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칠지도의 “태화(泰和)”는 백제 12대 계왕의 연호였다 - 최초주장
백제 12대 계왕에 관하여 전해지는 기록은 지극히 단편적이다.
그가 10대 분서왕의 장자였다는 것과 천성이 강직하고 용맹했으며, 말타고 활을 잘 쏘았으며, 앞서 분서왕이 죽었을 때에는 어려서 왕위에 오를 수 없었고, 비류왕이 재위 41년에 죽으매 왕위에 올랐으나 재위 3년 9월에 죽고 말았다는 것 뿐이다.
그러나 이는 겉으로만 보여지는 계왕에 관한 기록일 뿐 사실 이때 백제에서는 장자파인 초고왕계와 차자파인 고이왕계가 왕위찬탈전을 벌이고 있었다.
4대 개루왕
(장자파) (차자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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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대초고왕 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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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대 구수왕 자(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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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 자(실명 : 구수왕보다 일찍 죽었다) 8대 고이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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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 ↓ ↓
툼 7대 사반왕 자(실명) 9대 책계왕
기 ↓ ↓
11대 비류왕 10대 분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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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대 근초고왕 12대 계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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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 반도백제
국 14대 근구수왕 시조 무광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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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대 침류왕 16대 진사왕 ?(실명)
앞서 4대 개루왕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
장자는 5대 초고왕이었고, 차자는 구태(仇台)였는데, 이때 백제에서는 왕위계승이 장자 상속을 원칙으로 했기 때문에 초고왕의 아들인 6대 구수왕이 왕위를 이었다.
그런데 구수왕의 아들이 일찍 죽어버리자 구수왕은 할 수 없이 큰 손자를 태손으로 봉했고 구수왕이 죽자 그 왕위는 큰 손자인 7대 사반왕이 오르게 된다.
그런데 사반왕의 왕위를 구태의 손자인 8대 고이왕이 찬탈하게 됨으로써 백제 왕실에 장자파와 차자파간에 피비린내를 풍기게 되는 것이다.
고이왕 조의 기록으로 전하기는 "구수왕의 아들(필자주 : 사실은 구수왕의 손자였다) 사반이 왕위를 이었으나 나이가 어려 정사를 잘 처리하지 못하므로 고이가 왕위에 올랐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사실은 이때 고이왕이 나이어린 조카 사반왕을 제거하고 왕위를 찬탈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백제의 왕위는 고이왕의 아들인 9대 책계왕으로, 다시 책계왕의 아들인 10대 분서왕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런데 분서왕이 재위 7년에 이르러 낙랑 태수가 보낸 자객에게 시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그 기회를 틈타 7대 사반왕의 동생의 아들인 비류왕이 백제의 왕위에 오르게 된다.
이는 이때 백제의 왕위계승이 차자파인 고이왕계에서 장자파인 초고왕계로 다시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11대 비류왕은 재위 41년 10월에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 다음 왕위를 이은 사람은 비류왕의 아들이 아니라 분서왕의 아들로서 앞서 나이가 어렸던 탓에 왕위에 오를 수 없었다던 분서왕의 장자 12대 계왕이었다.
이는 왕위찬탈일 가능성이 농후한데 이때 백제의 왕위계승은 다시 차자파인 고이왕계로 옮겨진 것이다.
그런데 이때 비류왕의 아들인 부여구(후일의 근초고왕)도 중년이 되어 있었고, 계왕 역시 50여세쯤의 나이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계왕은 재위 3년 9월에 비교적 젊은 나이에 죽게 되고, 그 뒤를 이어 계왕의 아들이 왕위에 오르는 것이 아니라 다시 비류왕의 아들인 13대 근초고왕이 왕위에 오르는 것이다.
이 말은 이때 근초고왕이 다시 계왕을 제거하고 그 왕위를 찬탈하여 왕위에 올랐다는 말로서 왕위가 초고왕계로 다시 옮겨진 것이다.
그렇게되어 백제의 왕위는 23대 삼근왕까지 장자파인 근초고왕의 후손으로 이어지게 되고, 24대 동성왕부터 31대 의지왕까지는 다시 차자파인 고이왕의 후손들이 백제의 왕위에 오르게 된다.
그런데 지금 일본에 있는 칠지도가 바로 이 백제 12대 계왕 때 만들어졌음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은 듯하다.
칠지도 명문을 보면, “泰和四年 五月 十六日 丙午正陽 造百鍊鐵 七支刀(태화 4년 5월 16일 병오년 하지날에 백번을 제련한 쇠로 칠지도를 만들었다)”라고 새겨져 있는데, 기록 속의 병오(병오년)이 바로 서기 346년으로서 삼국사기 기록 속의 계왕 3년에 해당한다.
칠지도는 바로 이해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346년이 태화 4년이라면 태화1년은 343년이었다는 말이 되는데, 이때는 비류왕 40년에 해당하는 해이다.
이 말은 곧 계왕이 실제 343년에 백제의 왕위에 올라 그 해를 태화 1년으로 반포했다는 말과 같다.
삼국사기와는 다르게 사실 비류왕은 343년에 이미 왕위를 찬탈당하고 위리안치 상태로 감금되어 있었을 것이고, 344년에 이르러 죽게 되었을 것이다.
천수를 다 하고 죽었는지, 사약을 받고 죽었는지 또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지는 잘 알 수 없지만 비류왕이 죽게 되자 김부식은 비류왕이 344년에 죽고 그 왕위를 계왕이 이은 것으로 기록하였고, 백제의 연호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아 우리가 지금 백제의 태화(泰和)라는 연호를 알지 못하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계왕 역시 346년 9월에 이르러 비류왕의 아들인 근초고왕에게 다시 그 왕위를 빼앗기고 죽게 됨으로써 백제의 왕위는 다시 장자파인 초고왕계로 옮겨진다. (完)
☆ 한편 계왕의 아들은 관세음응험기에 “백제 무광왕이 지모밀지로 천도했다”고 기록되어 전하는 무광왕(武廣王)으로서, 무광왕은 근초고왕과의 약 20여년에 걸쳐 이루어졌던 왕위찬탈전에서 최종으로 패하자 365년경 지모밀지(필자주 : 한반도 익산 금마 왕궁리)라는 곳으로 가서 다시 반도백제를 세웠다.
그랬다가 무광왕의 고손자인 모도왕 때 이르러 국력이 강해져 근초고왕 후손들의 대륙백제를 흡수통합하고 무광왕의 후손들이 대륙백제의 왕위에 오르게 된다.
차자파인 고이왕계가 백제 왕위계승에 있어 최종 승리자가 되었던 것인데, 결국 의자왕 때에 이르러 멸망하고 만다.
삼국사기는 바로 이 대륙백제의 기록이고, 한반도의 반도백제에 관한 기록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