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카테고리 없음

윤여동설 - 삼국 불교 최초의 순교자가 과연 신라의 이차돈일까?

윤여동 2011. 5. 3. 20:03

 

윤여동설 - 삼국 불교 최초의 순교자가 과연 신라의 이차돈일까?

  우리는 보통 신라의 이차돈(異次頓 필자주 : 이차돈을 박혁거세의 후예라고도 하고,  석탈해왕의 후예라고도 하니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이 삼국불교 최초의 순교자라고 인식한다.

  왜냐하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이차돈(삼국유사에는 염촉 혹은 이차, 이처라고 했다)이 순교한 기록이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법흥왕 15년(A.D.528) 조를 보면,

 『불법(佛法)이 퍼지기 시작하였다.

  비처왕(소지마립간, 재위479-500), 필자주 : 아도화상이 신라에 불교를 처음으로 전파하려고 시도했던 때는 소지왕 때가 아니라 그 보다 훨씬 앞선 시기인 내물왕(재위356-402) 때로 보이는데, 이때는 포교에 실패하고 돌아갔다가, 그 후 다시 포교하기 시작한 때는 실성왕(재위402-417) 초기로 보인다. 왜냐하면 아도화상이 고구려로 온 때가 소수림왕 4년인 서기 374년인데, 소지왕 때 신라에 왔다면 아도의 나이가 적어도 150세쯤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지왕 때라는 기록은 오기임이 분명하다) 때에 이르러 아도화상(阿道和尙 또는 我道라고도 한다)이라는 이가 있어 시자 세 사람을 데리고 역시 모례의 집에 왔다.

  그 모습이 묵호자와 비슷하였는데 수년동안 살다가 아무 병도 없이 죽었다(늙어 죽었다).[필자주 : 아도화상이 처음 신라에 왔을 때는 내물왕 때로서 묵호자라는 가명을 사용하며 포교하려 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고구려로 돌아갔다가 말년인 실성왕 재위 초기에 제자들을 데리고 다시 신라에 와서 포교하다가 죽은 것으로 생각되는데, 아도화상과 실성은 실성이 고구려에 볼모로 가 있을 때 이미 잘 알고 지낸 사이였을 것이고, 실성이사금은 아도로부터 불교에 대해 많은 것을 전해 들어 알고 있었으므로 불교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시자 세 사람이 머물러 있으면서 불경과 계율을 강독하니 가끔 불교를 신봉하는 자가 생겨나기 시작했었다. 

  이때에 이르러 왕(법흥왕)도 역시 불교를 흥하게 하려고 하였으나 여러 신하들이 믿지 아니하고 이런 저런 말들이 많으므로 왕도 난처하였다.

  이때에 가까운 신하 이차돈[異次頓 혹은 처도라고도 한다]이 왕에게 아뢰기를 "청컨대 제 목을 베어 여러 사람들의 물의를 잠재우소서"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본래가 도를 흥하게 하려는 것인데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기쁜 일이 아니다" 하였다.

  그가 대답하기를 "제가 비록 죽더라도 만약에 도를 펴게 된다면 유감이 없습니다"하였다.

  왕이 이에 여러 신하들을 불러 물어 보았다.

  모두가 말하기를 "요즘 중들을 보니 깎은 머리에 이상한 옷을 입고 말하는 것이 괴상한 속임수이니 정상적인 도가 아닙니다.  이제 만약 그대로 놓아둔다면 후회가 있을까 염려되오니 우리들은 비록 중죄를 당할지라도 감히 명령을 받들 수 없습니다" 하였다.

  이차돈이 홀로 말하기를 "지금 여러 신하들의 말은 옳지 않습니다. 무릇 비상한 사람이 있은 후에야 비상한 일이 있는 것입니다.

  지금 들어보면 불교는 그 연원이 심오하니 이를 믿지 않을 수 없을까 합니다." 하니 왕이 말하기를, "여러 사람들의 강경한 주장을 깨뜨릴 수 없구나. 너 혼자만이 다른 말을 하니 두 편을 다 따를 수는 없다."하고 마침내 형리에게 명을 내려 장차 목을 베려 하였다.

  이차돈이 죽을 때에 말하기를 "나는 불법을 위하여 형벌을 받는다. 만일 부처가 신통력이 있다면 내가 죽을 때 반드시 이상한 일이 있을 것이다."하였다.

  목을 베자 벤 목에서 피가 솟아 나오는데 빛깔이 젖처럼 희었다.

  여러 사람이 괴이하게 여겨 다시는 불교 행사에 관한 비방을 하지 못하였다.[이것은 김대문의 계림잡전의 기록에 의거하여 썼다. 한 나마 김용행이 지은 아도화상비의 기록과는 많이 다르다.]

  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신라의 불교는 이차돈의 순교이후에야 공인되고, 민간에도 널리 퍼지게 되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런데 위 삼국사기 기록과 삼국유사 흥법편 “원종흥법과 염촉멸신” 조를 잘 읽어보면, 이때 법흥왕이 불교를 진흥시키기 위하여 이차돈의 건의를 받아들여 527년에 흥륜사를 천경림에 지으려 터를 닦았는데 그것이 문제가 되어 법흥왕의 입장이 난처해지자 이차돈이 스스로 그 책임을 뒤집어쓰고 순교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는 기록 중에 "염촉이 거짓 왕명으로 신하들에게 절을 세우라는 뜻을 전하니 여러 신하들이 와서 간하자 왕은 이것을 염촉에게 책임 지워 왕명을 거짓 전했다 하여 형에 처했다"는 기록과 "대성법왕께서 불교를 일으키려 하시므로 내가 신명을 돌아보지 않고 세상 인연을 버리니 하늘에서는 상서로움을 두루 백성들에게 보여 주십시오" 하고 죽었다는 기록이 있어 그렇게 추측할 수 있다.

  어찌 되었든 이차돈의 순교로 법흥왕은 위기를 극복하고 불교를 공인할 수 있었고, 법흥왕의 조카인 진흥왕이 왕위에 올라 불교를 더욱 진흥 시켜 신라에 불교를 꽃피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차돈의 순교 이전에도 신라 땅에 들어온 고구려 스님들이 죽임을 당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으니 이차돈이 삼국불교 최초의 순교자라고 하기는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해동고승전 권1 아도전을 보면, 아도(아도화상)가 일선군에 들어와 모례의 집에 들렀을 때, 모례(신라 최초의 불교신자일 것이다)가 아도에게 말하기를, “지난날 고구려 승려 정방(正方)이 신라에 왔을 때 군신들이 괴상하게 여겨 그를 잡아 죽였으며, 그 뒤에 들어온 멸구자 역시 죽임을 당했다”고 알려주었다는 대목이 있기 때문이다.

  이 내용은 삼국 불교 최초의 순교자가 이차돈이 아니라 정방이라는 고구려 스님일 것이라는 가정을 해 볼 수 있게 하는데, 정방이라는 고구려 스님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고 있어 그의 행적을 알 수 없다. 

  따라서 이차돈은 신라 불교 최초의 순교자였고, 삼국의 일반 신도 중에서는 최초의 순교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고구려는 소수림왕 2년(A.D.372)에 전진(前秦)에서 승려 순도를 파견하고 불상과 불경을 함께 보내오고, 그로부터 2년 뒤인 374년에는 동진(東晋)으로부터 승려 아도가 오게 됨으로서 불교가 전래되었고, 백제에는 침류왕 원년(384)에 동진의 마라난타로부터였다.

  그런데 고구려, 백제와 국경을 접하고 있던 신라에는 아주 늦은 시기인 소지왕(비처왕이라고도 한다) 때에 아도화상에 의해 불교가 전파되기 시작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비처왕 때라는 기록은 오기임이 확실하다. 왜냐하면 아도화상은 훨씬 앞선 시기인 내물왕, 실성왕 때의 사람으로서 고구려에 불교가 전래된 지 10여년 후인 신라 내물왕 말기부터 고구려 승려들이 신라에 불교를 전파하려고 시도했으나 포교를 위해 신라로 들어간 고구려 승려들이 잡혀 죽는 등 신라의 불교에 대한 거부감이 강하여 실패를 거듭하다가 실성이사금 초인 서기 402-403년경부터 아도화상과 그 제자들에 의해 포교에 성공하기 시작하여 신자들이 하나씩, 둘씩 생겨났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신라의 불교전래는 5세기 초에 아도화상과 그 제자들에 의해서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