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카테고리 없음

윤여동설 - 백제 무왕이 어릴 적 살았던 마룡지를 찾았다

윤여동 2010. 9. 19. 21:42

 

윤여동설 - 백제 무왕이 어릴 적 살았던 마룡지(馬龍池)를 찾았다 

 

 

 

 백제 30대 무왕에 대하여 삼국사기는,

   “무왕의 이름은 장이니 법왕의 아들이다. 풍채가 영특하고 체격이 컸으며 그 의지와 기상이 호걸스러웠다. 법왕이 왕위에 오른 다음해에 죽어 아들이 왕위를 이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삼국유사 기이 제2 무왕 조에는,

  “제30대 무왕의 이름은 장이다. 그 어머니가 과부가 되어 서울 남쪽(서쪽의 오기?) 못가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못 속의 용과 관계하여 장을 낳았다. 어릴 때의 이름은 서동으로 재주와 도량이 커서 가늠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항상 마를 캐다 팔아 살았으므로 사람들이 서동이라고 불렀다.........” 라고 기록하고 있고,

 

☆ 무왕의 신분에 대해서는 두 기록이 각각 다른데 필자는 무왕이 법왕의 아들이 아니라 동성왕의 고손자쯤 될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형인 동성왕이 백가에 의하여 시해되고 나서 동생인 무령왕이 왕위에 오르게 되고 그 후손으로 왕위가 이어지자 동성왕의 후손들은 왕위에 오르지 못했는데, 어느 날 왕족인 서동의 아버지가 호수가에 홀로 살던 과부와 사랑을 나누어 서동을 낳았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법왕이 후손없이 죽고 마땅히 왕위를 이을 왕족이 없게 되자 백제왕실에서는 왕족을 찾게 되었는데, 이때 찾아낸 인물이 바로 서동이었다고 본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전라도 익산군 건치연혁을 보면,

  “본래 마한국이다. 후조선의 왕 기준은 기자의 41대손인데 위만의 난을 피하여 바다를 건너 남쪽으로 내려가 한(韓)의 땅에 가서 나라를 세우고 마한이라 하였다. 백제시조 온조왕이 이곳을 병합하고 그 후로 금마저(金馬渚)라 불렀다. 신라의 신문왕이 금마군으로 고쳤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고적 조를 보면,

  “보덕성(報德城) : 군의 서쪽 1리에 있는데, 유지가 남아 있을 뿐이다” 라고 기록하고 있고,

  불우 조를 보면,

  “오금사(五金寺) : 보덕성 남쪽에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서동이 어머니를 지성으로 모셨는데, 마를 캐던 땅에서 갑자기 오금을 얻었다. 뒤에 왕위에 오르자 그 땅에 절을 짓고 오금사라 하였다’고 한다” 라고 기록하고 있고,

  산천 조를 보면,

  “용화산(용화산) : 군의 북쪽 8리에 있는데 일명 미륵산이라고도 한다”

  “마룡지(馬龍池) : 오금사 남쪽 1백여보에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서동대왕의 어머니가 집을 짓고 살던 곳이라고 한다”라고 설명되어 있어 익산군 관아 서쪽에 위치한 못이라는 곳이 금마저의 마룡지라고 하는 호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서동(무왕)은 어릴 적에 이 금마저의 마룡지라고 하는 호수가에서 홀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마를 캐 팔아 살았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그런데 호수의 이름이 마룡지(馬龍池)라?

  사람들은 왜 그 호수를 마룡지라 불렀던 것일까?  

  혹시 호수의 형태가 말머리형상을 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