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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논쟁 - 신라 진한 6부 돌산 고허촌장 소벌도리는 최씨의 조상인가, 정씨의 조상인가?

윤여동 2012. 7. 16. 08:59

 

윤여동설 - 논쟁 -  신라 진한 6부 돌산 고허촌장 소벌도리는 최씨의 조상인가, 정씨의 조상인가?

 

  [최씨들이 최근에 세웠다는 돌산고허촌장소벌도리공기적비]

 

  삼국사기 신라본기 시조 혁거세거서간 조를 보면 진한 6촌(진한 6부)에 대하여 “1. 알천 양산촌(閼川 楊山村), 2. 돌산 고허촌(突山 高墟村), 3. 자산 진지촌(觜山 珍支村, 혹은 간진촌이라고도 한다), 4. 무산 대수촌(茂山 大樹村), 5. 금산 가리촌(金山 加利村), 6. 명활산 고야촌(明活山 高耶村)으로 기록하고 있고, 고허촌장 소벌공이 혁거세거서간을 양육한 후 신라의 왕위에 추대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 신라 건국시조 혁거세거서간은 동부여 해부루왕의 딸인 사소(파소라고도 한다)공주가 혼전에 어떤 남자와 정을 통하여 임신이 되자 동부여에서 도망쳐 진한으로 와서 낳은 아들로서 동부여 해부루왕의 외손자였다.

 

3대 유리이사금 9년(A.D.32) 조를 보면,

“봄에 6부의 이름을 고치고 이어 성씨를 내려 주었다.

양산부는 양부라 하고 성은 이씨요,

고허부는 사량부라 하고 성은 최씨요,

대수부는 점량부(모량이라고도 한다)라 하고 성은 손씨요,

간진부는 본피부라 하고 성은 정씨요,

가리부는 한기부라 하고 성은 배씨요,

명활부는 습비부라 하고 성은 설씨로 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삼국유사 기이 제1 신라시조 혁거세왕 조를 보면,

“진한 땅에는 옛날에 6촌이 있었는데.........................

둘째는 돌산 고허촌이니 촌장은 소벌도리이다. 처음에 형산에 내려왔으니 이가 사량부(梁은 道라고도 읽고 혹은 涿으로도 쓰는데, 역시 음은 道이다) 정씨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남산부라 하여 구량벌 마등오 도북 회덕 등 남촌이 여기에 속한다.(지금이라고 한 것은 고려 태조 때를 말한다. 이하 같다)

네째는 자산 진지촌이니 촌장은 지백호이다. 처음에 화산에 내려왔으니 이가 본피부 최씨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통선부라 한다. 시파 등 동남촌이 여기에 속한다.

최치원은 바로 본피부 사람이다. 지금 황룡사 남쪽 미탄사 남쪽에 옛 터가 있다고 하는데 이것이 최후의 옛집임이 분명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삼국사기에는,

“고허부는 사량부라 하고 성은 최씨요,

간진부는 본피부라 하고 성은 정씨요” 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삼국유사에는,

“둘째는 돌산 고허촌이니 촌장은 소벌도리이다. 처음에 형산에 내려왔으니 이가 사량부 정씨의 조상이 되었다.

넷째는 자산 진지촌이니 촌장은 지백호이다. 처음에 화산에 내려왔으니 이가 본피부 최씨의 조상이 되었다” 라고 성씨가 서로 다르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기록대로라면 고허부(사량부 혹은 사도부)가 신라 유리왕으로부터 최씨 성을 하사받았고, 간진부(본피부)는 정씨 성을 하사 받았다고 해야 하고,

삼국유사의 기록대로라면 돌산 고허촌(사량부) 소벌도리의 후손들은 정씨여야 하고, 자산 진지촌(본피부) 지백호의 후손들은 최씨여야 하는 것이다.

 

두 기록이 두 성씨의 득성조 이름을 바꾸어 기록하고 있는 셈이다.

두 기록 중 하나는 분명 잘못 기록되어 있다는 말이 되는 것인데, 지금에 이르러 과연 어느 기록이 잘못 되었는지를 확실하게 알 수 없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는 것이다.

 

☆ 지금은 정사인 삼국사기 기록이 옳을 것으로 보고 소벌도리를 경주최씨의 득성조라 하고, 지백호를 경주정씨의 득성조라 한다고 하는데, 만약 삼국사기가 틀렸고, 삼국유사가 옳다면 결과가 정반대로 나타나게 된다. 어느 기록이 옳다는 것이 명쾌하게 증명되지 않는 한 한마디로 누가 득성조인지 정확치 않다는 말이 된다.

 

다만 추측해 본다면,

삼국사기를 편찬하면서 잘못하여 성씨를 바꿔 잘못 기록했을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할 수 없다. 즉

“고허부는 사량부라 하고 성은 정씨요,

간진부는 본피부라 하고 성은 최씨요” 라고 했어야 하는데,

“고허부는 사량부라 하고 성은 최씨요,

간진부는 본피부라 하고 성은 정씨요” 라고 잘못 기록하였던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볼 수도 있다는 말이다.

 

☆ 반대로 삼국사기가 정확하고 삼국유사가 잘못 기록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리하여 그러한 상황을 알고 있던 일연이 삼국유사를 편찬하면서 앞서 잘못 기록된 삼국사기의 오기를 바로 잡을 의도를 가지고 진한 6부에 대하여 매우 자세하게 기록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삼국유사가 자산 진지촌을 언급하면서 지백호가 본피부 최씨의 조상이 되었고, 최치원이 곧 본피부 사람이며 옛 집터가 미탄사 남쪽에 있었다고 구체적으로 예까지 들어 놓았기 때문에 일연이 실수로 잘못 기록했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삼국유사의 기록이 옳다면 지금 소벌도리의 후손들은 정씨여야 하고, 지백호의 후손들은 최씨여야 하는 것인데, 현재는 최씨들이 소벌도리를 득성조로 받들고 있고, 정씨들이 지백호를 득성조로 받들고 있다고 한다.

과연 진실은 어떤 것일까?

만약 지금 두 성씨 최씨와 정씨가 득성조를 바꾸어 받들고 있는 것이라면?

그것 참......................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