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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신라 상대 왕위계승의 진실

윤여동 2012. 9. 2. 23:23

 

윤여동설 - 신라 상대 왕위계승의 진실

 

 

  삼국사기에는 신라 시조 혁거세거서간이 기원전 69년에 태어나 13세인 기원전 57년에 왕위에 올랐고, 재위 61년인 서기 4년 3월에 73세의 나이에 죽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그 뒤를 이어 혁거세거서간의 아들인 남해왕(남해차차웅)이 왕위를 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남해왕은 재위 21년인 서기 24년 9월에 죽고, 다시 그 아들인 유리왕이 왕위에 올라 재위 34년인 서기 57년 10월에 죽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신라 3대 유리왕과 4대 탈해왕은 처남매부사이였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므로 나이가 비슷하거나 동갑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탈해왕이 유리왕의 뒤를 이어 4대 왕위에 오른 때인 서기 57년에 나이가 62세였다고 하였다. 따라서 탈해왕의 출생년도는 기원전 5년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유리왕의 출생년도 역시 기원전 5년경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적용하여 1세대를 30년으로 보고 역산해 보면,

  혁거세거서간의 손자인 유리왕은 기원전 5년경에 태어나 서기 57년 62세로 죽었다고 할수 있고, 혁거세거서간의 아들 남해왕은 기원전 35년경 태어나 서기 24년에 59세의 나이에 죽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혁거세거서간은 기원전 57년 13세에 왕위에 올라 17세 때인 기원전 53년에 알영부인과 혼인을 하였다고 전한다.

  그렇다면 얼마 후 자식을 낳았을 것이다.

  만약 혁거세거서간의 나이 20세쯤에 첫아들을 낳았다고 가정하면 그 장자는 기원전 50년생쯤일 것이고, 손자는 기원전 30-25년쯤이면 출생이 가능하고, 다시 증손자는 기원전 5년쯤이면 출생이 가능해진다.

  그런데 삼국사기 기록 상 기원전 5년경에 태어난 사람은 혁거세거서간의 손자로 기록되고 있는 유리왕이다.

   따라서 필자는 3대 유리왕이 혁거세거서간의 손자가 아니라 증손자였을 가능성이 많을 것으로 본다.

 

  즉 혁거세거서간은 지금은 이름이 전해지지 않은 두 아들을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장자는 남해왕의 아버지였고, 또 다른 아들은 운제부인의 아버지 되는 사람으로 보인다.

  남해왕은 사촌여동생인 운제부인과 혼인을 하였던 것으로 생각되고, 이때부터 이미 신라왕실은 근친혼을 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 남해왕의 아버지는 혁거세거서간이 73세까지 오래 살았기 때문에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일찍 죽게 되었을 것인데, 그에게 다시 두 아들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장자는 남해왕이었고, 둘째아들은 일지갈문왕(日知葛文王)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남해왕은 그 할아버지 혁거세거서간의 뒤를 이어 신라의 2대 왕위에 올랐고, 두 아들과 딸 하나를 두었는데, 장자는 유리왕이고, 둘째아들은 나로, 딸은 아효였던 것으로 나타나고, 유리왕은 사촌여동생인 일지갈문왕의 딸과 혼인을 하였던 것으로 나타나고, 남해왕은 아효를 탈해와 혼인시켜 사위로 삼게 되어 석씨들도 왕족에 편입시키게 되어 3대 유리왕의 뒤를 이어 탈해가 신라 4대 왕위에 오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5대 파사왕에 대하여 삼국사기는,

  “유리왕의 둘째아들이다[혹은 유리의 아우 나로의 아들이라고도 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필자가 보기에 파사왕은 유리왕의 둘째아들일 수 없고, 유리왕의 동생 나로의 아들일 수도 없다.

  왜냐하면 유리왕의 출생년도는 탈해왕과 같다고 보여지는데, 3대 유리왕이 죽고난 후 바로 유리왕의 아들이 왕위를 이었던 것이 아니라 탈해왕이 62세에 다시 4대 왕위에 올라 재위 24년인 서기 80년 8월에 85세의 나이로 죽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5대 파사이사금은 왕위에 올라 재위 33년인 서기 112년 10월에 죽었다. 따라서 파사왕이 실제 유리왕의 둘째아들이었거나 유리왕의 동생 나로의 아들이었다면 그가 왕위에 오를 때 적어도 60세쯤은 되었을 것인데, 그때 왕위에 올라 33년을 재위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따라서 파사왕은 유리왕의 동생 나로의 증손자가 아닌가 싶고, 그 아들 6대 지마왕으로 왕위가 이어졌으나 아들이 없었다.

 

  그리하여 신라의 왕위는 일성왕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런데 또 삼국사기는 신라 7대 일성왕에 대하여 “유리왕의 장자이다[혹은 일지갈문왕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말도 안되는 기록이다.

  왜냐하면 유리왕이 죽은 해는 서기 57년이고, 일성왕은 왕위에 올라 재위 21년인 서기 154년에 죽었기 때문이다.

  죽은 연도로 보면 유리왕과 일성왕은 거의 1백년의 차이가 나는 것이다.

  따라서 일성왕은 유리왕의 아들이 될 수 없고 고손자쯤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후에도 신라의 왕위계승에 관한 기록은 매우 혼란스러워 전문가들도 진실을 찾아내기가 매우 어렵게 되어 있어 아직까지 아무도 완전한 신라왕위계승도를 완성하지 못하고 있는 것인데, 신라 초기 왕위계승의 진실을 밝히게 됨으로써 완전한 왕위계승도 작성을 향해 한발자국 조금 더 다가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