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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신라 천주(泉州)는 지금의 요녕성 수중(綏中) 부근 - 최초주장

윤여동 2012. 1. 28. 07:38

윤여동설 - 신라 천주(泉州)는 지금의 요녕성 수중(綏中) 부근 - 최초주장

 

 

 

 

 

 

 

  삼국사기 신라본기 54대 경명왕 8년(A.D.924) 조를 보면,

  “정월에 사신을 후당(後唐)에 보내 조공하였는데, 천주절도사(泉州節度使) 왕봉규(王逢規)도 후당(後唐)에 사신을 보내어 토산물을 바쳤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55대 경애왕 4년(A.D.927) 조를 보면,

  “3월 후당(後唐) 명종이 권지강주사(權知康州事) 왕봉규(王逢規)를 회화대장군(懷化大將軍)으로 삼았다.

  4월 지강주사(知康州事 : 權知康州事의 오기인듯) 왕봉규가 임언을 사신으로 후당에 보내 조공을 바치니 명종이 중흥전에서 불러보고 물건을 하사하였다. 강주(康州)소관의 돌산(突山) 등 4개 고을이 태조(고려태조 왕건)에게로 귀순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천주(泉州)와 강주(康州)가 언급된다.

 

  그렇다보니 일부 사람들은 위 기록 속 후당 때의 천주(泉州)와 강주(康州)가 지금의 중국 남부 복건성에 있는 천주(泉州)를 말하는 것이라 하며, 이때 신라가 복건성 천주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고려가 그곳을 침공하여 빼앗았다고 주장하기도 하며, 우리 고구려, 백제, 신라 등 삼국과 그 뒤를 이은 고려가 중국 대륙 전체를 차지하고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이해되지 않는 무리한 주장이라 생각된다.

  왜냐하면 삼국사기 신문왕 5년)A.D.685) 조를 보면,

  "거열주를 승격시켜 청주(菁州)를 설치하니............” 라고 기록되어 있고,

  경덕왕 16년(A.D.757) 조를 보면,

  “겨울12월 청주(菁州)를 강주(康州)로 고쳐 주1, 군11, 현27을 다스리게 하고................”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삼국사기 권제34 잡지 제3 지리1(신라편)을 보면,

  본국(본래의 신라강역) 지역 내에 3개 주를 설치하였는데, 왕성(서라벌) 동북쪽의 당은포 방면을 상주(尙州)라 하고, 왕성 남쪽을 양주(良州)라 하고, 서쪽을 강주(康州)라 하였으며.....................

  강주(康州)는 신문왕 5년인 당 수공 원년에 거타주를 분할하여 청주(菁州)를 설치하였고, 경덕왕이 강주(康州)로 개칭한 것인데, 지금의 진주(晉州)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원래의 신라강역 내에 설치된 청주(菁州)가 곧 강주(康州)였고, 강주(康州)가 곧 진주(晉州) 임을 알게 하므로, 왕봉규가 절도사, 권지강주사로 있던 천주(泉州)와 강주(康州) 그리고 진주(晉州)는 곧 동일한 지역이라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청주(菁州)가 곧 강주(康州)였고, 강주가 곧 진주(晉州)였으며, 진주가 곧 천주(泉州)였던 것이다.

 

  그런데 또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상도 진주목 건치연혁을 보면, “본래 백제의 거열성[일명 거타]인데, 신라 문무왕이 취하여 주를 설치하였고, 신문왕이 거타주를 나누어 진주총관을 설치하였으며, 경덕왕이 강주(康州)로 고쳤는데, 혜공왕이 다시 청주(菁州)로 되돌렸다. 고려 태조가 또 강주(康州)로 고쳤고, 성종2년에 목을 설치하였다가 14년에 진주(晉州)로 바꾸고 절도사를 두어 정해군이라 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지금 많은 사람들은 삼국사기 기록 속의 거열주(거타주), 청주, 강주, 진주를 한반도의 경상남도 진주(晉州)에 관한 기록으로 이해하고는 신라 말기 왕봉규가 지금 한반도의 경남 진주지역 일원을 차지하고는 신라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별도의 세력을 구축하고 후당으로부터 천주절도사, 권지강주사, 회화대장군 등의 작위를 받으며 그 지역을 통치하였다고 역사를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필자는 왕봉규가 별도의 세력을 구축하고 있던 천주, 강주는 지금의 복건성 천주나 한반도의 진주지역이 아니라 사실은  옛 가야지역이었던 지금의 발해 북안 요녕성 수중(綏中) 부근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고, 이때 왕봉규는 옛 가야 강역의 일부를 차지하고 가야의 부활을 꿈꾸었던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필자가 이러한 주장을 하는 것은 우리 신라의 건국지나 멸망지가 지금 한반도의 경주 부근이 아니라 사실은 지금의 요녕성 금주시(錦州市) 부근이기 때문이고, 원래 강주를 신라 서라벌(금성)의 서쪽 방향에 설치했다는 기록이 존재하기 때문이며, 고려의 도읍 개경이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관성현으로 비정되기 때문이다.

 

☆ 고려사(高麗史) 태조 10년(927) 4월 임술일 조의 “해군장군 영창(英昌)과 능식(能式) 등을 보내 주사(舟師)를 이끌고 강주(康州)를 쳐서 전리산(轉伊山), 노포(老浦), 평산(平山), 돌산(突山) 등 네 곳을 함락하고 사람과 물자를 약탈하여 돌아왔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하북성 관성현에 도읍했던 고려가 만리나 떨어진 중국 남부 복건성 천주 부근까지 가서 그곳을 치고 물자를 약탈하고 돌아올 수는 없는 일이고, 고려의 강역이 그곳까지였을 리도 없다.

 

  그런데 삼국사기와 고려사를 보면, 왕봉규가 약화된 시기(927년 4월)가 공교롭게도 왕봉규가 임언을 사신으로 후당에 파견한 시기(서기 927년 4월) 즉 임언이 후당에 도착하여 머무르고 있던 시기와 일치하는데, 이때 왕봉규의 거점인 강주는 고려의 공격을 받고 무너져 다시 회생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이고, 후당에 사신으로 갔던 임언이 과연 이미 무너진 강주(천주)로 귀국할 수 있었는지도 알 수 없다.

  한때는 후당에 직접 사신을 파견할 정도로 독자적 세력을 구축했던 신라 강주 지역의 왕봉규는 결국 그 지리적 위치 때문에 왕건의 고려와 견훤의 후백제 그리고 신라가 벌이던 후삼국 주도권 싸움의 와중에 그 구체적인 기록도 남기지 못한 채 급작스럽게 사라져 갔던 것이라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