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송양의 비류국(沸流國)은 졸본 서쪽에 위치했었다 - 최초공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를 보면,
『추모왕 원년(B.C.37) 왕이 비류수 중류에 채소잎이 떠내려오는 것을 보고 그 상류에 사람이 사는 것을 알고 사냥을 하면서 찾아 올라가 비류국에 이르렀다. 그 나라왕 송양이 나와보고 말하기를 ‘내가 궁벽한 바다 모퉁이에 외따로 살기 때문에 아직 군자를 만나보지 못했는데, 오늘 서로 만나게 되었으니 이 또한 다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대가 어디서 왔는지 전연 알지 못하겠소’ 하였다.
주몽이 대답하기를 ‘나는 천제의 자손으로서 아무 아무 곳에 와서 도읍을 정했소’했다.
송양이 말하기를 ‘우리는 여러 대째 왕이 되어 온 터에 땅이 적어 두 임금은 용납할 수 없고, 그대는 도읍을 정한지도 얼마되지 않았으니 나의 속국이 되는 것이 어떠하오?’ 라고 하였다.
왕이 그 말에 분개하여 그와 말다툼을 하다가 다시 활쏘기로서 서로의 재주를 겨루어 보았는데 송양은 주몽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2년(B.C.36) 여름 6월에 비류국왕 송양이 와서 나라를 바치매 그곳을 다물도(多勿都)로 개칭하고 송양을 그 지방의 주인으로 봉했다. 고구려말에 옛 땅을 회복한 것을 다물이라고 하기 때문에 그 지방의 명칭으로 삼은 것이다.
유리왕 2년(B.C.18) 가을7월 다물후 송양의 딸을 맞아들여 왕후로 삼았다.
3년(B.C.17) 왕후 송씨가 죽으매 다시 두 여자에게 장가를 들어 계실로 삼았다.
20년(A.D.1) 봄 정월에 태자 도절이 죽었다』 [필자주 : 첫왕후 송씨는 바로 이 도절을 낳고 산후 후유증으로 죽었던 것으로 보인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송양과 고구려 왕실과의 밀접한 관계를 비교적 소상하게 기록하고 있는데, 이 송양은 유리왕에게 두 딸을 시집보냈던 것으로 나타난다.
이는 3대 대무신왕 조에, “대무신왕(혹은 대해주류왕)이 (서기 18년에) 왕위에 오르니 이름은 무휼이요, 유리왕의 셋째아들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총명하고 슬기로웠으며 장성해서는 웅걸이 가지는 큰 지략이 있었다. 유리왕 재위 33년(A.D.14) 갑술에 무휼(대무신왕의 이름)을 태자로 삼았고 당시 나이가 11세였는데, 이때에 와서 왕위에 올랐다. 어머니는 송씨이니 다물국왕 송양의 딸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서기 14년 11세의 나이에 태자로 봉해진 대무신왕은, 유리왕과 혼인했다가 기원전 17년에 죽은 송양의 딸의 소생일 수 없다. 왜냐하면 대무신왕은 서기 4년생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삼국사기에 대무신왕의 어머니가 송씨라고 하였고, 4대 민중왕은 대무신왕의 동생이었으니 송양은 유리왕에게 시집갔던 큰딸이 죽은 후 다시 작은 딸을 유리왕에게 시집보냈고, 이 작은 송씨가 대무신왕과 민중왕을 낳았다고 해야 앞뒤가 맞는다.
송양은 두 딸을 유리왕에게 시집보냈던 것이고, 그의 외손자들이 고구려의 왕위에 올랐던 것이다.
☆ 후한서 고구려전을 보면, “다섯부족이 있는데 소노부,절노부,순노부,관노부,계루부이다. 본래는 소노부에서 왕이 되었으나 점점 미약해진 뒤에는 계루부에서 왕위를 대신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고구려가 시조로부터 5대 모본왕까지는 해씨로서 소노부에서 왕위에 올랐고, 혈통이 고씨로 바뀌는 6대 태조대왕으로부터는 계루부에서 왕위에 올랐다는 말이다. 따라서 송양의 비류국이 소노부였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송양의 비류국은 지금의 어디에 위치했었던 것일까?
이는 졸본의 위치를 알아야만 그 위치를 찾을 수 있을 것인데, 졸본은 지금의 하북성 적성현 후성진으로 비정된다.
그런데 기록을 보면, 주몽이 비류수 중류에 채소잎이 떠내려오는 것을 보고 상류에 사람이 살 것이라고 여기고 비류수를 따라 올라가 송양의 비류국에 이르렀다고 하였으므로 졸본으로 비정되는 지금의 후성진 부근으로 비류수가 흐른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송양이 왕위에 올라 있던 비류국은 지금의 어디에 위치했던 나라였기에 그가 나라를 바치자 그곳을 다물도(多勿都)라고 명명했던 것일까?
그리고 기록을 보면 주몽의 아들인 유리왕은 송양의 두 딸과 혼인을 하였던 것으로 나타나고 3대 대무신왕과 4대 민중왕은 바로 송양의 외손자였다. 고구려에서는 송양을 아주 파격적으로 대우했다는 말이 되는 것인데, 이는 그 비류국 땅이 전략적, 경제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후성진에서 강의 상류로 조금 올라가 서쪽으로 홍하(紅河)를 타고 올라가면 용관진에 이르고, 북쪽으로 백하(白河)를 따라 올라가면 적성, 독석구에 이르게 된다.
송양의 비류국은 지금의 적성 용관진으로 비정되는데, 서쪽으로 고개를 넘으면 조천진, 선화로 직접 연결되는 전략상 매우 중요한 곳에 위치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지금의 장가구 선화가 후일 고구려 서쪽의 방어를 책임졌던 신성(新城)이 되는 곳이고, 현토군과 바로 연결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류수는 지금의 홍하라 할 수 있을 것이고, 송양의 비류국은 지금의 용관진 부근에 위치했던 나라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