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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광개토태왕의 일생

윤여동 2011. 6. 1. 21:22

 

윤여동설 - 광개토태왕의 일생

 

 

 

 [374년 왕탄생] 광개토태왕의 성은 고씨요, 이름은 담덕이다. 고구려 소수림왕 4년인 서기 374년 갑술년에 고추가 이련(어지지라고도 한다)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에 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았다.

  태어날 때부터 영웅스러웠고 자라면서 활달한 의지를 가졌었다.

  [384년 왕11세] 17대 소수림왕이 384년 11월에 죽고 아들이 없자 그 동생인 고추가 이련이 왕위를 이었는데, 이가 곧 고구려 18대 고국양왕으로서 후일의 영락태왕(광개토태왕) 담덕의 아버지이다. 

  [386년 왕13세] 그리하여 고국양왕의 장자였던 담덕은 고국양왕 3년인 386년 정월에 이르러 13세의 나이에 태자로 봉해졌고, 이해 8월에 고국양왕이 군사를 출동시켜 남쪽의 백제를 정벌했는데, 이때 태자로 봉해진 담덕이 할아버지인 고국원왕의 원수를 갚기 위해 생애 최초로 전쟁에 참전했을 가능성이 있다. 

 

☆ 고구려와 백제는 백제의 근초고왕이 서기 371년에 고구려를 침공하여 평양성 전투 중 광개토태왕의 할아버지인 고국원왕이 백제군이 쏜 화살에 맞아 같은 해 10월 23일에 죽게 되어 이때 두 나라는 철천지 원수의 나라가 되어 있었다.

 

  [388-389년] 이때 태자인 담덕의 나이는 15-16세였는데, 이때쯤 혼인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태자비에 관한 기록은 찾을 수 없다.

  [390년 왕17세] 390년 9월에 백제가 침공하여 도압성(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도곤성이라 하였다)을 함락시키고 백성들을 잡아가는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그런데 설상가상 이때 고국양왕이 중병에 걸려 국사를 돌보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391년 영락1년 왕18세] 그러자 고국양왕은 391년 정월에 태자인 담덕에게 왕위를 선위하고 상왕으로 물러앉게 되고, 당시 18세가 된 태자 담덕이 왕위에 올라 연호를 영락(永樂)이라 반포하게 된다.

 그리하여 백성들은 연호에 따라 왕을 영락태왕(永樂太王)이라 불렀고, 호태왕 비문에도 391년을 영락 1년이라 새겼던 것이다. 

  이때 고구려의 도읍은 평양 동쪽의 황성이었는데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 부근이다.

  그런데 이해에는 그 아버지 고국양왕이 병석에 누워 있었고, 또 새로 등극한 왕으로서 국정을 파악하고, 새로운 진용을 짜는 등 주로 내치에 집중했던 것으로 보인다.

  

☆ 고구려는 기원전 37년 졸본에서 건국되어 유리왕 22년인 서기 3년에 국내성으로 도읍을 옮겼고, 산상왕 13년인 서기 209년에 왕이 환도성으로 옮겨 살다가 동천왕 20년인 246년에 위나라 관구검의 침공을 받고 환도성이 함락되자 평양성으로 옮겨가게 된다.

  그랬다가 고국원왕 12년인 342년에 다시 환도성으로 옮겨 살았는데, 그해 10월 전연 모용황의 침공을 받고 환도성이 또 함락되자 평양성 동쪽의 황성(평양동황성)으로 옮기게 된다.

  그리하여 광개토태왕 당시에는 황성이 고구려의 왕성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광개토태왕의 아들이었던 장수왕 15년(A.D.427)에 이르러 평양성으로 도읍을 옮겼다는 기록이 나타나기 때문이고, 또 평원왕 28년(A.D.586)에 평양성 부근의 장안성으로 옮겨 살다가 그곳에서 사직을 문 닫았던 것으로 보인다.

      

  [392년 영락2년 왕19세] 영락태왕이 봄에 신라에 사신을 보내 우호를 약속하고 볼모를 보내라고 하자 당시 신라의 내물왕은 조카인 실성을 볼모로 보내왔는데, 이는 이때 신라가 백제와 왜의 침공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의 보호막이 필요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3월에 이르자 영락태왕은 불법을 믿고 숭배하여 복을 구하라는 교서를 내리고, 관리들에게 명하여 사직과 종묘를 수리하게 하는데, 이는 영락태왕 스스로가 불교를 신봉하고 있기도 했겠지만 그 아버지 고국양왕의 병세가 점점 악화되었기 때문에 불법의 힘을 빌어서라도 병석에 누워 있는 아버지의 쾌유를 기원하기 위해 그러한 교서를 내리게 되었던 것이 아닌가 싶고, 또 종묘와 사직을 새로이 보수함으로서 조상의 영령들에게 아버지의 쾌유를 빌고자 함이었을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인데, 이를 보면 영락태왕은 대단한 효자였고 어떻게 해서든 아버지의 병을 고쳐보려 백방으로 노력했던 듯하다.   

  그런데 이러한 영락태왕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5월에 이르러서 결국 병석에 누워있던 그 아버지 고국양왕이 죽자 영락태왕은 장례를 치루고 난 후 본격적으로 주변국 정벌에 나서게 된다.

  7월에는 왕이 군사 4만을 직접 이끌고 백제를 쳐서 석현성 등 10개성을 빼앗고,

  9월에는 왕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거란을 쳐 5백명을 포로로 잡고, 거란에게 잡혀갔던 고구려 백성 1만명을 데리고 개선하게 되고,

  10월에는 다시 왕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요충지 백제의 관미성을 쳐서 함락시켰는데, 그 성은 사면이 절벽이고, 강물로 빙 둘러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성을 공격한지 20일 만에야 함락 시킬 수 있었다고 한다. 관미성의 위치는 지금의 난하 중류 반가구수고, 대흑정수고 부근으로 비정되고, 이때의 영락태왕은 계속 전쟁터에서 생활하다시피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이해 11월  백제에서는 아신왕이 진사왕을 제거하고 백제 17대 왕위에 오르게 되는데, 광개토태왕과 거의 비슷한 나이였다.

 

  [393년 영락3년 왕20세] 영락태왕은 이해 평양에 아홉 개의 절을 지었는데, 평양에 절을 지었다는 것은 평양성 전투에서 백제군의 화살에 맞아 죽은 할아버지 고국원왕의 명복을 빌고, 또 죽은 아버지 고국양왕의 명복을 빌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혹시 영락태왕의 직계 조상인 18대 고국양왕, 16대 고국원왕, 15대 미천왕, 고추가 돌고, 13대 서천왕, 12대 중천왕, 11대 동천왕, 10대 산상왕, 8대 신대왕의 명복을 비는 원찰을 지었는지도 모르겠다] 

  고구려의 평양은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 부근으로서 승덕외팔묘가 영락태왕이 지었던 9개 절의 흔적이 아닌가 싶다.   

  한편 진사왕을 제거하고 왕위에 오른 백제의 아신왕은 393년 8월에 이르러 진무에게 군사 1만을 주어 고구려에게 빼앗긴 요충지 관미성과 석현성 등 10개 성을 탈환토록 명령한다.

  그리하여 영락태왕은 장수를 보내 방어토록 했는데, 이때 백제의 진무는 고구려에게 빼앗겼던 석현성 등 5개성은 탈환에 성공했으나 관미성과 나머지 성은 탈환에 실패하고 철군한다.

  [394년 영락4년 왕21세] 7월에 백제가 다시 침공해오자 이번에는 왕이 직접 기병 5천을 이끌고 출전하여 맞받아쳐 승리하게 되는데, 이때 고구려와 백제가 수곡성 아래에서 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옛날 백제의 근구수왕이 태자시절 고구려를 침공하여 누가 다시 이곳까지 올 수 있겠는가 하고 자랑스러워 했던 곳으로서 지금의 하북성 승덕현 부근이다.

  이해에 영락태왕의 장자인 거련(후일의 장수왕)이 출생한다. 

  [395년 영락5년 왕22세] 호태왕 비문을 보면 영락 5년 을미년인 이해에 고구려 서쪽에 위치한 비려가 고구려 백성들을 잡아가 돌려보내지 않자 왕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비려를 침공한다.

 

 

 

 

 

  이때 영락태왕은 염수까지 진격하여 3개 부락 6-700영을 격파하고 셀수 없을 만큼의 소, 말, 양떼를 노획하고 양평을 경유하여 역성, 북풍을 지나 서쪽 국경도 구경하고 사냥도 하면서 개선했다고 기록되어 있어 비려가 유목민이 사는 지역임을 알 수 있다.

  비려는 거란의 일파로서 지금의 산서성 북쪽 내몽골 찰합이우익후기 부근을 말하는 것인데, 지금도 그 부근에 사는 사람들은 목축을 하는 사람들이 많고 염호(염수)라는 커다란 호수도 있다.

 

 

 

 

   이때 고구려의 영락태왕은 당시의 도읍이었던 황성(지금의 하북성 승덕시) 부근으로부터 서쪽으로 나아가 내몽골 오란찰포 북쪽 염수까지 정복하고 돌아왔던 것이고,   

  또 삼국사기에는 8월에 백제가 고구려를 침공하자 영락태왕이 몸소 군사 7천으로서 패수(지금의 하북성 반가구수고 상류의 난하)에서 백제군과 싸워 8천명을 죽이고 포로로 잡으며 대승했다는 기록이 보이고, 또 11월에 백제 아신왕이 8월 패수전투에서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하여 몸소 군사 7천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침공하려고 청목령(지금의 하북성 관성현 부근으로서 후세 고려 개경의 송악산이다)까지 갔는데 마침 큰 눈이 내려 철군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396년 영락6년 왕23세] 백제의 아신왕이 몸소 고구려를 침공하려다가 큰 눈 때문에 철군했다는 소식을 들은 영락태왕은 전쟁준비를 지시했고,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자 직접 군사를 이끌고 백제의 도읍 한성(漢城)을 향하여 진군하게 되고 아리수를 건너 한성을 공격한다.

  이때 백제의 아신왕은 성문을 닫고 버텼으나 고구려군의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한성이 함락될 지경에 이르자 항복을 청하고 남녀 1천명, 세포 1천필을 바치며 영락태왕 앞으로 나아가 무릎을 꿇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노객(종)이 되어 따르겠습니다”라고 맹세를 한다. 그러자 영락태왕은 “앞으로 성의 있게 순종하는지 지켜보겠노라” 하고는 58개성, 7백개 촌을 빼앗고 아신왕의 동생인 내신좌평 부여홍 및 장수와 대신들을 볼모로 잡아 개선하게 된다.

  두 젊은 왕들의 주도권 다툼에서 영락태왕이 우위를 점하게 된 것이다.

 

☆ 호태왕비문 중 이 396년 병신조의 신묘년 기사를 가지고 한·일 간에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데, 신묘년기사 속 “왜(倭)”자라고 하는 글자는 사실 글자형태가 비슷한 “게으를권(倦)” 자이고 정확한 해석은 아래와 같다.  

 『백잔(백제)과 신라가 옛날에는 고구려의 속민이었으므로 그런 이유로 조공을 바쳤었는데(百殘新羅舊是屬民 由來朝貢),

  신묘년(A.D.391) 이래 (조공 바치는 것을) 게을리 하였기 때문에(而倦以辛卯年來),

  바다를 건너 백잔(백제)... 신라를 격파하여 신민으로 만들기 위하여(渡海破百殘☆☆新羅以爲臣民),

  영락 6년(A.D.396)인 병신년에 광개토태왕이 몸소 수군을 이끌고 백잔(백제)을 토벌했다(以六年丙申 王躬率水軍 討伐殘國)』                    

   

  [397년 영락7년 왕24세] 이해 백제의 아신왕은 왜국과 우호관계를 맺고 태자인 전지를 왜국에 볼모로 보낸다. 아신왕이 나라의 태자를 볼모로 보내면서까지 왜국을 끌어들이려고 시도했던 것은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패하여 많은 강역을 빼앗기고 동년배인 영락태왕에게 무릎꿇고 영원히 종이 되겠다고 맹세해야만 했던 일을 매우 수치스럽게 생각하고 그 치욕을 되갚아주고자 한 것이었다.

  [398년 영락8년 왕25세] 호태왕 비문에는 이해에 백신 토곡을 정벌한 기사가 보이는데, 아직까지 백신 토곡이 어디를 말하는지 정확하게 밝혀지지는 않았다. 토욕혼을 말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고, 숙신(식신)을 말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는데, 앞서 고구려가 395년에 비려를 정벌하고 염수까지 진출했다고는 하지만 이때 토욕혼까지 진출할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판단되고, 백신 토곡이라는 곳은 고구려 동북쪽인 지금의 대흥안령에 위치했던 숙신(말갈)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이해 8월에 아신왕이 다시 고구려를 치려고 군사를 출동하여 한산 북쪽 목책에 이르렀는데 그날 밤 유성이 병영 안으로 떨어지자 불길한 징조라 하여 중지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399년 영락9년 왕26세] 호태왕비문을 보면 이해 영락태왕이 하평양을 순수했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당시 신라의 내물왕이 사신을 보내 왜인들의 침공이 임박했다고 하면서 구원해 주기를 요청하자 영락태왕은 신라사신에게 밀계를 내리고 돌려보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밀계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전해지지 않았다.

  그리고 하평양이라는 곳이 어디를 말하는지 아직 정확치 않은데, 신증동국여지승람 한성부 군명 조를 보면 한성부의 옛 이름이 남평양이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지금 많은 사람들은 하평양과 남평양이 동일한 곳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옛 백제의 도읍 한성, 근세조선의 도읍 한양으로 보고 있으나 필자가 보기에 이때 영락태왕은 아신왕의 항복을 받아들이고 58개성 700개촌을 빼앗기는 했지만 백제의 도읍인 한성은 빼앗지 않았기 때문에 하평양과 남평양은 각각 다른 곳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삼국사기 백제본기를 보면 이해 8월에 아신왕이 또 고구려를 치려고 군사와 말들을 크게 징발하자 백성들이 많이 신라로 도망쳐 호구수가 줄어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잃어버린 땅을 되찾고 치욕을 되갚으려는 아신왕의 집념은 집요했으나 백성들은 전쟁을 지겨워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400년 영락10년 왕27세] 삼국사기를 보면 이해 2월에 연나라의 모용성이 군사 3만을 이끌고 고구려를 습격하여 신성, 남소성 두 성을 함락 시키고 7백여리의 땅을 빼앗아 자기들의 백성 5천여호를 옮겨 놓고 돌아갔다고 기록되어 있어 이때 고구려가 연나라에게 일시적이나마 상당히 많은 땅을 빼앗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성은 지금의 하북성 장가구시 선화고성으로 비정되므로 장가구시 부근 지역의 땅을 빼앗겼을 것이다.

  그런데 호태왕비문에는 이해에 왜가 신라를 침공하자 영락태왕은 신라를 구해주라는 교시를 내리고 군사 5만을 출동시켜 왜인들을 몰아내고 신라를 구원해 주었고 이때부터 신라 매금이 직접 와서 가복이라 칭하며 명령을 청하고 조공을 바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지금 일반적으로 신라 매금을 신라왕이라 해석하고 있는데, 이때 신라의 내물왕은 재위 45년으로서 매우 늙은 때였다. 따라서 내물왕이 늙은 몸을 이끌고 직접 고구려의 도읍인 국내성까지 가서 젊은 왕에게 스스로를 낮추어 가복이라 칭했다는 것은 약간 의문스럽다.    

  [401년 영락11년 왕28세] 영락태왕은 이해 7월에 고구려에 볼모로 와 있던 실성을 신라로 돌려보낸다. 실성은 무려 10년 만의 귀국이었다.

  [402년 영락12년 왕29세] 삼국사기를 보면, 이해에 영락태왕이 장수를 보내 연나라의 숙군성을 치니 평주자사 모용귀가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아마 이때 고구려가 영락 10년에 연나라에 빼앗겼던 700여리의 땅을 되찾았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이해 2월에 신라의 내물왕이 죽자 영락태왕은 실성을 신라의 18대 왕위에 올린다. 고구려에 볼모로 가 있을 때 영락태왕과 실성의 관계가 돈독했던 것으로 보이고, 이때의 신라는 고구려의 속국이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403년 영락13년 왕30세] 이해 백제가 신라를 침공했다. 

  [404년 영락14년 왕31세] 이해 영락태왕은 장수를 보내 후연을 침공하는데, 골칫거리인 연나라를 아예 없애버리든가 최소한 세력을 확실하게 약화시켜 놓을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결과는 그리 만족스럽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런데 호태왕비문을 보면, 이 기회를 틈타 왜가 백제와 연합하여 대방을 침공했고 영락태왕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적군과 조우하게 되자 중앙을 돌파하여 대열을 끊어 놓은 후 우왕좌왕하는 적을 공격하여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죽이며 대승한다.  

  [405년 영락15년 왕32세] 이해 연나라 모용희가 요동성(북경부근)을 침공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는데, 이 기회를 틈타 왜가 신라를 침공하자 실성왕이 직접 출전하여 독산 남쪽에서 두 번 싸워 승리한다. 실성왕은 고구려에 볼모로 가 있을 때 영락태왕이 직접 군사들을 이끌고 많은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을 보고 자신도 직접 출전하여 군사들을 지휘하여 승전했던 듯하다.     

  이해 9월에 백제의 아신왕이 죽었는데, 그는 운이 없게도 영락태왕과 동시대에 태어나 그 빛을 발할 수 없었다.

  [406년 영락16년 왕33세] 겨울 12월인데도 연나라가 거란을 침공했다가 거란의 군사가 많자 방향을 바꾸어 동쪽으로 고구려를 침공하여 목저성을 치려고 했으나 연나라로부터 무려 3천여리를 행군하여 온 관계로 군사와 말들이 피로하고 얼어 죽는 군사들이 속출하자 철군하고 만다.

 [407년 영락17년 왕34세] 이해 영락태왕은 영락 14년에 장수를 보내 연나라를 침공했으나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던 기억을 떠 올리며 이번에는 직접 보기병 5만을 이끌고 연(후연)나라를 침공한다.

  군사를 네 부대로 나누어 적을 포위하고 사방에서 공격하여 전멸시키고 갑옷 1만벌을 노획하는 대승을 거둔다. 그리고는 돌아오면서도 사구성, 누성, 우전성 등을 격파하면서 개선하게 되어 후연이 급격히 쇠퇴하게 되고 얼마후 후연왕 모용희가 피살당하게 되어 후연은 멸망하게 되고, 고운(모용운)이 북연의 왕위에 오른다.  

  [408년 영락18년 왕35세] 북연왕 고운(모용운)의 선조는 원래 고구려 사람이었다. 그런데 342년에 전연의 모용황이 고구려를 침공하여 환도성을 함락시키고 5만명의 포로를 잡아갈 때 그 안에 고운의 할아버지인 고화도 섞여 있었다. 그리하여 고화는 연나라에서 살게 된다.

  세월이 흘러 고운이 성장하여 연나라의 태자인 모용보의 경호를 맡게 되는데, 모용보가 왕위에 오른 후 반역을 도모한 자기아들을 죽여버리고는 고운을 양자로 삼게 된다. 그리하여 고운을 모용운이라고도 부르는 것이다.

  그런데 모용보가 얼마 뒤 시해되고, 모용성, 모용희로 연(후연)나라의 왕위가 이어지게 되는데, 모용희가 총애했던 훈영이라는 빈이 죽어 장례식을 치루던 날 풍발이 반정을 도모하여 모용희를 제거하고 모용보의 양자였던 모용운(고운)을 추대하여 왕위에 올렸던 것이다.

  그리하여 영락태왕이 사신을 보내 축하하자 고운도 시어사 이발을 보내온다. 

  그런데 얼마 후 이 고운이 풍발의 사주를 받은 경호원에게 시해당하고 풍발이 북연의 왕위에 오른다. 안타까운 일이다.  

 

[요즈음 드라마 "광개토태왕"에서는 고운을 고구려의 국상을 지내다가 스스로 왕이 되어보려고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한 개연수라는 인물의 아들로 그리고 있는데 잘못된 것이다. 고운의 할아버지는 고화, 아버지는 고발이라는 사람이었다]

 

 [409년 영락19년 왕36세] 이해 영락태왕은 16세가 된 장자 거련을 태자로 봉하고는 나라 남쪽을 순행한다.

[410년 영락20년 왕37세] 이해 영락태왕이 몸소 군사를 이끌고 동부여를 정벌했는데, 이유는 동부여가 조공을 바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영락태왕이 이끄는 군사들이 동부여로 진군하자 동부여는 놀라 항복하게 되고, 영락태왕은 동부여로부터 64개성, 1,400개촌을 빼앗고 개선하게 된다.   

  [411년 영락21년 왕38세] 기록이 없다.

  [412년 영락22년 왕39세] 이해 신라의 실성왕이 내물왕의 아들인 복호를 고구려에 볼모로 보냈는데, 이는 앞서 내물왕이 자신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낸 것에 대한 앙갚음이었다.

  [413년 영락23년 왕40세] 이해 10월에 이르러 아직은 젊은 영락태왕이 죽고, 20세가 된 태자 거련이 왕위를 이었는데 곧 고구려 20대 장수왕이다.

  그러자 고구려의 대신들은 죽은 영락태왕에게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라는 시호를 올리고 능을 조성하게 되어 이때부터는 광개토왕, 광개토대왕, 광개토태왕, 호태왕이라고도 부르게 된다.

  고구려는 고국양왕까지는 능의 조성 위치가 기록되어 있으나 이 광개토태왕부터는 왕릉의 조성 위치가 기록되어 있지 않은데, 그 이유는 잘 알 수 없다. 그리하여 온갖 주장들이 난무하게 되었던 것이다.

  광개토태왕이 아직은 젊은 나이인 나이 40세에 죽었던 것은 평생동안 주변국을 정벌하느라 수많은 세월을 전쟁터에서 숙식함으로써 병을 얻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은데, 우리 민족으로서는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다.

  그가 20년만 더 살았더라면 우리의 역사가 어떻게 바뀌었을지.............  

 [414년 건흥1년 장수왕21세] 장수왕은 왕위에 올라 연호를 건흥(建興)이라 고치고, 큰 돌을 구하여 죽은 그 아버지 호태왕 평생의 업적을 새겨 갑인년(A.D.414) 9월 29일 능 앞에 세웠는데 지금 집안에 있는 호태왕비이다.

  아마 호태왕 붕어 1주기 추모일에 맞추어 능비를 세우고 추모식을 거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비명

  惟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

  옛날 추모왕이 터를 잡고 창업했도다.

  出自北夫餘天帝之子母河伯女郞 部卵降世生而有聖德☆☆☆☆

  출자는 북부여 천제의 아들이요 어머니는 하백의 딸이다.

  알을 깨고 세상으로 내려와 태어나시니 성덕이 있고.............

  (天)命駕巡幸南下路由夫餘奄利大水王臨津言曰我是皇天之子母河伯女郞鄒牟王

  하늘의 명을 받아 남쪽으로 순행하며 부여의 엄리대수를 지날 때 왕이 나루에 다달아 말하기를 나는 황천의 아들이요 어머니는 하백의 딸인 추모왕이다.

  爲我連葭浮龜應聲卽爲連葭浮龜然後造

  나를 위하여 갈대로 엮은 거북이여 떠오르라 소리치니 갈대로 엮은 거북이 떠올라 다리를 만들어 주었다. 

  渡於沸流谷忽本西城山上而建都

  강을 건너 비류곡 홀본 서성산 위에 도읍을 세웠다. 

  焉不樂世位因遣黃龍來下迎王 王於忽本東岡黃龍負昇天

 왕위에 올라 세상의 즐거움을 누리시지도 못했는데 하늘에서 황룡을 내려 보내와 왕을 영접해가니 왕이 홀본 동쪽언덕에서 황룡을 타고 승천하셨다. 

  顧命世子儒留王以道興治

 외아들 유류왕이 도를 일으켜 나라를 다스리고

  大朱留王紹承基業

 대주류왕이 왕위를 이어 대업의 기초를 튼튼히 했다.

  還至十七世孫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二九登祚号爲永樂太王

  세월이 흘러 17세손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에 이르렀는데 18세에 왕위에 올라 영락태왕이라 하였다.

  恩澤洽于皇天威武桭被四海掃除☆☆庶寧其業 國富民殷五穀豊熟

  황천의 위력으로 온 세상을 평정하고... 은택을 베푸니 사람들이 편안히 각자의 생업에 열중하게 되었다. 나라는 부유하고 백성들은 풍년가를 불렀다. 

  昊天不弔州有九宴駕棄國以甲寅年九月二十九日乙酉遷就山陵於是立碑銘記勳績以示後世...

  하늘의 부름을 받으니 그를 잊지 않기 위하여 구연가기국에서 산릉 가까이로 돌을 옮겨 갑인년(A.D.414) 9월 29일 을유일에 후세에 볼 수 있도록 훈적을 새겨 비를 세우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