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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동부여의 진짜 위치와 왕위계승 - 최초공개

윤여동 2011. 1. 29. 09:08

 

윤여동설 - 동부여의 진짜 위치와 왕위계승 - 최초공개

 

 

 

 

 

  후한서 부여국전을 보면,

  “부여국은 현토의 북쪽 1천여리에 있다.

  남쪽은 고구려, 동쪽은 읍루, 서쪽은 선비와 접하였고, 북쪽에는 약수가 있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삼국지 부여전에도 거의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후한서에서 말하는 부여국은 시기적으로 동부여를 말하는 것이다.

 

[후한서와 삼국지가 말해주는 동부여의 위치]

 

                             약수

 

 

      선비              동부여            읍루

 

  

 

                   현토군     고구려

                         

  따라서 후한서와 삼국지에 기록되어 있는 부여의 위치를 찾으면 동부여의 위치를 찾게 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동부여는 과연 지금의 어디에 위치했던 것일까?

  삼국유사 동부여 조를 보면,

  “북부여의 왕인 해부루의 대신 아란불의 꿈에 천제가 내려와서 말하기를 ‘장차 내 자손으로 하여금 이곳에 나라를 세울 것이니 너는 다른 곳으로 피해가도록 하라. 동해변에 가섭원(迦葉原)이라는 곳이 있는데, 땅이 기름져 왕도를 세울 만할 것이다” 하였으므로 아란불이 왕에게 권하여 그곳으로 도읍을 옮기고 국호를 동부여(東扶餘)라 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 북부여가 졸본부여에게 멸망당하고 해부루가 유민들을 이끌고 가섭원으로 옮겨 가서 다시 동부여를 건국한 해는 기원전 86년이었다. 그런데 그때 마하 가섭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으로 생각되는 가섭원을 지명으로 삼았다는 것은 그 당시 이미 부여에 불교가 전파되어 있었던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삼국유사 탑상 제4 가섭불연좌석 조를 보면, “신라 월성 동쪽 용궁 남쪽에 가섭불의 연좌석이 있으니 이곳은 곧 전불(前佛)때의 절터이며, 지금 황룡사터는 일곱절 중의 하나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전불시대를 언급하고 있고,

  또 요동성 육왕탑 조를 읽어보면 한나라 때 이미 중국 북부에 불교가 전파되었음을 암시하고 있기도 하다. 

  또한 삼국유사에는 “지황 3년(A.D.22) 임오에 이르러 고구려왕 무휼(3대 대무신왕)이 동부여를 쳐서 대소왕을 죽이니 이에 나라가 없어졌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그 후에도 중국 사서들에 부여(동부여)가 계속하여 언급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서기 494년에 이르러 동부여가 고구려에 투항함으로써 멸망했다는 삼국사기 기록이 옳을 것이다.

 

  통전 권186 변방2 동이 하 고구려 조를 보면,

  “주몽이 부여에서 버려져 동남쪽(필자주 : 서남쪽 혹은 남쪽의 오기일 것이다)으로 도망쳐 보술수를 건너 흘승골성에 이르러 살면서 국호를 구려라 하고 고로서 성을 삼았다라고 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어 고구려가 동부여의 남쪽 방향에 위치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고, 후한서와 삼국지의 기록을 보면 동부여의 남쪽 1천여리에 현토군이 위치하고 있었음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현토군은 또 어디에 위치했던 것일까?

  후한서 지제23 군국5 현토군 조를 보면,

  “현토군은 (한)무제가 설치했다. 낙양 동북 4,000리에 있다. 6성을 관할하는데, 호수는 1,594호(필자 주 : 인구수에 비해 호수가 너무 적다. 혹시 오기가 아닐까?)이고, 인구는 43,163명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낙양에서 동북쪽으로 4,000여리에 현토군이 위치했음을 알 수 있고, 또 요동군은 낙양 동북 3,600리, 낙랑군은 낙양 동북 5,000리로 기록되어 요동군에서 400리를 더 가면 현토군에 이를 수 있고, 다시 1천리를 더 가면 낙랑군에 이를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후한서에서 말하는 현토군은 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옥저땅에 설치했던 초기의 현토군이 아니라 기원전 75년에 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겼다는 현토군을 말하는 것으로서 이를 확인해 볼 수 있는 기록은 후한서 예전의, “소제 시원 5년(B.C.82)에 이르러 임둔과 진번을 폐지하여 낙랑과 현토에 병합했다. (기원전 75년에) 현토를 다시 구려로 옮겼으며, 단단대령 동쪽의 옥저와 예, 맥은 모두 낙랑에 속하게 하였다. 뒤에 그 지역이 넓고 멀어 다시 대령의 동쪽 일곱 개 현을 나누어 낙랑동부도위를 설치하였다” 라는 기록과 후한서 동옥저전의, “무제가 조선을 멸망시키고 옥저 땅으로 현토군을 만들었다. 뒤에 이맥의 침략을 받아 군을 고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기고는 옥저를 현으로 고쳐 낙랑동부도위에 속하게 하였다” 라는 기록인데, 이를 보면 현토군을 원래의 위치인 옥저에서 고구려의 서쪽 방향으로 옮겼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원래의 현토군 지역은 낙랑동부도위가 되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에 후한서에서 말하는 현토군은 고구려의 서쪽으로 옮긴 현토군을 말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낙양 동북 3,600리에 위치했다는 요동군이 지금의 북경 일원으로 비정되고, 낙양 동북 4,000리에 위치했다는 현토군은 지금의 하북성 장가구 부근으로 비정되므로 현토군의 북쪽 1천여리에 위치했었다는 부여(동부여)는 장가구의 북쪽 1천여리 지점에서 찾아야 한다는 말이 되는데, 장가구에서 북쪽으로 1천여리를 가면 지금 내몽골 정람기, 다륜 부근에 이르게 된다.

  그런데 이 동부여는 건국초기에는 상당히 강국이었으나 주변 강대국들의 계속된 침공을 받게되어 점점 쇠약해져 서기 494년인 고구려 문자왕 3년에 이르러 고구려에 투항함으로써 580년 왕조가 쓸쓸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삼국사기에 “3년(A.D.494) 봄2월 부여왕이 처자를 데리고 와서 나라를 바치고 투항했다” 라는 단 한 줄의 기록만을 남긴 채.............

  그리하여 지금은 역사학자들 조차도 그 위치를 정확히 모르는 상황이 되고 말았으니 그 안타까움을 무어라 표현할꼬?       

   

동부여의 왕위계승

 

시조 해부루왕 (재위 39년 : B.C.86 ~ B.C.48) : 북부여 멸망 후 가섭원에 동부여 건국

 2대 금와왕   (재위 41년 : B.C.47 ~ B.C.7)  : 해부루의 양자. 주몽보다 두 살 아래

 3대 대소왕   (재위 28년 : B.C.6  ~ A.D.22) : 고구려가 침공했을 때 괴유에게 피살

 4대   ?      (추정재위  : A.D.23 ~ 47) : 이하는 평균추정재위 25년을 기준으로 작성

 5대   ?      (추정재위  : A.D.48 ~ 72) : 49년 부여왕이 후한 광무제에게 공물 바침

 6대   ?      (추정재위  : A.D.73 ~ 97) 

 7대   ?      (추정재위  : A.D.98 ~ 122) : 111년 낙랑 약탈. 120년 왕자 위구태 조공

 8대   ?      (추정재위  : A.D.123 ~ 147) : 136년 부여왕 후한 직접 방문

 9대 부태왕   (추정재위  : A.D.148 ~ 172) : 161년 조공. 167년 동부여가 현토군 약탈

10대   ?      (추정재위  : A.D.173 ~ 197)

11대 위구태(?)(추정재위  : A.D.198 ~ 222) : 공손도의 종녀와 혼인

12대 간위거왕 (추정재위  : A.D.223 ~ 247) : 246년 관구검 고구려 침공시 군량제공

13대 마여왕   (추정재위  : A.D.248 ~ 272) : 간위거의 서자

14대 의려왕   (추정재위  : A.D.273 ~ 285) : 6세에 즉위. 285년 모용외의 침공시 자살 

15대 의라왕   (추정재위  : A.D.286 ~ 310) : 옥저로 피난했다가 286년 환국 왕위에 오름

16대   ?      (추정재위  : A.D.311 ~ 335) 

17대   ?      (추정재위  : A.D.336 ~ 360) : 현왕?

18대   ?      (추정재위  : A.D.361 ~ 385)

19대   ?      (추정재위  : A.D.386 ~ 410)

20대   ?      (추정재위  : A.D.411 ~ 435)

21대   ?      (추정재위  : A.D.436 ~ 460)

22대   ?      (추정재위  : A.D.461 ~ 485)

23대   ?      (추정재위  : A.D.486 ~ 494) : 동부여가 고구려에 나라를 바치고 멸망

 

☆ 자치통감 권97 진기19 효종목황제상지상 영화2년(A.D.346)조를 보면, 부여가 연나라의 침공을 받아 그 왕 현과 부락민 5만여명이 포로로 잡혔다는 기록이 있고, 모용황이 현을 진동장군으로 삼고, (모용황의) 딸을 처로 삼게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