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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고구려 5부의 진짜 위치 -최초공개

윤여동 2014. 1. 26. 00:29

윤여동설 - 고구려 5부의 진짜 위치 - 최초공개

 

  

  고구려에는 5부족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후한서 고구려전을 보면,

  “고구려에는 5부족이 있는데, 소노부(消奴部) · 절로부(絶奴部) · 순노부(順奴部) · 관노부(灌奴部) · 계루부(桂婁部)이다. 본래는 소노부에서 왕이 되었으나 점점 미약해진 뒤에는 계루부에서 왕위를 대신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삼국지 고구려전을 보면,

  “고구려에는 본래 5부족이 있는데, 연노부(涓奴部) · 절로부 · 순노부 · 관노부 · 계루부이다. 원래 연노부(涓奴部)에서 왕이 되었으나 점점 미약해져 지금은 계루부에서 대신한다................연노부는 본래 나라의 주인이었으므로 비록 지금은 왕이 되지 못하나, 그 적통의 대를 이은 사람은 고추가의 칭호를 얻었으며, 종묘에 나아갈 수 있고, 영성과 사직에 제사지낼 수 있다.

  절로부는 세습하여 왕과 혼인을 하였으므로 고추가의 칭호를 더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삼국지는 서기 270-280년경에 편찬된 역사서이고, 후한서는 5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역사서이다.

  후한서가 삼국지보다 오히려 늦게 만들어졌다. 따라서 삼국지의 기록은 서기 270-280년 이전 고구려 상황을 기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고구려 왕위계승을 보면, 건국시조인 추모왕(주몽왕)으로부터 2대 유리왕, 3대 대무신왕, 4대 민중왕, 5대 모본왕까지는 주몽왕의 친혈손으로서 해(解)씨였으나,

  6대 태조대왕(국조왕이라고도 한다)으로부터는 주몽왕의 딸이 시집가 낳은 외손의 후예로서 유리왕의 양자가 되었던 고추가 재사(再思)의 혈손으로서 고(高)씨였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를 보면, 주몽이 동부여에서 도망쳐 졸본으로 가다가 모둔곡[위서에는 보술수에 이르렀다고 하였다]에 이르러 재사(再思), 무골(武骨), 묵거(默居)를 만나 재사에게는 극(克)씨, 무골에게는 중실(仲室)씨, 묵거에게는 소실(少室)씨를 주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기록 속의 재사는 후일 유리왕의 양자로서 6대 태조대왕의 아버지로 기록되어 있는 재사와는 다른 사람이다. 왜냐하면 재사의 후손인 태조대왕의 성씨가 고(高)씨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리왕이 양자로 삼은 고재사의 정확한 신분은 주몽왕(추모왕)이 동부여에서 졸본으로 도망쳐 온 후 졸본부여 왕의 둘째 공주와 혼인을 했었는데, 이때 딸을 하나 낳았던 듯하다. 그리하여 이 딸이 자라서 구려 호족인 고여달에게 시집가서 낳은 아들의 후손이 고재사였던 것으로 보이고, 유리왕 말년에 막내아들 여진이 비류수 강물에 빠져 죽은 뒤 여진과 같은 또래인 고재사를 양자로 받아들였고, 이가 곧 고구려 6대 태조대왕의 아버지인 재사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재사가 유리왕의 친아들이 아니라 양자였으므로 엄격하게 보면 고구려는 해(解)씨와 고(高)씨 두 성씨로서 왕위가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할 때, 고구려는 시조인 주몽왕으로부터 5대 모본왕까지가 친손으로서 해씨였고,  소노부(연노부) 출신이었고,

  6대 태조대왕으로부터 그 이후의 왕들은 외손으로서 고씨였고, 계루부 출신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고구려 왕비에 대한 기록을 보면,

  시조 주몽왕은 동부여에 있을 때 예씨라는 여인과 혼인을 하였었고, 동부여에서 졸본으로 도망쳐 온 뒤에는 졸본부여의 둘째공주와 혼인을 하였고, 또 졸본호족 연타발의 딸로서 아들 둘 딸린 과부였던 소서노와도 혼인을 하였었다고 하고,

  2대 유리왕은 비류국왕(고구려에 복속한 후에는 다물후, 다물국왕으로 불렀다) 송양의 두 딸을 제1비와 제2비로 맞아들였고, 골천호족의 딸과 한나라 사람의 딸을 계실로 맞아들이기도 하였다.

  3대 대무신왕의 어머니는 유리왕의 제2비였던 송양의 딸이다. 대무신왕의 원비(元妃 : 첫왕비)에 대한 기록은 구체적으로 나타나지 않고 있어 그녀의 출신지가 어디인지 확실히는 알 수 없으나 모본지역 호족의 딸로 추정된다.

  그리고 두번째 왕비는 갈사왕의 손녀로서 대무신왕과 혼인하여 호동왕자를 낳았으나 원비의 모함을 받아 호동왕자가 죽게 되어 소생을 남기지 못했던 듯 하다.

  4대 민중왕과 대무신왕은 동복형제로서 어머니는 유리왕의 제2비 송양의 딸이었으나 왕후에 대한 기록은 역사에 나타나지 않고,

  5대 모본왕의 어머니는 대무신왕의 원비로 보이는데, 왕후에 대한 기록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런데 모본왕이 죽고 나서 모본원(慕本原)에 장사 지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모본왕 역시 그 어머니의 친정인 모본지역 호족의 딸과 혼인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따라서 5대 모본왕까지는 어느 한 지역의 여인을 왕비로 맞아들이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후한서나 삼국지의 기록을 보면, “절로부가 세습하여 왕과 혼인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6대 태조대왕의 이름은 고궁이었다. 유리왕의 양자였던 고재사의 장자로서 해씨인 유리왕의 직계 후손들과는 혈통이 다르다.

  유리왕의 손자였던 5대 모본왕이 폭정을 일삼자 사람들이 그를 제거하고 재사의 큰 아들인 궁을 왕위에 올렸는데, 이가 바로 태조대왕이다. 그는 7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고, 그 어머니는 부여사람(扶餘人)이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어린 태조대왕이 왕위에 오르게 되자 아들이 성장할 때까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어린 태조대왕은 그 어머니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므로 그 어머니가 정해 준 부족(절노부였을 것이다)의 여인과 혼인 하였을 가능성이 많고, 그 이후 고구려의 많은 왕들이 절로부의 여인을 왕후로 맞아들였기 때문에 세습하여 왕비를 배출했다고 기록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9대 고국천왕의 왕비는 제나부(提那部 : 涓奴部=消奴部=西部) 우소(于素)의 딸로서 우씨였고,

  10대 산상왕의 왕후 역시 우소의 딸 우씨로서 산상왕은 죽은 형의 부인을 다시 왕비로 받아들였고, 또 소후로서 주통촌 여인이 있었다.

  11대 동천왕의 어머니는 산상왕의 소후였던 주통촌여인이었고,  왕비에 대해서는 기록에 나타나지 않으나, 후궁으로서 동해(동옥저로 추정됨) 사람이 바친 미녀가 있었다.

  그리고 12대 중천왕의 왕비는 연씨(掾氏: 출신을 알 수 없다)였고, 관나(貫那 : 灌奴部 = 南部)부인이 있었다.

  13대 서천왕의 왕비는 서부(西部 = 消奴部) 대사자 우수(于漱)의 딸로서 우씨였는데 서부란 소노부(연노부)를 말하는 것이다.

  이를 보면 태조대왕 이후에도 연노부(소노부) 여인들이 고구려의 왕비가 되고 있고, 또 관노부 여인도 왕비는 아니라도 후궁으로 맞아들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고구려에서는 삼국지나 후한서의 기록처럼 절로부의 여인 만을 왕비로 맞아들였던 것은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삼국지 권30 위서30 오환선비동이전 제30 고구려 전의 주를 보면, 계루부(내부, 황부), 절노부(북부, 후부), 순노부(동부), 관노부(남부,전부), 소노부(서부, 우부)"라 되어 있고, 신당서 권220 열전제145 동이 고려(고구려)전에도, 계루부(내부, 황부), 절로부(북부,후부), 순노부(동부,좌부), 관노부(남부,전부), 소노부(서부)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한원 고구려 조에도 위략의 기록을 인용하여, 계루부(내부,황부,황부), 절로부(북부,후부,흑부), 순노부(동부,좌부,상부,청부), 관노부(남부,전부,적부), 소노부(서부,우부)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림으로 그려보면 5부의 위치를 아래와 같이 그려볼 수 있다.

 

                                                             북부

                                                          (절로부)

 

 

 

                       서부                                황부                              동부

                     (소노부)                          (계루부)                          (순노부)

 

 

 

                                                             남부

                                                           (관노부)

 

 

  비류국지역은 소노부(연노부)로서 서부(우부)가 되었고,

  국내성 부근은 계루부로서 황부(내부)라 하였으며,

  환도성 부근은 순노부로서 동부(혹은 좌부)가 되었다.

  그리고 세습하여 왕비를 배출했던 절로부는 옛 북부여 땅으로서 북부(후부)가 되었으며,

  관노부는 남쪽에 위치하여 남부(전부)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위 지도 참조]

 

  그리하여 고구려 초기에는 왕을 배출했던 졸본지역과 왕비를 배출했던 비류국(옛 송양의 나라)이 속해 있던 소노부(연노부:서부)가 정치의 중심세력이었다가,

  혈통이 다른 6대 태조대왕이 왕위에 오르면서부터는 왕을 배출하는 황부즉 국내성 부근의 계루부와

세습하여 왕비를 배출했던 북부(옛 북부여) 즉 절노부가 고구려 정치의 중심세력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