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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북연 용성(龍城 : 和龍宮)의 위치찾기

윤여동 2013. 4. 6. 10:21

 

윤여동설 - 북연 용성(龍城 : 和龍宮)의 위치찾기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장수왕 23년(A.D.435) 조를 보면,

  “위(북위)가 연(북연)을 수차 정벌하니 연나라는 날로 위험이 더했다. 연왕(북연왕 풍홍)이 상서 양이를 우리나라에 비밀리에 보내 말하기를 ‘만약 사태가 급하게 되면 동쪽으로 고구려에 의탁하고 있다가 후일을 도모하겠다’ 하면서 자신을 받아줄 것을 청하였다”고 기록되어 있고,

  같은 책 장수왕 24년(A.D.436) 조를 보면,

  “여름4월 위(북위)가 연나라(북연)의 백랑성(白狼城)을 공격하여 이겼다. 왕이 장수 갈로와 맹광으로 하여금 군사 수만명을 거느리고 연나라 사신 양이를 따라 화룡(북연의 도읍 용성의 화룡궁)으로 가서 연의 임금(북연의 왕 풍홍)을 맞아오게 하였다..............(중략.................

  5월 연나라 임금(풍홍)이 용성의 백성들을 인솔하여 동쪽으로 옮기고 궁전(화룡궁)에 불을 지르니 불이 열흘 동안이나 꺼지지 않았다.

  부녀자들에게 갑옷을 입혀 복판에 서게 하고, 양이 등은 군사들을 정비하여 가장자리에 서게 한 다음 갈로와 맹광은 기병을 거느리고 맨 뒤에 서서, 수레를 줄세워 나아가니 앞뒤가 80여리에 뻗쳤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북연이 멸망할 때의 전후 사정을 비교적 상세하게 전해주고 있다.

 

☆ 자치통감 권123 송기5 태조문황제중지상 원가 13년(A.D.436) 조를 보면, 삼국사기의 기록과 동일한 내용이 더욱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그 내용 중에는 북위에서 아청과 고필이라는 장수를 보내 백랑성을 공격해서 이겼고, 고구려군사들이 북연왕 풍홍을 비롯한 용성백성들을 이끌고 가자 북위 고필의 부장 고구자가 기병을 거느리고 추격하려고 하였으나 고필이 술에 취해 칼을 뽑아 막았다는 기록도 있고, 그러자 북위 태무제가 고필과 아청을 용성으로 잡아들여 삭탈관직하고 문졸로 만들었다는 기록도 있는데, 이때 고구려군사들이 수만명이나 되었기 때문에 뒤쫓을 수 없었다고 판단된다. 이때 북위군은 풍홍이 백성들을 이끌고 고구려로 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위 기록에 나타나는 북연의 도읍 용성(화룡성)의 위치에 대하여 그 위치가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었다.

  그리하여 백랑성이 도대체 어디에 위치하고 있었기에 백랑성이 함락되자 고구려의 장수왕이 북연이 곧 멸망할 것이라 판단하고 급히 군사를 북연의 도읍인 용성(화룡)으로 보내 북연왕 풍홍을 맞아오게 했는지 설명하기가 곤란했었다.

  그런데 찾고보니 436년 당시 북위의 도읍은 평성(平城 ; 현 산서성 대동부근)이었고, 북연의 도읍 용성(龍城)은 바로 지금의 북경 방산 부근으로 비정된다.

   자치통감을 보면, 장수왕은 435년 11월에 연왕 풍홍의 망명 요청을 받자 화룡성 동쪽 임천(臨川)이라는 곳에 고구려 군사들을 미리 주둔 시켜 두었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의문을 해소시켜 준다.

  그리고 기록을 보면 연나라 상서령 곽생은 성문을 열고 북위군을 맞아들이려고 하였으나 북위군이 의심하여 성안으로 들어오지 않자, 곽생이 연왕을 공격하였으나 연왕은 동쪽성문을 열어 고구려군을 성안으로 끌어들여 곽생이 이끄는 군사들과 궁궐 아래에서 싸웠고, 이 전투에서 곽생은 화살에 맞아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이때의 긴박했던 상황을 그려볼 수 있고, 이때 북연의 대신들은 친북위파와 친고구려파로 갈려 있었던 듯하다.

  그런데 결국 고구려군의 지원을 받은 친고구려파가 승리하게 되어 풍홍이 고구려로 망명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결국 풍홍은 고구려 북풍에서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북위군에게 잡혔어도 어차피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이긴 했지만..............

  이렇게 지금까지 그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었던 북위의 도읍 평성과 북연의 도읍 용성(화룡)을 찾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