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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신라 김알지와 김허루갈문왕은 무슨 관계였을까? - 최초주장

윤여동 2013. 10. 28. 07:13

 

윤여동설 - 신라 김알지와 김허루갈문왕은 무슨 관계였을까? - 최초주장

 

                                                                 

 

  삼국사기 신라본기 4대 탈해이사금 9년(A.D.65) 조를 보면,

  “봄 3월에 왕이 밤에 금성 서쪽 시림의 나무 사이에서 닭 우는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날이 새자 호공을 보내 보았더니 나뭇가지에 조그만 금궤가 걸려 있었고, 흰 닭이 그 아래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이 돌아와 그대로 보고하자 왕이 사람을 시켜 궤를 가져다가 열었더니 어린 사내아이가 그 속에 들어 있었는데, 자태와 용모가 기이하고 위엄이 있었다.

  왕이 기뻐하여 좌우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이것이 어찌 하늘이 나에게 아들을 주시는 것이 아니겠느냐?’하고는 곧 거두어 길렀다.

  그가 자라매 총명하고도 지략이 많았으므로 이름을 알지(閼智)라고 하고 그가 금궤에서 나왔다하여 성을 김(金)씨로 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의 기록대로라면 김알지의 출생년도는 서기 65년이고, 신라 김씨의 시조라 할 수 있다.

 

☆ 삼국유사에는 김알지의 출생년도를 삼국사기보다 5년이 빠른 서기 60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같은 책 5대 파사이사금 원년(A.D.80) 조를 보면,

  “(파사이사금의) 왕비는 김씨(金氏) 사성부인(史省夫人)이니 허루갈문왕의 딸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우리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 삼국유사에는 파사이사금의 왕비가 “김씨 사초부인(史肖夫人)이라 기록하고 있는데, 글자형태가 비슷하여 빚어진 결과일 것이고, 또 3대 유리이사금 조를 보면, “유리왕은 남해왕의 태자이다. 어머니는 운제부인이요, 왕비는 일지갈문왕의 딸이다[혹은 왕비의 성은 박씨로서 허루왕의 딸이라고도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신라에 유리왕대의 박허루라는 사람과 파사왕대의 김허루라는 사람이 따로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동명이인으로 보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서기 65년에 태어났다는 신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가 16세에 지나지 않았을 때인 서기 80년에 성장한 딸을 두어 파사이사금에게 시집보낼 수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의 기록대로라면 신라에는 김알지를 시조로 하는 김씨 이외에 또 다른 김씨 즉 허루갈문왕 김씨가 속해 있는 김씨들이 김알지 출생이전부터 이미 신라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말이 되고, 왕비를 배출할 수 있을 정도로 상당한 지위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위 기록이 사실이라면 김알지는 신라 김씨의 시조라 할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그런데 아래 글을 읽어보자.

  아래 글은 필자가 본 블로그에 1년 전에 올렸던 글인데 일단 읽어 본 후에 이야기를 풀어가는 것이 좋을 듯하다.

 

『윤여동설 - 탈해왕과 김알지의 숨겨진 관계

  삼국사기 탈해왕 조를 보면,

  “탈해는 본래 다파나국에서 태어났는데, 이 나라는 왜국 동북쪽 1천여리에 있었다. 앞서 다파나국왕이 여국왕(여인국왕)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내를 삼았더니 임신한 지 7년 만에 큰 알을 낳았다. 왕이 말하기를 ‘사람으로서 알을 낳았으니 상서롭지 못하다. 마땅히 버려야 한다’하였다.

  그 어머니가 차마 버리지 못하고 비단으로 알과 보물을 함께 싸서 궤 속에 넣어 바다에 띄워 보냈다.

  그랬더니 처음에는 금관국 해변에 닿았으나 금관국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겨 주워들이지 않았고, 다시 진한(신라) 아진포구에 닿았다.....................때마침 해변에 사는 늙은 노파가 있어 궤를 열어 보니 웬 어린아이 하나가 들어 있었다. 그 노파가 이를 가져다 길렀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신라 4대 탈해왕이 다파나국왕과 여국왕의 공주 사이에서 출생한 왕자이었음을 알 수 있고 다파나국이 왜국의 동북쪽 1천여리쯤에 위치한 나라였음을 알게 한다.

  그렇게 탈해는 신라에 오게 되었고, 신라에서 살게 되었다.

  그리고 삼국유사 제4대 탈해왕 조를 보면,

  탈해가 토함산에 올라가 성안에 살만한 곳을 살펴 보았더니 산봉우리 하나가 마치 초사흘달 모양으로 보이는 곳이 있어 오래 살만한 곳이라 생각되었다. 그리하여 그곳을 찾아가 보았더니 바로 호공(瓠公)의 집이었다.

  탈해는 그곳에 몰래 숫돌과 숯을 묻어 놓고는 다음날 아침 그 집에 가서 “이 집은 우리 조상들이 살던 집이요” 라고 소리쳤다.

  그러자 호공은 그렇지 않다고 하여 다투게 되어 관청으로 가서 시비를 가리게 되었는데, 관리가 묻기를 “이 집이 네 집이라는 것을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느냐?” 하자 탈해가 대답하기를 “우리 조상은 원래 대장장이였습니다. 잠시 이웃 마을에 간 동안에 다른 사람이 빼앗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집 땅을 파보면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하였다.

  그리하여 그 집 땅을 파 보았더니 과연 숫돌과 숯이 나왔으므로 탈해가 그 집을 빼앗아 살게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마디로 탈해는 두뇌가 비상한 아니 약간은 사기성도 있어 보이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사실이 신라 남해왕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때 호공이라는 사람은 신라의 고관이었는데, 그러한 사람이 나이어린 탈해에게 꼼짝 못하고 집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남해왕은 탈해가 지혜로운 사람이라 생각하고는 큰 딸을 주어 아내를 삼게 하였다.

  이렇게 탈해는 신라 남해왕의 부마가 되었고, 후일 신라의 왕위에도 오르게 된다.

  그런데 삼국사기 탈해왕 9년 조를 보면,

  “봄3월에 왕이 밤에 금성 서쪽 시림의 숲속에서 닭우는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새벽에 호공을 보내 살펴보았더니 나뭇가지에 자그마한 금궤가 걸려 있었고, 흰 닭이 그 아래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이 돌아와 그대로 보고하였다. 왕이 사람을 시켜 궤를 가져다 열어 보았더니 사내아이가 들어 있었는데, 용모가 준수하고 위엄이 있었다.

  왕이 기뻐하여 측근에게 말하기를, ‘이것이 어찌 하늘이 나에게 아들을 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고는 거두어 길렀다. 그가 자라매 총명하고도 지략이 많았으므로 이에 알지라 이름 짓고 그가 금궤에서 나왔다 하여 성을 김씨라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어 김알지가 탈해왕의 양자가 되었음을 알 수 있고,

  삼국유사 김알지 탈해왕대를 보면,

  “탈해왕은 길일을 가려 알지를 태자로 책봉했는데 뒤에 태자의 자리를 파사왕(박씨)에게 물려주고 왕위에 오르지 않았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알지가 탈해왕의 태자로 봉해지기도 했었음을 알게 한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드는 것은 탈해왕에게는 알지와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구추라는 아들이 있었다.

 

☆ 삼국사기 벌휴이사금 조를 보면, “벌휴이사금은 탈해이사금의 아들 구추 각간의 아들이다(필자주 : 실제는 5세손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탈해왕에게 구추라는 친아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구추는 탈해왕과 남해왕의 딸 아효부인 사이에서 출생했을 탈해왕의 장남으로서 벼슬이 각간에까지 이르렀기 때문에 역사에서   구추 각간이라 하는 인물인데, 이상하게도 탈해왕은 자신의 친아들 구추를 태자로 봉했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으나, 누가 보아도 양아들로 볼 수밖에 없는 알지를 태자로 봉했다는 기록은 존재한다.

  탈해왕은 왜 자기의 친아들이 아닌 양아들인 알지를 태자로 봉해야만 했던 것일까?

  혹시 알지가 탈해왕의 실제적인 친아들로서 장자였던 것은 아니었을까?

  혹시 탈해는 남해왕의 딸과 혼인하기 전에 궁중 밖에 사랑했던 여인이 따로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런데 남해왕이 딸을 주고 탈해를 부마로 삼게 되어 탈해는 사랑하던 여인 곁을 떠나 궁중에 들어가 살아야 했을 것인데, 그 첫사랑 여인이 궁 밖에서 탈해의 아들을 낳았던 것은 아닐까?

  그리하여 소식을 전해들은 탈해는 그 아들을 아무 무리없이 궁중으로 데려올 방법을 궁리하게 되었던 것은 아닐까?

  즉 탈해는 그 여인으로 하여금 한 밤중 아무도 모르게 왕궁에서 가까운 시림(계림) 숲속에 알지를 금궤에 넣어 걸어 놓게 하고는, 호공으로 하여금 아침 일찍 시림으로 가보게 하였고, 호공은 그곳에서 금궤를 발견하게 되며, 호공이 상황을 보고하자 탈해가 직접 그곳으로 가서 금궤를 열고 그 어린아이를 궁중으로 데리고 들어와 하늘이 주신 아들이라 하면서 양아들로 삼는다면 어느 누구도 그 행위에 대하여 의심을 할 수 없을 것이고, 반대할 수도 없을 것이다.

   조선시대에도 밖에서 낳은 자식을 자기집 대문 앞에 놓고 가게하고는 하늘이 주신 자식이라 하면서 업동이로 들여 자신의 자식으로 삼는 경우가 가끔 있었는데, 이와 유사한 방법이라 하겠다.

  이것이 역사적 사실일 경우 탈해가 알지를 얻었을 때 측근 사람들에게 왜 알지를 하늘이 주신 자식이라 말하면서 거두어 기르게 되었는지, 왜 그를 태자로 봉하게 되었는지 이해가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탈해는 알지에게 자신의 성씨인 석씨 성을 붙일 수는 없었다.

  많은 사람들의 이목이 있었기 때문에 석씨와는 다른 "김(金)"씨 성을 붙여주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석구추와 김알지는 모두 탈해의 혈통을 이어받았으나 어머니만 달랐다고 할 수 있다.

즉 구추는 탈해와 남해왕의 딸 아효부인 사이에서 태어났고, 알지는 탈해와 어느 이름 모를 여인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이 이러할 경우 알지는 혈통을 알 수 없는 사람이 아니라 탈해의 친아들로서 원래 왕족이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결국 신라 초기 박씨들이 왕위에 오른 시기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시기를 탈해왕의 혈손들이 신라를 지배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 위 글은 역사적 인물인 석탈해왕과 김알지에 대하여 그 둘의 관계를 추정해 본 것일 뿐, 특정 성씨와는 관련이 없음을 밝혀둡니다.

 

  그런데 만약 위 글이 역사적 사실로서 탈해(B.C.5년생)가 남해왕의 부마가 되기 전 왕궁 밖에서 살 때 사랑했던 여인이 따로 있었고,

  20세쯤에 아들인 김알지를 낳았다고 가정할 경우,

  김알지의 출생년도는 서기 15년쯤이 될 수 있고, 김알지가 자라 혼인을 하여 20세(A.D.34)쯤에 아들을 낳았고, 다시 김알지의 아들이 자라 혼인을 하여 20세(A.D.53)쯤에 딸을 낳았다면 그 딸 즉 김알지의 손녀 딸은 파사이사금이 왕위에 오른 서기 80년에 28세쯤이 될 수 있다.

  따라서 허루갈문왕 김씨를 김알지의 아들로 보면,

  그의 이름은 바로 김세한(金勢漢)이라는 인물과 동일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고, 신라 5대 파사이사금의 왕비인 허루갈문왕의 딸 사성부인 김씨는 김알지의 손녀 딸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 미추이사금 조를 보면, 알지가 세한을 낳고, 세한(勢漢)이 아도를 낳고, 아도가 수류를 낳고, 수류가 욱보를 낳고, 욱보가 구도를 낳으니.......”라고 기록되어 있어 김알지의 아들이 김세한(金勢漢) 임을 알게 하는데 삼국유사에는 김열한(金熱漢)이라 하였다. 글자 형태가 비슷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삼국유사에서 김알지를 태자로 봉했다거나, 삼국사기에서 대보로 삼았다거나 하는 기록들이 나타나는데, 만약 김알지가 서기 15년생이라면 탈해왕이 62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을 때인 서기 57년에 김알지의 나이는 43세쯤이 된다. 태자로 봉하던 대보로 봉하던 충분한 나이라 할 수 있을 것인데, 그가 죽은 연도는 직접 역사에 나타나지 않고, 다만 삼국유사에 “그는 태자의 자리를 파사왕에게 물려주고 왕위에 오르지 않았다”는 기록만 전하고 있다. 만약 파사왕이 왕위에 오른 때인 서기 80년까지 김알지가 살아 있었다면 이때 김알지는 66세가 되는데, 위 기록들을 종합하여 판단해 보면, 김알지가 탈해왕 재위(A.D.57-80) 중에 탈해왕보다 먼저 죽었기 때문에 손녀사위인 박씨 파사왕이 신라의 왕위를 이은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이로서 김알지의 실제 출생년도를 추정해 볼 수 있고, 김허루갈문왕과 그의 딸로서 파사이사금의 왕비가 되었던 김씨 사성부인의 신분을 유추해 볼 수 있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김알지는 서기 15년경에 출생했을 것이고, 허루갈문왕은 김알지의 아들인 김세한(혹은 김열한이라고도 한다)으로 추정해 볼 수 있으며, 파사왕의 왕비 김씨 사성부인은 김알지의 손녀 딸이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신라 초기인 이때부터 김알지를 시조로 하는 김씨 가문은 왕비를 배출하기 시작함으로써 신라 왕실의 세 성씨 즉 박씨․석씨․김씨의 일원이 되었던 것이고, 결국 후일 김알지의 후손들이 신라의 왕위에 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 6대 지마이사금 조를 보면,

“지마이사금이 왕위에 오르니 파사왕의 적자이다. 어머니는 사성부인(필자주 : 김씨 허루 갈문왕의 딸)이요, 왕비는 김씨 애례부인이니 갈문왕 마제의 딸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대를 이어 김씨들이 신라의 왕비가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김허루갈문왕과 김마제갈문왕은 모두 김알지의 후손으로서 삼촌(김허루갈문왕)과 조카(김마제갈문왕)사이로 보이는데, 태자비 자리를 놓고 각각의 딸을 내세워 경쟁한 것으로 보인다.

즉 당고모와 5촌 조카사이에 지마태자비 자리를 놓고 경쟁하다가 결국 조카가 태자비가 된 경우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