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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근초고왕의 아들 근구수왕

윤여동 2011. 3. 11. 10:12

 

윤여동설 - 근초고왕의 아들 근구수왕

 

 

 

  근구수왕은 근초고왕의 아들이다.(몇째 아들인지는 알 수 없다)

  375년 11월에 13대 근초고왕(이름은 부여구였다)이 죽자,

  그 뒤를 이어 백제 14대 왕위에 올랐다가 재위 10년인 384년 4월에 죽었는데, 그의 성명은 부여수(扶餘須)였다. 

  왕비는 아이부인(阿爾夫人)으로서 15대 침류왕을 낳았다. 

  어느 사람은 삼국사기 근구수왕 조의 “一云諱須(일운휘수)”라는 기록을 보고는 근구수왕의 이름이 “휘수(諱須)”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으나 이는 기록을 잘못 이해한 것으로서 이 의미는 “일설에 이르기를 근구수왕의 이름은 수(須)라고 한다” 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근구수왕의 성씨는 백제왕실의 성씨인 “부여(扶餘)”씨였을 것이고, 이름은 “수(須)”로서 "부여수(扶餘須)"가 근구수왕의 성명인 것이다.

 

  백제 왕실은 8대 고이왕이 7대 사반왕으로부터 왕위를 찬탈함으로써 장자파와 차자파로 나뉘어 왕위찬탈전을 펼쳤는데, 근초고왕이나 근구수왕은 장자파에 속하는 왕들이었고, 고이왕, 책계왕,분서왕, 계왕은 차자파에 속하는 왕들이었다. 

  그리하여 13대 근초고왕은 장자파인 5대 초고왕의 시호에 근자를 붙여 근초고왕이라 함으로써 장자파임을 나타냈고, 또 14대 근구수왕 역시 6대 구수왕의 시호에 근자를 붙여 근구수왕이라 함으로써 장자파임을 명확히 하였다.    

  지금 역사드라마 “근초고왕”으로 인하여 근구수왕이 과연 어느 여인의 아들일까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많은 듯하다.

  드라마에서는 근초고왕이 12촌 여동생인 계왕의 딸과 혼인한 것으로 그려지고 있으나,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설정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근초고왕은 장자파이고, 계왕은 차자파이기 때문에 이들은 서로 원수지간이었고, 신라왕실의 경우에는 동성동본인 왕족끼리 혼인한 경우가 일반화되어 있었고, 고구려 왕실에서도 형수인 9대 고국천왕의 왕비가 시동생인 10대 산상왕과 다시 혼인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백제 왕들은 왕실의 성씨인 부여씨끼리 혼인했다는 기록도 없고, 형의 왕비를 동생이 다시 왕비로 맞아들였다는 기록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필자가 보기에 백제왕들은 초기에는 주로 진씨, 중기에는 진씨와 해씨, 말기에는 다시 진씨 가문의 여인을 왕비로 맞아들였던 것으로 보이고 우리 삼국 중에 개국에서부터 멸망할 때까지 하나의 성씨로 왕위를 이은 나라는 백제뿐이고, 또 백제에서는 동성동본의 혼인을 금했던 것이 아닌가 싶은데 이를 보면 제도로만 본다면 삼국 중 백제가 가장 모범적인 나라였다고 하겠다.

 

☆ 백제의 대성8족은 진씨, 해씨, 국씨, 사씨, 연씨, 협씨, 목씨, 백씨로 나타나는데 이들은 곧  백제건국시 적극적으로 협조했던 호족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백제 왕실은 이들 호족가문의 딸들을 왕비 또는 후궁으로 맞아들였을 가능성이 많다.

 

   그리고 근구수왕의 어머니가 누구인가 하는 것은 삼국사기 근구수왕 2년(A.D.376) 조에 “왕의 외삼촌 진고도를 내신좌평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으니 근구수왕의 어머니는 진(眞)씨였음에 틀림없다.

 

  근구수왕은 드라마 속 인물인 부여화의 아들일 수 없고, 위홍란(처음에는 위홍란이라 하더니 요새는 진홍란으로 슬며시 이름이 바뀌었다)의 아들일 수도 없으며, 제3의 인물인 진씨여인의 소생이어야 한다. (역사적 사실은 아니지만 근구수왕이 근초고왕과 부여화 사이에 출생한 숨겨진 아들 쇠꼬비라 하면서 드라마가 진행되는 듯 하다)

 

    근구수왕은 그 아버지 근초고왕이 요서까지 넓혀 놓은 넓은 강역을 물려 받았다.

  그런데 그가 왕위에 오르고 나서 고구려가 백제의 북쪽 변경을 침공하자 태자시절 고구려를 침공하여 고국원왕을 죽이며 승리하고 나아가 요서까지 진출했던 기억을 떠 올리며 군사 3만으로 다시 한번 고구려 평양성을 침공했으나 이때에는 별 소득이 없었던 듯하다. 

  그리고 근구수왕은 태자시절에 고구려를 침공하여 수곡성 서북쪽까지 진격했던 적이 있었는데, 더 진군하려 하자 장수 막고해가 말하기를 “일찍이 도가의 말에 만족한 줄을 알면 욕을 보지 않으며, 그칠 줄을 알면 위태롭지 않다는 말이 있습니다. 지금 얻은 것이 많으니 어찌 더 많은 것을 바라겠습니까?” 하면서 더 이상의 진군을 만류하자 그곳에 돌을 쌓아 표적을 만들고 그 위에 올라가 좌우를 둘러보며 말하기를 “이 다음날에 누가 다시 이곳까지 올 수 있겠느냐” 하였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이때 백제가 고구려로부터 꽤가 많은 땅을 빼앗았던 듯하고 그곳에 말발자국 같이 생긴 바위틈이 있는데,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편찬한 고려시대까지도 사람들이 “태자의 말발자국”이라고 부른다고 기록하고 있다.

  백제 근구수왕의 전설이 아로 새겨진 태자의 말발자국은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