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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비운의 고구려 고국원왕 - 드라마 근초고왕

윤여동 2011. 5. 15. 10:44

 윤여동설 - 비운의 고구려 고국원왕 - 드라마 근초고왕

 

  고구려 16대 고국원왕의 이름은 쇠(釗 : 사유라고도 한다)이다.

  정복군주 미천왕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태후 주씨이다.

  서기 331년 봄2월에 미천왕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앞서 미천왕은 어릴 적 백부인 봉상왕이 돌고(미천왕의 아버지)를 역모로 몰아 죽이자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당시 도읍인 평양성으로부터 옛 도읍인 졸본부근으로 도망쳐 신분을 숨기고 남의 집 머슴살이와 소금장사를 하고 있다가 국상 창조리가 봉상왕을 제거하고 추대하여 왕위에 오른 인물이다.

  미천왕은 지리에도 밝았고 국제정세를 읽는 능력이 탁월했던 왕으로서 311년에 요동 서안평을 빼앗았고, 313년에는 낙랑군(후한 광무제가 살수 이남에 설치했던 낙랑군)을 빼앗았으며, 314년에는 대방군을, 315년에는 현토성을 빼앗아 고구려의 강역을 많이 넓혀 놓고 약 50세쯤의 나이에 죽고 만다.   

  그리하여 고국원왕은 25세쯤의 나이에 매우 넓어진 강역을 물려받아 왕위에 오르게 되는데, 이때 고구려의 서남쪽에서 모용선비인 연나라가 흥기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왕위에 오르자 평양성을 증축하고, 신성을 보수하고, 국내성을 쌓고, 환도성을 보수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해 놓고는 환도성으로 옮겨 살게 된다. 상황을 보아 중원으로 진출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당시 고구려의 국력으로서는 충분히 그러한 생각을 가질만 했다.

  그런데 이때 고구려의 서남쪽에 위치하고 있던 전연의 모용황 역시 중원으로 진출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두 나라는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342년에 이르러 연나라의 모용황이 고구려를 침공하게 되는데, 이때 고국원왕은 적의 기만전술에 속아 환도성을 함락 당하게 되고, 어머니인 태후 주씨와 왕후는 포로로 잡히게 되며, 전왕(사서의 기록에는 모용황이 고국원왕의 아버지인 미천왕의 유골을 탈취해 갔다고 하는데, 이때 환도성에는 산상왕의 능이 조성되어 있었으므로 아마 모용황은 산상왕의 능을 파서 그 유골을 가져갔을 것이다. 기록이 잘못된 듯하다)의 유골을 탈취당하게 된다.

  그리하여 고구려는 급히 평양 동쪽 황성으로 옮겨 재기를 모색했으나 이후 13년간 연나라에 끌려 다니게 되어 중원으로 진출할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만다.

  그러다가 369년에 이르러 무슨 이유인지 전해지지 않았지만 고구려가 군사 2만을 동원하여 백제를 침공하였다가 패하게 되고, 371년 봄에 다시 한번 백제를 침공하게 되는데, 이때 백제의 근초고왕이 군사들을 패수가에 매복 시켰다가 급습하는 통에 또 대패하게 된다.

  그러자 백제의 근초고왕은 자신감을 얻어 10월에 이르러서는 군사 3만을 동원하여 아예 고구려의 평양성을 침공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평양성 전투에서 고국원왕은 백제군이 쏜 화살에 맞아 상처가 깊어 결국 몇일 후에 죽게 되고, 고구려는 이 평양성 전투에서 패하게 되어 이로부터 고구려와 백제는 철천지 원수의 나라가 되고 이후 두 나라간에 전쟁이 끊일 날이 없게 되는 것이다. 

  필자가 고국원왕을 비운의 왕이라고 하는 것은 그가 태자의 위치에 있었을 때는 아버지인 미천왕의 그늘에서 비교적 평탄한 삶을 살았을 것으로 여겨지는데, 왕위에 올라서는 모용황의 침공을 받아 환도성을 함락 당하고, 포로로 잡혀간 어머니인 태후 주씨와 왕후의 송환과 선왕의 유골을 돌려받기 위해 연나라에 신하라고 칭하면서 온갖 보물을 갖다 바쳐야 했고, 중원으로의 진출이 좌절되었으며, 그것이 마무리 되자 이번에는 백제 근초고왕의 침공을 받고 평양성 전투에서 화살에 맞아 죽고 말았으니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요즈음 역사드라마 “근초고왕”에서 고국원왕이 백제군이 쏜 화살에 맞아 죽게 되는 모양이다.

  고국원왕의 일생에 대하여 시청자들이 궁금해 할 것 같아 이 글을 올린다.  

     

  이후 백제는 요서까지 진출하게 되나 후일 고국원왕의 손자인 광개토대왕의 침공을 받고 도읍인 한성이 함락될 지경에 이르자 아신왕이 광개토대왕에게 항복하고 무릎꿇고 영원히 노객이 되어 복종하겠다는 맹세를 해야했고, 또 개로왕 때는 고국원왕의 증손자인 장수왕의 침공을 받아 도읍인 한성을 고구려에게 빼앗기고 왕은 잡혀 죽었으며, 그 동생 문주왕이 왕위에 올라 급히 도읍을 웅진으로 옮겨야 했다.

  역사는 순환하는 것이니 국운도 부침이 있는 것일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