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신라 32대 효소왕의 실제 출생년도는 언제일까? - 최초주장
삼국유사 탑상 제4 대산 오만진신 편의 주를 보면,
“상고해 보면, 효조(孝照)를 효소(孝昭)라고도 했다. 천수3년 임진년(A.D.692)에 즉위했는데, 이때 나이 16세였고, 장안 2년 임인년(A.D.702)에 죽었으니 나이 26세였고, 성덕왕이 이 해에 즉위했으니 나이 22세였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것이 역사적 사실이라면,
신라 32대 효소왕(김이홍)의 출생년도는 서기 677년으로서, 30대 문무왕 17년이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문무왕이 죽고 그 아들인 31대 신문왕(김정명)이 왕위를 이은 때가 서기 681년이었으므로 이때 신문왕의 장자였던 김이홍(후일의 효소왕)의 나이는 5세였다.
그리고 다시 31대 신문왕이 재위 12년 째인 692년에 죽고, 32대 효소왕이 왕위를 잇게 되는데 이때 효소왕(김이홍)의 나이는 16세였고, 다시 효소왕이 재위 11년째인 702년에 26세의 나이로 죽게 되고, 당시 효소왕에게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효소왕의 동복동생인 22세의 33대 성덕왕(김흥광)이 왕위를 이었다고 할 수 있다.
☆ 화랑세기 필사본에는 문무왕비 자의왕후의 아버지인 선품이 608년에 태어나 643년에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딸인 자의는 628년쯤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을 것인데, 그녀가 태자시절의 법민(문무왕)과의 사이에서 낳은 첫아들이 소명태자로 기록되어 있는데, 일찍 죽은 것으로 되어 있고, 둘째아들이 정명(31대 신문왕)이었다.
그런데 삼국사기 신라본기 31대 신문왕 조를 보면,
신문왕이 김흠돌의 난에 연좌된 왕비 김흠돌의 딸 김씨를 폐출시키고, 다시 김흠운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인 때가 신문왕 3년인 서기 683년으로 되어 있고, 재위 7년(A.D.687)에 이르러서야 “봄2월 왕의 장자가 태어났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같은 책 32대 효소왕 조를 보면,
“효소왕이 왕위에 오르니 이름은 이홍(理洪, 洪을 恭이라고도 한다)이요, 신문왕의 태자이다. 어머니의 성은 김씨이니 신목왕후이며 일길찬 김흠운의 딸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효소왕 김이홍이 신문왕과 신목왕후 김씨 사이에서 태어난 장자였음을 알 수 있는데, 삼국유사에서 효소왕 김이홍이 태어났다고 하는 677년보다 무려 10년이 늦은 687년에야 태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과연 어느 기록이 역사적 사실인지 확실하게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지만, 만약 삼국유사의 기록이 옳다면, 신문왕이 태자시절이었던 675-676년경 이미 김흠운의 딸과 인연을 맺어 그 사이에서 677년에 장자인 김이홍(후일의 효소왕)을 낳았다는 말이 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문무왕이 왕자 김정명(후일의 신문왕)을 태자로 봉한 때는 문무왕 재위 5년인 서기 665년이었다.
☆ 원래 문무왕에게는 소명(昭明)이라는 큰 아들이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문무왕이 왕위에 오른 해인 661년에 소명을 태자로 봉했을 것인데, 665년경에 요절하여 둘째아들 정명(政明)을 다시 태자로 봉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문무왕의 출생년도는 서기 626년이었으므로 645년쯤에는 혼인을 하였을 것이므로 그 아들인 김정명(후일의 신문왕)의 출생년도는 서기 650년경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따라서 그 아버지인 문무왕이 왕위에 오른 661년 이후인 670년쯤에 김정명은 태자의 위치에 있었고, 혼인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을 것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신문왕이 태자시절 혼인했던 첫 부인은 김흠돌의 딸 김씨였다.
그리고 삼국사기 신라본기 신문왕 조를 보면,
“신문왕의 왕비는 김씨이니 소판 흠돌의 딸인데, 왕이 태자가 되었을 때에 혼인을 하였으나 오래도록 아들이 없었고, 뒤에 그 아버지(김흠돌)의 반란에 연좌되어 출궁당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김흠돌은 젊은 시절 자의를 첩으로 삼으려다가 실패했던 적이 있었고, 자의가 문무왕이 태자시절에 태자비가 되자 그녀를 태자비에서 폐해야 한다고 험담을 하고 다녔던 인물이었는데, 자신이 그렇게도 험담을 하고 다녔던 문무왕비 자의왕후의 아들인 김정명이 신라의 태자가 되자 자신의 딸과 혼인시켰다는 말이 된다.
솔직히 자의왕후의 입장으로서는 김흠돌의 딸을 태자비로 맞아들이기 싫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이 아들과 혼인시키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인데, 왜냐하면 이때까지 김유신도 살아 있었고 또한 시어머니였던 문명태후도 살아 있었으며, 김흠돌은 곧 이들의 조카였기 때문이다.
이는 태자인 김정명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감히 김유신이나 태종무열왕비 문명태후의 의사에 반하는 행동을 한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어쩔 수 없이 혼인을 하기는 했지만 태자 김정명은 김흠돌에 대한 반감으로 오랫동안 그 딸의 침소를 찾지 않았던 듯하다. 김흠돌의 딸 입장에서는 아들을 낳아야 하는데, 맨날 독수공방을 해야 했을 것이다.
하늘을 볼 수 없으니 별을 딸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태자인 김정명(후일의 신문왕)은 이때 사랑을 나누던 여인이 따로 있었던 듯하다.
바로 김흠운의 딸 김씨였을 것이고, 이 여인이 677년에 이르러서는 태자 김정명의 장자인 김이홍(후일의 효소왕)을 낳게 되는 것이다.
☆ 김흠운의 딸은 신문왕비 신목왕후인데, 원래는 신문왕의 죽은 형 소명태자와 혼인을 약속했던 여인이었으나, 소명태자가 요절하는 통에 혼인도 하지 못하고 홀로 소명궁에서 살던 여인이었다. 신문왕은 형수가 될 뻔했던 여인을 왕비로 맞아들였던 것이다.
그러자 태자 김정명은 자신의 아들을 낳은 김흠운의 딸을 두 번째 태자비로 맞아들이려고 했을 것이고, 김흠돌이나 그 딸은 그에 반대했을 것이다.
그렇게 태자 정명과 김흠돌의 감정은 점점 악화되어 갔고, 681년에 이르러 문무왕이 죽고 태자였던 김정명(신문왕)이 왕위에 올라 김흠돌의 딸을 왕비에서 폐하고 김흠운의 딸을 왕비로 삼으려 하자 드디어 김흠돌이 반란을 일으키는 것이고, 신문왕이 그 난을 평정하고는 기어이 김흠운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이는 것이라고 한다면 김흠돌의 난이 일어난 역사적 배경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사실이 이러하다면 신문왕비 신목왕후가 낳은 아들 즉 장자인 효소왕 이홍과 차자인 성덕왕 흥광의 원래 출생년도는 삼국사기의 기록보다 훨씬 앞설 수 있고, 김흠운의 딸 신목왕후 김씨는 궁 밖에서 두 아들을 낳은 후에야 뒤늦게 왕후가 되어 왕궁으로 들어왔다고 생각해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신문왕 3년(A.D.683) 조에,
“봄2월에 순지로 중시를 삼았다. 일길찬 김흠운의 딸로 부인을 삼기로 하고 먼저 이찬 문영과 파진찬 삼광을 보내 기일을 정하고 대아찬 지상을 보내어 납채를 하였는데, 폐백이 15들것이요, 쌀, 술, 기름, 꿀, 간장, 된장, 포, 젓갈이 135들것이요, 벼가 150수레였다”
“ 5월7일에 이찬 문영과 개원이 김흠운의 집으로 가서 부인 책봉을 하고 그날 묘시에 파진찬 대상과 손문과 아찬 좌야와 길숙 등을 각각 그들의 아내와 딸 그 외에 양부와 사량부 두 부의 여자 각 30명씩을 함께 보내어 맞아오게 하였다.
부인이 수레를 탔는데, 좌우에 시종하는 관원들과 들러리들이 매우 장관이었다. 왕궁 북문에 이르러 부인이 수레에서 내려 궁궐 안으로 들어왔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만약 삼국유사의 기록이 옳다면, 이 김흠운의 딸 신목왕후는 궁 밖에서 첫 아들을 677년에 낳았고, 681년에 둘째 아들을 낳은 후인 683년 5월 7일에 이르러서야 왕후가 되어 임궁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년표]
645년 김법민(후일의 문무왕 20세) 혼인 추정년도[필자추정]
646년
647년
648년
649년
650년 김정명(후일의 신문왕) 출생 추정년도[필자추정]
651년
652년
653년
654년
655년
656년
657년
658년
659년
660년 백제멸망[삼국사기]
661년 태종무열왕(59세)이 죽고 30대 문무왕(36세)이 왕위계승[삼국사기]
662년
663년
664년
665년 김정명(후일의 신문왕) 태자 책봉(약15세)[삼국사기]
666년
667년
668년 고구려 멸망[삼국사기]
669년
670년 태자 김정명(약20세) 김흠돌의 딸과 혼인(필자추정)
671년
672년
673년 김유신 졸(7월1일)[삼국사기]
674년
675년
676년
677년 신문왕 장자 김이홍(후일의 효소왕) 출생[삼국유사]
678년
679년
680년
681년 문무왕(56세)이 죽고 31대 신문왕(약 32세정도) 왕위계승[삼국사기]
김흠돌의 난 발생(8월)[삼국사기](삼국사기에는 이로 인하여 김흠돌의 딸이었던 신문왕비 김씨가 폐출 되었다고 했음)
신문왕 차자 김흥광(후일의 성덕왕) 출생[삼국유사]
682년
683년 김흠운의 딸(신목왕후)을 새로운 왕비로 책봉(2월)[삼국사기]
(삼국사기 기록대로라면 효소왕과 성덕왕은 이 후에 출생해야 마땅한 데, 삼국유사에는
효소왕이 677년생, 성덕왕이 681년생이라 했음)
684년
685년
686년
687년 신문왕 장자 김이홍(후일의 효소왕) 출생[삼국사기]
688년
689년
690년
691년 신문왕 장자 김이홍(5세) 태자 책봉(3월1일) [삼국사기]
692년 신문왕이 죽고 효소왕(16세) 왕위계승[삼국유사]
신문왕이 죽고 효소왕(6세)이 왕위계승[삼국사기]
693년
694년
695년
696년
697년
698년
699년
700년
701년
702년 효소왕(26세)이 죽고 동복동생인 성덕왕(22세)이 왕위계승[삼국유사]
효소왕(16세)이 죽고 동생인 성덕왕 김흥광이 왕위계승[삼국사기]
703년
704년 5월에 성덕왕이 김원태의 딸(엄정왕후)을 왕비로 책봉[삼국사기]
705년
706년
707년
708년
709년
710년
711년
712년
713년
714년 왕자 김수충을 당나라에 숙위보냄[삼국사기][효소왕의 유복자]
715년 왕자 김중경 태자 책봉[엄정왕후 소생]
716년 효소왕비 성정왕후를 궁 밖으로 내 보냄
717년 6월에 태자 중경 요절[효상태자]
이때 성덕왕의 첫 왕비 엄정왕후도 함께 죽은 것으로 보이는데, 정변이 있었거나 사고사로 보임.
9월 효소왕의 유복자 왕자 김수충 귀국
718년
719년 성덕왕이 김순원의 딸(소덕왕후)을 왕비 책봉
(성덕왕이 엄정왕후와 태자 중경이 죽자 새로이 왕후를 맞아들인 것이라 판단됨)
72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