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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알선동 석실은 환웅설화의 발생지일까?

윤여동 2011. 8. 26. 23:38

 

윤여동설 - 알선동 석실은 환웅설화의 발생지일까?

 

 

 

 

 

  위서 권100 열전 제88 오락후(烏洛侯) 조를 보면,

  “세조 (태평)진군4년(A.D.443)에 (오락후 사신이) 내조했는데 (말하기를) 그 나라의 서북쪽에 선제(先帝)의 옛터가 있고 석실로서 남북이 90보, 동서가 40보, 높이가 70보인데 그 석실에 신령스러움이 있어 많은 백성들이 소원을 빈다고 하였다.

  세조가 중서시랑 이창(李敞)을 보내 고유제를 지내게 했고, 그 축문을 석실벽에 새기고 돌아왔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탁발선비의 선조들이 살았었다는 석실(석굴)에 대하여 언급되어 있다.

 

☆ 그런데 북위 세조는 어떻게 오락후 사신이 와서 오락후에 있는 커다란 석굴이 탁발선비의 조상이 살았던 옛터라고 말한다고 하여 수천년 전의 일을 별도의 확인절차도 없이 곧바로 이창 등을 보내 제사를 지내게 했던 것일까?

  혹시 오락후가 북위와 동족으로서의 인연을 강조하며 북위의 우산 속으로 들어가기를 원했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 여부를 떠나 오락후를 번국으로 잡아두기 위하여 그렇게 했던 것은 아닐까?     

 

  지금 많은 사람들은 위 기록속의 석실이 내몽골 호륜패이 동북쪽 아리하진의 알선동[嘎仙洞:알선동 석굴]이라 하는데, 이유는 그곳에서 이창이 443년에 석실벽면에 새겼다는 축문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알선동석각축문내용]

 

  그런데 위서의 기록에는 그 석실이 남북이 90보(길이 약90m), 동서가 40보(폭 약40m), 높이가 70보(약70m)나 되는 대단히 큰 석굴이라 했는데, 지금 내몽골 호륜패이 아리하진 알선동의 크기는 기록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리고 알선동이 진짜라면 오락후(오라혼)의 위치도 사서의 기록들보다 동쪽으로 수천리 정도 이동시켜 비정해야 한다.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필자가 보기에는 중국이 역사를 왜곡하기 위하여 그 동굴 벽면에 아무도 모르게 비문을 새겨 놓은 후 미문평(米文平)이라는 사람을 시켜 비문을 발견했다고 발표하도록 하고, 언론을 동원하여 대대적으로 선전함으로써 기정 사실화했을 가능성이 많다.

  왜냐하면 지금의 알선동을 진짜라고 해야 중국이 주장하는 역사강역과 일치시킬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고, 결과적으로 이 알선동의 발견으로 인하여 중국 당국은 역사를 왜곡하는데 있어 움직일 수 없는 물증으로 이용할 수 있었고, 미문평은 대단한 발견을 한 고고학자라는 명예를 얻었기 때문이다.

  결국 지금의 알선동은 중국과 미문평이 연출한 사기극일 가능성이 농후하고, 따라서 지금 많은 역사학자들도 그 역사사기극에 놀아나고 있는 셈이라 할 수 있다.

  지금도 알선동이 있는 그 지방 사람들은 부자가 되게 해달라고 그 석굴에 소원을 빈다고 하는데, 이는 옛날부터 그 석굴이 소원을 성취하게 해주는 성스러운 곳이라고 전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 삼국유사를 보면, “옛날에 환인의 서자 환웅이란 이가 있었는데 자주 천하를 차지할 뜻을 가지고 인간세상을 탐내고 있었다. 그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 삼위태백산을 내려다보니 홍익인간 할 만한 곳이었다. 이에 환인은 천부인 세 개를 환웅에게 주어 인간세상을 다스리게 했다. 환웅은 무리 3천을 거느리고 태백산 꼭대기에 있는 신단수 아래로 내려왔다.    이곳을 신시라 하고 이분을 환웅천왕이라 한다. 그는 풍백, 우사, 운사를 거느리고 주곡, 주명, 주병, 주형, 주선악을 관장하고 모든 인간들의 360여 가지 일을 주관하며 세상을 다스리고 교화하였다.

  이때 호랑이 한 마리와 곰 한 마리가 같은 동굴 속에서 살고 있었는데, 항상 신웅(환웅)에게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였다. 그리하여 신웅이 신령스러운 쑥 한줌과 마늘 20개를 주면서 말하기를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백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곧 사람이 될 것이다’ 라고 했다.

  이에 곰과 호랑이가 이것을 받아서 먹고 삼칠일(21일) 동안 조심했더니 곰은 여자의 몸으로 변했고, 호랑이는 그렇지 못했다.

[필자주 : 이 환웅설화의 현장은 한민족의 성산 태백산(지금의 대광정자산)에서 일어났던 사건일 것으로, 호랑이를 숭배하는 예족 처녀와 곰을 숭배하는 맥족 처녀가 환웅천왕의 왕비자리를 놓고 경합을 벌이고 있는 상황에 대한 기록이다]

 

  웅녀는 날마다 신단수 아래에서 잉태하기를 축원했다.

[필자주 : 신단수는 태백산 꼭대기 조천지 가의 신단에 서 있던 박달나무였다]

환웅이 잠시 사람으로 변하여 그녀와 혼인했더니 곧 잉태되어 아들을 낳았다.

그 아이의 이름을 단군왕검이라 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기록 중 곰과 호랑이에 관한 설화를 환웅천왕이 왕비를 간택하는 최종과정으로 보면 호랑이를 숭배하는 예족의 처녀가 간택되지 못하고 곰을 숭배하는 맥족의 처녀가 왕비로 간택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