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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옥저(沃沮)의 위치 - 최초공개

윤여동 2011. 11. 18. 19:13

윤여동설 - 옥저(沃沮)의 위치 - 최초공개 

 

 

 

 

 

 

 

 

 

 

 

  옥저에 대한 사서의 기록들은 매우 혼란스럽다.  

 

  그리하여 역사 연구자에 따라 옥저가 4개(옥저, 동옥저, 남옥저, 북옥저)의 나라로 나누어져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3개(동옥저, 남옥저, 북옥저)의 나라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왜 사람에 따라 이렇듯 주장들이 다르게 되었는지 사서의 기록들을 확인해 보자.

  후한서 동옥저 전을 보면,

  “동옥저는 고구려 개마대산의 동쪽에 있다.

  동쪽은 대해까지이고, 북쪽은 읍루와 부여, 남쪽은 예, 맥과 접했다. 그 땅이 동서는 좁고, 남북은 긴데 땅이 사방 천리의 절반쯤 된다.

 

[옥저의 위치]

 

 

                                                          읍루(말갈)             대해

 

                  부여(동부여)                                    

 

                                                개                  북옥저

                                                                 동옥저                    대해

                                                대                  남옥저

                                                산 

                     고구려                                         맥            동예   

 

 

   토질은 비옥하며 산을 등지고 바다를 향해 있어 오곡이 잘 자라 밭에 씨를 뿌리면 농사가 잘된다........................

  (전한) 무제가 조선을 멸망시키고 옥저 땅으로 현토군을 만들었다. 뒤에 이맥의 침략을 받아 군을 고구려(필자주 : 구려의 오기)의 서북쪽으로 옮기고는 옥저를 현으로 고쳐 낙랑동부도위에 속하게 하였다. (후한) 광무제 때에 이르러 (낙랑동부)도위의 관직을 없앤 후에는 그 거수를 봉하여 옥저후로 삼았다. 그 땅이 작아 큰 나라 사이에 끼어 핍박을 받다가 마침내 구려(필자주 : 고구려의 오기)의 신하가 되었다........................

  또 북옥저가 있어 일명 치구루라고도 하는데, 남옥저에서 8백여리 떨어져 있다. 그 풍속은 모두 남옥저와 같으며 국경의 남쪽(필자주 : 북쪽의 오기이다)으로 읍루와 접했다. 읍루 사람들이 배를 타고와서 노략질하기를 좋아하므로 북옥저는 그들을 두려워하여 해마다 여름철에는 (산속의) 바위굴 속에 숨어살다가 겨울이 되어 뱃길이 통하지 않을 때가 되어야 내려와 읍락에서 산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삼국지 동옥저전을 보면,

  “동옥저는 고구려 개마대산의 동쪽에 있는데, 대해가에 산다.

  그 지형이 동북은 좁고 서남은 길다. (강역이) 천리쯤(필자주 : 반천리쯤의 오기)이다.

  북쪽은 읍루와 부여, 남쪽은 예맥과 접했다.......................

  한나라 초에 연나라의 망명객인 위만이 조선의 왕이될 때 옥저를 모두 복속시켰다. 한 무제 원봉 2년에 조선을 정벌하여 위만의 손자 우거를 죽이고 그 땅을 나누어 네 군으로 만들었는데, 옥저성을 현토군(의 치소로)으로 만들었다.

  뒤에 이맥의 침략을 받아 (현토)군을 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겼는데 지금 소위 현토의 옛 부라고 하는 곳이 바로 그곳이다.

  옥저는 다시 낙랑에 속하게 되었는데, 한(漢)나라는 그 땅이 넓고 멀어 단단대령의 동쪽을 나누어 (낙랑)동부도위를 설치하고 치소를 불내성(不耐城 , 필자주 : 전한서 낙랑군 조를 보면 낙랑동부도위의 치소를 不而라고 기록되어 있기도 한데 불내의 오기로 보인다)에 두어 별도로 대령의 동쪽 7개현을 관할하게 하였다. 이때 옥저 역시 모두 현이 되었다.......(옥저는) 나라가 작고 큰 나라 사이에 끼어 있어 마침내 (고)구려의 신하가 되었다........토질은 비옥하며 산을 등지고 바다를 향해있어 오곡이 잘 자라며 밭에 씨를 뿌리면 농사가 잘된다.........

  관구검이 (고)구려를 토벌할 때 (고)구려 왕 궁(필자 주 : 위궁 즉 동천왕의 오기이다)이 옥저로 달아났으므로 군대를 진격시켜 공격하고 옥저의 읍락을 모두 파괴하고 3천여명의 목을 베거나 포로로 잡으니 궁(위궁)이 북옥저로 달아났다.

북옥저는 일명 치구루라고도 하는데, 남옥저와는 8백여리 떨어져 있다. 그들의 풍속은 남북이 모두 동일하며 읍루와 접해 있다.

읍루는 배를 타고 다니며 노략질하기를 좋아하므로 북옥저는 그들을 두려워하여 여름철에는 깊은 산골짜기의 바위굴에서 살면서 수비하고 겨울철에 어름이 얼어 뱃길이 통하지 않으면 내려와 촌락에서 생활한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옥저, 동옥저, 남옥저를 명확하게 구분하지 않고 섞어 사용하고 있고 또 북옥저가 별도로 존재했음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상황이 이렇기 때문에 연구자에 따라 주장들이 각각 다르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서의 기록들을 세밀히 분석해 보면,

  원래 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쳐 멸망시키고 4군을 설치할 때에는 옥저가 하나의 나라였고, 그리하여 한 무제는 그 옥저 땅에 초기 현토군을 설치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랬다가 옥저의 북쪽 지역이 현토군에 반기를 들고 북옥저로 독립하였고,

  또 옥저의 동쪽 지역이 동옥저로 독립하여, 남옥저 만이 남게되자 한(漢)나라에서는 남은 남옥저 지역을 낙랑군에 이관하고, 현토군을 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기게 된다.

  그런데 낙랑군에서는 현토군의 관할지였던 남옥저 땅을 이관 받고보니 그 땅이 단단대령이라는 큰 고개의 동쪽에 위치해 있어 직접 관할하기가 곤란하자 그 남옥저와 맥의 남은 땅 7개현을 묶어 낙랑동부도위를 새로이 설치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그 후 어떤 사람은 옥저를 북옥저와 남옥저로 구분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동옥저와 북옥저로 구분하기도 했으며,

  또 어떤 사람은 옥저와 동옥저라 부르기도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결국 동옥저, 남옥저, 북옥저는 모두 원래의 옥저성이 위치했던 부근지역을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옥저(동옥저, 남옥저, 북옥저)는 과연 지금의 어디에 위치했었던 것일까?

  후한서와 삼국지 동옥저전을 보면, 옥저는 고구려 개마대산의 동쪽에 위치했고, 동쪽은 대해에 닿았으며, 남쪽은 예, 맥, 북쪽은 읍루, 부여와 접했다고 했다.

  그런데 같은 책 예전을 보면, 예(동예)는 남쪽으로 진한, 북쪽으로는 고구려, 옥저와 접하였고, 동쪽으로는 대해에 닿았다고 했는데,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진한에서 신라가 건국된다.

  이는 결국 신라의 북쪽에 예(동예)가 위치하고 있었고, 다시 예(동예)의 북쪽에 옥저가 위치했다는 말이다.

  그런데 중국 사서들 중 신라와 특별히 밀접한 관계를 맺었던 당나라의 역사서인 신·구당서와 수서, 북사 등을 보면, 신라가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위치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사실 신라는 진한(辰韓) 땅이 중심강역이었다.  

  그런데도 중국 사서들이 신라가 낙랑 땅에 위치했다고 기록했던 것은 후일 신라가 낙랑 땅의 일부를 차지했기 때문이었을 것인데, 문제는 고조선이나 위만조선 그리고 전한낙랑군이나 낙랑동부도위가 한반도가 아닌 지금의 북경 부근인 하북성,내몽골, 요녕성 서부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즉 백제와 신라는 한반도가 아닌 지금의 하북성과 요녕성에 위치하고 있었다.

  옥저와 주변국의 위치를 지도상에 표시해 보면 위와 같이 되는데, 지금의 내몽골 적봉, 옹우특기 부근이 초기 현토군의 치소였던 옥저성으로 비정되고, 북옥저는 그 북쪽 서랍목륜하 부근으로 비정된다.

  따라서 고구려의 개마대산이라는 곳은 태백산(필자주 : 지금의 대광정자산)의 북쪽 지금의 대흥안령산맥을 말한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또 단단대령이라는 곳은 지금의 칠로도산산맥을 말한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이는 역사학자들이 한반도 함흥 부근에 위치했을 것이라고 하는 옥저가 사실은 한반도가 아닌 지금의 대흥안령 동쪽에 위치했었다는 말이고 우리가 우리의 고대사를 아주 잘못 해석하고 있다는 말이다.

  우리 고대사의 중심강역이 한반도가 아니라 하북성, 요녕성, 내몽골인데도 역사학자라는 사람들이 모든 사서들의 기록을 한반도로 끌어들여 한반도 지역에 대입하여 해석하려 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역사의 실제 현장과 해석의 현장이 전혀 달라져 우리 역사에서 아무 것도 명확하게 밝혀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생각해 보시라. 우리 고대역사에서 확실한 것이 하나라도 있는지................. 

  우리가 한국사(국사) 교육을 받은 것이 오히려 그 역사의 진실을 찾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으니 참 아이러니하다.

  인식이라는 것이 한번 주입되면 그것을 전환하기가 그렇게도 어려운 것이다.  

 

☆ 북옥저는 추모왕 10년(B.C.28)에 고구려 추모왕이 보낸 부위염의 침공을 받고 멸망했고,

  동옥저가 고구려에 복속된 때는 태조태왕 4년(A.D.56) 조의 기록에 동옥저를 쳐서 그 땅을 빼앗아 성읍을 만들고 동쪽으로 창해까지, 남쪽으로는 살수에 이르기까지 국경을 넓혔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이때 동옥저가 멸망하고 고구려 땅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위 기록 중 이때 고구려가 남쪽으로 살수에 이르기까지 강역을 넓혔다는 기록을 잘못 이해하여 동옥저가 살수의 북쪽에 위치했을 것이라고 하기도 하나 동옥저는 살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고 동쪽으로 대해에 접하였다. 지금의 내몽골 적봉 부근의 동쪽 벌판 즉 지금의 중국 동북평원이 옛날에는 바다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하여 고구려는 동옥저를 복속시키고는 생선과 소금, 해산물 등을 바치게 했고, 그 지방에 미인이 많자 데려다가 비첩으로 삼았다고도 기록되어 있는데, 지금도 적봉, 옹우특기 부근에 미인들이 많다고 한다.

  중국에 관광을 가시거든 옹우특기에 들러 직접 확인해 보시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