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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수 양제가 만든 운하 통제거(通濟渠)와 영제거(永濟渠)의 위치

윤여동 2011. 2. 21. 03:28

윤여동설 - 수 양제가 만든 운하 통제거(通濟渠)와 영제거(永濟渠)의 위치

 

 

 

  지금 중국에서는 수 양제 때 만들었다는 운하 통제거와 영제거가 지금의 북경에서 항주까지 장장 1,764km에 이르렀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그러한 중국의 주장에 대하여 대체적으로 회의적인 반응을 보인다. 

  왜냐하면 수서를 보면 통제거를 만드는데 (연인원) 백만명을 동원했고, 또 영제거를 만드는데도 (연인원) 백만명을 동원했다고 하더라도 중장비도 없던 옛날에 순전히 인력만으로 605년부터 610년까지 약6년 정도의 짧은 기간에 그 긴 운하를 도저히 완공할 수 없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 필자는 운하를 만든 기간이 통제거는 605년부터 607년까지였고, 영제거는 608년부터 610년까지였을 것으로 보는데 그 이유는 611년부터는 113만명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침공하기 때문에 운하를 팔 여유가 없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 양제는 영제거가 완공된 후 고구려를 침공했다고 보는 것이다.


  수서 권3 제기3 양제상을 보면,

  대업원년A.D.605)에 조서로서 황하 남쪽 여러 군의 남녀 백여만명을 동원하여 통제거(通濟渠)를 개통하였다. 서원으로부터 곡물이 낙수를 타고 내려와 황하에 도달하고, 판저에서 황하를 통하여 회수에 이른다.(大業元年詔發河南諸郡男女百餘萬開通濟渠 自西苑引穀洛水達于河 自板渚引河通于淮)라고 기록되어 있어 황하 서쪽으로부터 동남쪽으로 흘러 서안 동쪽에 위치한 동관(潼關)부근에서 황하에 합류하는 낙수로부터 황하를 경유하여 동쪽으로 회수까지 통제거가 설치되었음을 알 수 있고,   

  또 대업4년(A.D.608) 봄 정월에 조서로서 황하 북쪽 여러 군의 남녀 백여만명을 동원하여 영제거(永濟渠)를 개통하였다. 심수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오면 황하에 도달하고, 북쪽으로는 탁군과 통한다(大業四年春正月乙巳 詔發河北諸郡男女百餘萬 開永濟渠 引沁水南達于河 北通涿郡)라고 기록되어 있어 통제거를 3년 만에 완공한 후 이어 영제거를 만든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영제거에 관한 기록에 심수가 언급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지금의 산서성 심하(沁河)를 이용하여 영제거를 만들었을 것이다.

  심하는 지금 산서성 남부 태악산의 동쪽을 흐르는 강으로서 상류인 적석하로부터 곽도진, 교구진, 심원현, 안택현, 심양시(沁陽市)를 지나 정주(鄭州) 북쪽의 황하로 흘러드는 강이다. 그런데 영제거가 북쪽으로 탁군과 통하고 남쪽으로 황하에 도달한다고 했으므로 영제거는 심하 하류와 황하를 연결하고, 다시 동북쪽으로 운하를 파서 하북성 탁주까지 연결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심수를 이용하여 만든 영제거가 북으로 탁군(현 탁주)과 통하고 남으로 황하와 통한다는 기록이 남겨질 수 있었다고 보여진다.


☆ 지금의 하북성 역현 부근이 옛 연경이요, 북평이었다. 이를 이해하지 못하면 고대 역사를 올바르게 해석할 수 없다. 

  후일 연경(북평)은 요나라의 남경석진부가 되고, 금나라의 중도대흥부가 되며, 원나라의 대도가 되고, 명나라의 북평(북경)이 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황하 중류인 내몽골 파언뇨이, 오원 부근에 통제거와 영제거가 위치했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이는 틀린 것이다. 

  왜냐하면 통제거와 영제거를 만들었다는 수서의 기록에 나타나는 낙수가 어디에 있으며 어디에서 어디로 흐르고, 심수가 어디에 있으며 어디에서 어디로 흐르는지를 전혀 감안하지 않은 주장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