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카테고리 없음

윤여동설 - 고려 귀주대첩(龜州大捷)의 현장은 지금의 북경 동북쪽 고북구(古北口) 부근 - 최초공개

윤여동 2011. 3. 25. 17:52

 윤여동설 - 고려 귀주대첩(龜州大捷)의 현장은 지금의 북경 동북쪽 고북구(古北口) 부근 - 최초공개

 

[고려는 거란과의 전쟁이후 압록강 하류로부터 동쪽으로 화주 도련포까지 천리장성을 쌓아 거란과 여진의 침공에 대비하였다] 

 

 

  서기 1018년 12월 10일(무술일) 거란의 부마 소손녕이 10만 군사를 거느리고 고려를 침공하자 고려 현종은 강감찬을 상원수로, 강민첨을 부원수로 삼아 군사 20만8천3백명을 거느리고 영주(寧州: 안주)에 주둔시켜 거란의 침공을 방어하게 한다. 

  그리하여 강감찬은 다시 기병 1만2천명을 뽑아 흥화진(興化鎭)에 매복시키고, 또 굵은 밧줄로 쇠가죽을 꿰어 성 동쪽의 큰 냇물을 막아 물을 가두어 두고 적을 기다렸다가 적이 이르자 물을 터놓아 거란군이 혼란스러워진 틈을 타서 복병을 내보내 쳐서 적을 크게 패퇴시켰다.

 

☆ 많은 사람들은 이 흥화진전투를 귀주대첩과 혼동하여 강감찬이 귀주대첩 때 수공을 펼쳤다고 하기도 하는데, 이는 잘못 전해진 것으로서 기록을 보면 흥화진전투는 거란군의 침공초기 전투였고, 거란군이 개경에서 1백리 떨어진 신은현까지 왔다가 퇴각할 때 이루어진 귀주대첩 때는 수공을 펼쳤다는 기록이 없다. 

 

  그런데도 소손녕이 개경을 향하여 계속 진군하자 부원수 강민첨이 자주(慈州) 내구산(來口山)까지 뒤쫓아가서 적을 크게 패퇴시켰고, 또 시랑 조원이 마탄(馬灘)에서 적을 쳐 1만여명을 죽이게 된다.

  웬만한 경우라면 이때 소손녕은 철군을 심각하게 고려했어야 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고 개경을 향하여 계속 진군해오자 1019년 정월 초2일(경신일)에 이르러 강감찬은 병마판관 김종현에게 군사 1만을 주고 개경으로 빨리가서 방어하게 조치하였고, 동북면 병마사 역시 군사 3천3백명을 개경으로 보내 도읍 방어에 만전을 기하게 된다.

  1019년 1월3일(신유일)에 소손녕이 개경에서 1백리 떨어진 신은현에 이르게 되자 왕이 성밖의 민호를 모두 성안으로 들어오게 하고 들판의 작물과 가옥을 모두 철거하게 하였는데, 이는 거란군이 식량을 구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소위 말하는 청야작전인데, 이때는 한겨울이라서 들판에 작물은 거의 없었을 것이므로 민가에 저장되어 있는 곡식을 모두 옮겨버리면 거란군이 식량을 구할 곳은 없었을 것이다. 

 

☆ 거란군이 고려의 국경에서부터 신은현(신은현이 개경에서 100리지점이라 했는데 개경이 하북성 관성현으로 비정되므로 신은현은 지금의 하북성 유하와 난하의 합류지점 부근을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까지 오는데 23일이 걸렸다는 말이 되는데, 거란군이 하루에 50리 정도씩 행군했다고 보았을 경우 개경은 국경으로부터 약1,000리 지점에 위치해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황해도 신천군 신계현 연혁 조를 보면, “본래 고려의 신은현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어 소손녕이 고려를 침공할 때 개경에서 100리 떨어진 곳에 주둔했던 신은현이 곧 신계현임을 알 수 있는데, 신계현이라는 이름은 신은현과 협계현을 합하면서 신은현에서 신을 따고, 협계현에서 계를 따서 신계현이라 했다고 한다.

  그리고 고적조를 보면, “협계폐현(俠溪廢縣)이 고을 남쪽 30리에 있는데, 원래 고구려의 수곡성현(水谷城縣)이며 매차홀이라고도 한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지금까지 그 정확한 위치를 알지 못하는 수곡성의 위치를 비정해 볼 수 있게 한다.     

 

  그리하여 식량을 구할 수 없었던 거란군은 얼마 견디지 못하고 철군을 시작하게 되고, 1월 23일(신사일)에 연주, 위주를 지나고, 1주일 후인 2월 초하루(기축일)에 귀주(龜州)를 지나게 되었는데 강감찬이 귀주동쪽 들판에서 맞아 크게 싸웠으나 승패가 쉽게 결정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김종현이 개경으로부터 다시 1만 군사들을 이끌고 와서 합류하게 되었고, 마침 갑자기 비가 내리고 남풍이 세차게 불어 비바람이 치게 되자 그 기회를 틈타 고려군이 공격을 하니 거란군이 패하여 북쪽으로 도망치게 된다.

  그리하여 고려군은 석천을 건너 반령까지 도망치는 거란군을 뒤쫓아 가면서 섬멸하게 되는데, 죽어 넘어진 거란군의 시체가 들판을 덮었고, 사로잡은 군사와 말, 낙타, 갑옷, 투구, 병기 등은 이루 다 헤아릴 수도 없을 정도였으며, 살아 돌아간 자가 겨우 수천명에 불과하였다고 고려사에 전해진다.

 

☆ 소손녕은 1018년 12월 10일에 고려를 침공하여 다음해 2월 1일까지 약 50일간에 개경 가까이까지 왔다가 군사들을 거의 다 죽이고 돌아가야 했는데, 패전 소식을 들은 요나라 왕이 얼마나 화가 났던지 부마인 소손녕에게 “네가 적을 얕보고 깊이 들어가서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무슨 면목으로 나를 볼 것이냐. 내가 네 낯가죽을 벗기고 죽여버릴 것이다” 라고 했다고 전한다.

 

  강감찬이 이끄는 고려군이 대승을 한 것이고, 거란군은 10만 군사가 거의 다 죽고 처절하게 패배했던 것인데, 역사에서는 이때의 전투를 귀주대첩(龜州大捷)이라 부른다.

  이 전쟁에서의 승리로 강감찬은 검교태위 문하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 천수현개국남 식읍3백호로 봉해지고, 또 추충협모안국공신으로 봉해졌다가 현종 22년인 1031년 8월에 죽어 고려 현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강감찬장군이 거란군을 몰살시키다시피 했던 귀주(龜州)를 정확히 찾지 못하고 있는데, 앞선 시기인 성종 12년(A.D.993)에 서희와 거란 소손녕과의 담판으로 고려가 차지하게 되었던 강동6주라고 하는 흥주(興州), 철주(鐵州), 통주(通州), 용주(龍州), 귀주(龜州), 곽주(郭州) 중에 귀주(龜州)가 들어 있고,

 

☆ 신증동국여지승람 평안도 귀성도호부(龜城都護府) 건치연혁을 보면,

  “본래 고(구)려의 만년군이었는데, 성종 13년(A.D.994)에 평장사 서희에게 명하여 여진을 공격하여 쫓아내고 성을 쌓아 귀주(龜州)라고 불렀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 덕종2년인 1033년에 쌓은 고려 천리장성(千里長城) 축성에 관한 기록을 보면, “서해 바닷가의 옛 국내성 경계로서 압록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에서부터 시작하여 동쪽으로 위원(威遠), 흥화(興化), 정주(靜州), 영해(寧海), 영덕(寧德), 영삭(寧朔), 운주(雲州), 안수(安水), 청새(淸塞), 평로(平虜), 영원(盈遠), 정융(定戎), 맹주(孟州), 삭주(朔州) 등 13성을 거쳐 요덕(耀德), 정변(靜邊), 화주(和州) 등 3성에 대어 동쪽으로 바다에 이르니 길이가 1천여리에 뻗치고 돌로 성을 쌓았으며 높이와 두께가 각각 25척이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기록 중에서 천리장성이 시작되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했고, 귀주와 가까이 위치하고 있었으며, 강감찬 장군이 거란군을 수공으로 공격했다고 하는 흥화(興化 :흥화진)가 나타난다.       

  이를 보면 귀주(龜州)는 압록강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지명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압록강의 위치를 찾으면 귀주도 찾을 수 있을 것인데, 문제는 지금 한반도 북쪽 압록강이 옛 고려시대의 압록강이 아니라는데 있다.

 

    [강물이 오리의 머리색과 비슷했다는 고대의 압록강물은 바로 이런 색이었을 것이다]

 

  고려 때의 압록강은 고구려 때의 국내성(필자주 : 북경 연경현 영녕진) 부근을 지나는 강(필자주 : 지금의 백하)이었고, 고려의 도읍 개경은 한반도의 개성이 아니라 지금의 중국 하북성 관성(寬城, 관성만족자치현)이었으며, 거란은 지금의 내몽골 상도(商都) 부근으로부터 서남쪽으로 오란찰포를 지나 산서성 대동에 이르는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때 소손녕은 옛 살수(薩水), 옛 청천강(淸川江)이었던 지금의 조하(潮河)를 따라 내려와 고려를 침공했던 것이지 지금 한반도 북쪽의 압록강을 건너고 청천강을 건너 고려를 침공했던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소손녕은 한반도에 발 디딘 적도 없다.     

  고려의 중심 강역은 한반도가 아니었다.

  지금의 발해 북쪽 중국 하북성 난하를 중심으로 한 그 부근이 고려의 중심지였다.

  우리 선조들이 살았던 대륙의 우리 옛 땅이 우리를 애타게 부르고 있는데, 우리는 지금 무얼하고 있는가.....................

  한반도 만을 우리의 옛 땅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