 불편이 없도록 보살펴 주었을 것이다.

 

☆ 이때 혹시 곤지의 첫 부인이 죽어 곤지가 홀애비가 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그들에게 사랑의 불꽃이 타올랐고, 둘이는 깊은 사랑을 속삭이게 되어 임신이 되고 말았다.    

  그렇지만 두 사람은 그러한 사실을 개로왕에게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세월은 두 사람의 애타는 마음을 모른 채 무심히 흘러만 갔고 개로왕의 왕비는 만삭이 되었다.

  오늘 낳을지 내일 낳을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곤지가 왜국에 특사로 가야할 상황이 되자 곤지는 모든 사실을 개로왕에게 털어놓지 않을 수 없었고, 개로왕은 그러한 상황을 이해하고 자기의 부인을 집안 동생인 곤지에게 주어 혼인시킨 후 동행하게 했는데, 왜국으로 가는 도중 각라도라는 곳에서 무령왕을 낳게 되었다고 한다면 백제신찬에 동성왕(말다왕)이 무령왕의 이복형이라는 기록과 무령왕이 곤지의 아들이라는 기록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무령왕은 그 아버지 곤지와 개로왕의 왕비 사이에서 태어난 불륜의 씨앗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