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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백제 성왕이 죽은 “구천(狗川)”은 철원 마수성(馬首城) 동쪽 부근 - 최초주장

윤여동 2011. 12. 2. 19:00

윤여동설 - 백제 성왕이 죽은 “구천(狗川)”은 철원 마수성(馬首城) 동쪽 부근 - 최초주장

 

 

  삼국사기 백제본기 시조 온조왕 11년(B.C.8) 조를 보면,

  “가을 7월 독산(禿山)과 구천(狗川) 두 곳에 목책을 설치하여 낙랑으로부터 오는 길을 차단하였다” 라고 하면서

  “구천(狗川)”이라는 강이 언급되기 시작하는데, 백제 온조왕이 “나라의 동쪽에는 (신라가 있고, 서쪽에는) 낙랑이 있으며,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 편안한 날이 적다”고 말한 기록이 있는 것을 감안하면 이 구천이라는 강이 백제와 낙랑과의 경계지역에 위치한 것을 알 수 있고,

 

  또 삼국사기 백제본기 성왕 32년(A.D.554)조를 보면,

  “가을 7월 왕이 신라를 습격하려고 친히 보, 기병 50여명을 거느리고 밤에 구천(狗川)에 이르렀더니 신라의 복병이 튀어 나오므로 그들과 싸우다가 왕이 난병들에게 시해당했다. 시호를 성(聖)이라 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백제 26대 성왕이 바로 이 구천(狗川)이라는 곳에서 신라군들에게 시해 당해 죽었음을 알게 한다.

 

  그리고 신라 5대 파사이사금은 “내가 덕이 없이 나라를 가져 서쪽으로는 백제를 이웃하고 남쪽으로는 가야를 접하였으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신라의 서쪽에 백제가 위치하고 있었음도 알 수 있는데, 이는 결국 이 구천(狗川)이라는 강은 백제와 낙랑(낙랑동부도위로 비정됨) 그리고 신라 3국의 경계지역에 위치한 강이었다는 것을 알게 한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 15년(A.D.554) 조에는,

“가을 7월 백제 왕 명농(성왕의 이름)이 가량과 함께 와서 관산성(管山城)을 쳤다. 군주인 각간 우덕과 이찬 탐지 등이 맞아 싸웠으나 불리하여 신주의 군주 김무력이 주의 군사를 이끌고 달려와 교전하게 되었는데, 그의 비장인 삼년산군 고간 도도가 급히 쳐서 백제 왕을 죽였다. 이에 여러 부대들이 승세를 몰아 싸워 크게 이기고, 좌평 네 사람과 사졸 2만 9천 6백 명을 베니 말 한 필도 돌아가지 못했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백제의 성왕이 관산성 전투 중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백제본기의 기록과는 다르다.

  그런데 일본서기 흠명천황 15년 조를 보면, 백제의 성왕(명왕)이 전선에 가서 고생하고 있는 왕자 여창(후일의 위덕왕)을 위문하기 위하여 직접 전선인 구타모라(久陀牟羅) 요새까지 갔는데, 신라에서 그 정보를 알고 전군을 동원하여 총공격을 감행하여 성왕을 잡아 그 목을 잘라 죽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아직까지 이 “구천(狗川)”이 지금의 어느 강을 말하는지 아무도 찾아내지 못하고 있는데,

  필자가 생각하기에는 이 구천이나 독산이라는 곳은 백제 마수성(馬首城 : 마수산에 쌓은 성) 부근에서 찾아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마수성은 백제시조 온조왕 8년(B.C.11) 7월조를 보면, 백제에서 마수성(馬首城)을 쌓고, 병산(甁山)에 목책을 설치했더니 낙랑태수가 그에 항의했다고 하면서 나타나는 곳인데, 온조왕 11년(B.C.8) 조에 다시 "여름4월 낙랑이 말갈을 시켜 병산의 목책을 덮쳐 파괴한 후 1백여명을 죽이고 납치하여 갔다. 가을7월 독산(禿山)과 구천(狗川) 두 곳에 목책을 설치하여 낙랑으로부터 오는 길을 차단하였다"라는 기록이 이어서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백제 마수성, 병산책, 독산책, 구천책은 모두 가까이 위치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런데 마수성의 위치를 필자가 처음으로 찾아냈는데, 지금의 중국 하북성 평천(平泉)이었다. 

  그곳 산의 지형이 마치 말의 머리 모양을 하고 있기 때문에 옛 사람들은 그 산을 마수산이라 불렀을 것이고, 그곳에 온조왕이 성을 쌓고는 마수성이라 불렀던 것이다.  

  아래 그림을 보면 옛 사람들이 왜 그곳을 마수산, 마수성이라 했을지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우리 고구려, 백제, 신라의 중심 강역은 한반도가 아니라 지금의 북경, 하북성, 요녕성 서부, 내몽골이었다.

  즉 발해 북쪽이었다. 그곳이 잃어버린 우리의 옛 땅이다.  

  이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하고, 이를 이해하는 사람 만이 삼국사기, 삼국유사를 제대로 해석할 수 있고, 우리의 고대 역사를 제대로 밝혀낼 수 있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기록을 가지고 한반도를 아무리 뒤져봐도  한반도에서는 아무 것도 찾아낼 수 없고, 우리 고대 역사의 진실도 절대 밝혀낼 수 없다. 이는 필자가 단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