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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한반도 경주 첨성대는 천문대가 아니다 - 최초주장

윤여동 2011. 4. 29. 01:03

 

윤여동설 - 한반도 경주 첨성대는 천문대가 아니다 - 최초주장

 

 

 

  경주 첨성대가 천문대였다는 결정적 증거를 발견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단다.  

  그런데 그 결정적인 증거라는 것이 첨성대가 완성된 후 신라의 천문관측 기록 수가 이전보다 폭증했고 질적으로도 정밀해졌으며, 그 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증거가 유성이 떨어진 위치란다.

 

☆ 옛날에는 육안으로 천문을 관측했을 것인데, 경주 첨성대의 높이가 수백미터 또는 수천미터라면 평지에서 관측하는 것보다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겠으나 경주 첨성대의 높이는 겨우 9m남짓이란다. 따라서 땅 바닥에서 별을 바라보나 그 꼭대기에 올라가서 별을 바라보나 그게 그것일 것이다. 첨성대를 쌓았다고 해서 천문관측이 폭증하고, 정밀해질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

 

  즉 첨성대가 만들어진 이후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유성이 떨어진 기록은 모두 5건으로 반월성에 둘, 황룡사와 반월성 사이에 하나, 삼랑사 북쪽에 하나, 그리고 황룡사 남쪽에 떨어졌다고 하는데, 이 자리들이 모두 경주에 있는 첨성대를 중심으로 반경 1km의 원형 영역 안에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유성 모두를 관측하려면 유성들이 떨어진 위치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이어야 하기 때문에 경주 첨성대에서 유성이 떨어지는 것을 일관들이 직접 눈으로 목격하고 기록했을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경주의 첨성대가 천문대였다는 결정적인 증거라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이러한 주장은 말이 되지 않는 주장이다.

  현재 삼국시대나 신라시대에 이루어진 천문관측 직접자료가 전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고, 선덕여왕 때 세웠다는 첨성대가 실제로 어디에, 어떤 형태로 건립되었는지 알 수도 없으며,

 

☆ 삼국유사 기이 제1 선덕왕(선덕여왕) 지기삼사 조 말미에, “別記云 是王代 鍊石築瞻星臺(별기에 이르기를 이 왕대에 돌을 다듬어 첨성대를 쌓았다)”라고만 기록되어 있어 이때 쌓은 첨성대의 위치나 형태를 전혀 알 수 없다.

 

  또한 삼국사기의 천문관측 기록은 참고는 할 수 있겠으나 삼국사기에 나타나는 기록 만을 가지고 신라가 고구려나 백제보다 천문관측을 많이 했다고 보기도 어렵다.

  왜냐하면 김부식을 비롯한 고려의 학자들이 삼국사기를 편찬할 때 삼국의 천문관측 기록 중 어느 만큼을 누락 시켰고, 어느 만큼을 삼국사기에 기록했는지 알 수도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유성이 떨어진 위치가 경주 첨성대를 중심으로 그 가까운 주변이기 때문에 경주의 첨성대가 천문대였고, 일관들이 그 모두를 직접 눈으로 보고 기록했을 것이라는 주장도 어이가 없는 주장이다.

  왜냐하면 아무리 일관들이라 하더라도 밤새도록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하늘만 쳐다보고 있을 수는 없었을 것이고,

  유성이라는 것이 순식간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를 하나도 빼지 않고 모두를 일관들이 직접 관측하기가 매우 어려웠을 것이며,

  또한 유성이 금성 부근에 떨어졌다고 하더라도 그 떨어진 장소를 캄캄한 밤중에 정확히 어디에 떨어졌는지 알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성이 떨어진 장소는 그 다음날 아침에 확인한 후에 기록할 수도 있고, 또 일관들이 미쳐 유성이 떨어지는 것을 보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 다음날 제보에 의해 추후 기록할 수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유성이 떨어진 장소를 기준으로 삼아 경주의 첨성대가 천문대이고, 일관들이 첨성대에서 해당 유성들을 관측했을 것이라는 주장 자체가 말이 안된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신라의 건국지 자체가 한반도 경주가 아니라 지금의 중국 요녕성 금주(錦州) 일원이라는 것이다.

  “신라가 한(漢)나라 때의 낙랑 땅에 살았다” 는 사서들의 기록은 바로 신라가 한반도가 아닌 대륙에서 건국되었다는 증거인 것이다.[낙랑군은 한반도의 평양 부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부근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신라 선덕여왕 때 첨성대를 세웠다면 지금의 요녕성 금주(錦州) 부근에 세웠을 것인데, 삼국유사 선덕여왕 대의 기록 속 첨성대를 한반도 경주에서 찾으려 하고 있고, 더구나 경주의 첨성대를 기준으로 삼국사기 기록을 해석하려고 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인 것이다.

  한마디로 경주의 첨성대는 천문대가 아니다.

  매일 올라가 하늘을 관측해야 하는 천문대의 출입구를 그렇게 불편하게 만들었을 리가 없고, 꼭대기 그 좁은 곳에 올라가 서서 하늘을 바라봤다고?

  떨어지면 사망 아니면 최소한 중상인데?

  지금 우리가 첨성대라고 부르고 있는 경주의 첨성대는 왕 또는 왕비가 죽었을 때 시신을 육탈시키는 장소였다.

  내세에도 왕 또는 왕비로 또 태어나기를 염원하며..........................   

 

☆ 창녕에도 석빙고 맞은 편에 1960년대까지 경주 첨성대와 비슷한 석조 건축물이 존재했었다고 한다. 

 

[필자가 보기에 결정적 증거가 없는데도 경주 첨성대가 천문대라는 결정적 증거가 있다고 주장하는 글이니 한번 읽어 보시고 필자의 지적이 맞는지 확인해 보십시오]

 

1400년전 '첨성대 미션', 그 비밀이 풀렸다

아시아경제 | 김수진 | 입력 2011.04.27 16:00 |

[아시아경제 김수진 기자]

  "신라 첨성대? 별 보는 곳 아니었어?" 대한민국 국민의 '상식'이다.

  그런데 잠깐, 첨성대가 천문대라는 과학적 증거가 있었던가?

  사실 첨성대는 끊임없는 논란에 시달려왔다.

  천문대가 아니라 별에 제사를 지내는 제단이었다는 주장도 있었고, 상징적 건축물일 뿐이라는 시각도 있었다. 그러나 앞으로 첨성대를 둘러싼 의문은 사라질 것으로 보인다. 신라 첨성대가 천문대였다는 결정적 증거가 발견됐다.

  지난 7일 한국천문학회 봄 학술대회에서는 이색적인 발표가 진행됐다.

  신라 첨성대가 천문대였다는 증거가 제시된 것이다. 이를 발견한 사람이 한국천문연구원의 김봉규 박사다.

  김 박사는 "지금껏 천문학계에서도 첨성대가 천문대라는 것에 대해 명확한 답을 주지 못했다"며 말문을 뗐다.

  "첨성대라는 이름이 볼 첨(瞻)자에 별 성(星)자니까 당연히 별을 보는 천문대가 아니었느냐고 했지요. 또 조선시대 세종실록지리지와 동국여지승람에 첨성대에서 별을 봤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는 것을 근거로 댔습니다. 천문학자들의 얘기가 이 두 가지 이유에서 맴돌고 있었죠."

  그러나 반론이 만만치 않았다.

  세종실록지리지와 동국여지승람은 조선시대에 쓰인 역사서다.

  반면 삼국시대 역사를 다룬 정사(正史)인 삼국사기에는 첨성대에 대한 얘기가 전혀 없다. 또한 삼국유사에는 단순히 '선덕여왕때 돌을 모아 첨성대를 만들었다'는 언급이 전부다.

  첨성대가 만들어진 것이 7세기로 추정되는데, 15세기에 쓰인 역사서인 세종실록지리지와 동국여지승람을 바탕으로 첨성대를 천문대로 정의할 수는 없다는 시각이다. 이 때문에 첨성대가 인도 불교의 영향을 받은 종교적 건축물이나 별을 상징하는 건축물, 혹은 제단이 아니냐는 추측이 잇따랐다.

  "독도가 우리 땅이라고 얘기하려면 거기 걸맞는 객관적 증거가 있어야 할 겁니다. 첨성대도 마찬가집니다. 천문대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과학이 뒷받침돼야 합니다." 김 박사는 먼저 첨성대가 완성된 후 신라의 천문관측 기록 수가 이전보다 10배 이상 증가하고 질적으로도 정밀해졌다는 점을 꼽았다.

  천문대가 완성되기 전인 541년에서 641년 사이 신라의 천문관측 기록은 3건에 불과하다. 그러다가 첨성대가 만들어진 641년부터 740년간 38건으로 급증했다. 이후로 신라의 천문관측 기록은 고구려와 백제를 훌쩍 뛰어넘는다.    삼국시대를 통틀어 고구려와 백제의 천문관측 기록은 각각 21건과 24건인데 비해 신라는 100건이다. 이중 76건이 첨성대 건축 이후에 기록됐다.

  가장 핵심적인 증거는 유성이 떨어진 위치들이다.

  첨성대가 만들어진 이후 신라가 남긴 유성관측 기록은 모두 5건으로 반월성에 둘, 황룡사와 반월성 사이에 하나, 삼랑사 북쪽에 하나, 그리고 황룡사 남쪽에 하나다. 이 자리들은 모두 첨성대를 중심으로 반경 1km의 원형 영역 안에 있다.

  "이 유성 모두를 관측하려면 유성들이 떨어진 위치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이어야 합니다. 첨성대가 바로 그 영역 안에 있어요. 별을 관측했단 결정적인 증거죠." 김 박사는 "서울에서 빌딩을 쭉 둘러보려면 둘러싸고 있는 빌딩들의 안쪽에 관찰자가 위치해야 하지 않느냐"며 "유성이 떨어진 위치를 바탕으로 첨성대에서 해당 유성들을 관측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별에 제사를 드리는 제단이라는 주장도 일축했다.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신라는 별에 대한 제사를 본피유촌(本彼遊村)에서, 해와 달에 대한 제사를 문열림(文熱林)에서, 그리고 오행성에 대한 제사를 영묘사(靈廟寺) 남쪽에서 지냈습니다. 첨성대가 아닌 다른 곳에서 천문과 관련된 제사를 지냈다는 겁니다."

  이번 연구 결과는 첨성대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라는 것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우리 과학의 우수성을 방증하는 셈이다. 영국의 스톤헨지도 천문대 기능을 했다는 주장이 있지만 김 박사가 내놓은 것과 같은 과학적 증거는 없다. 김 박사는 이 연구 결과를 영국 더렘에서 개최한 국제 고천문 학술발표대회에서도 공개했다. "전세계 고천문학 연구자들이 한 데 모인 자리였는데, 반응이 대단했습니다. 끝나고 난 뒤에도 저한테 찾아와서 계속 질문하더라구요. 기분이 엄청 좋았죠. "김 박사는 관련 논문을 준비해 학술지에도 발표할 예정이다. "우리나라에 최고(最古)의 천문대가 있다는 걸 세계에서 인정하게 되는 겁니다."

  김 박사가 첨성대에 관심을 기울여 온 시간 역시 만만치 않다.

  "제가 대학생이었던 1981년 첨성대 토론회에 갔어요. 그 때부터 관심이 많았거든요. 그런데 뾰족한 증거가 제시되지 않더라고요. 그 때부터 직접 삼국사기 등 역사서를 계속 읽으며 연구했습니다." 김 박사는 "몇년 전 열린 토론회에서도 증거가 뒷받침되지 않아 언론에서도 비판적인 시각을 보이더라"며 "지난해 말 또 다시 첨성대에 대한 역사적 자료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김 박사는 첨성대 연구를 한 우화에 빗댔다.

  "어렸을 때 봤던 영어 책에서 이런 이야기가 기억납니다. 한 젊은 사람이 유명한 박물학자를 스승으로 모셨는데, 그 스승이 물고기 표본을 가리키며 하루종일 보라고 했대요. 처음에는 길이나 생김만 봤는데, 하루 종일 물고기만 들여다보면서 시간이 갈수록 더 많은 걸 알아보게 되고 더 새로운 걸 알게 되더라는 겁니다." 김 박사는 "스쳐 지나가면 다 똑같지만, 연구에 대해 생각하면 할수록 비밀이 풀리는 것 같다"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