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수 양제 고구려 침공시의 좌12군 우12군 기록의 진실 - 최초주장
수 양제 고구려 2차 침공 기록을 보면,
611년 여름 4월 “(수) 양제의 행차가 탁군의 임삭궁에 이르니 사방의 군사들이 모두 탁군(涿郡)으로 모여들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수 양제의 군사출발지가 탁군이었음을 알게 하고,
612년 봄 정월 임오일(초2일)에 수 양제가 내린 조서를 보면,
“고구려의 하잘 것 없는 것들이 미욱하고 공손하지 못하여 발해와 갈석사이(勃碣之間 =渤碣之間))에 모여들어 요와 예의 지경(遼獩之境=遼濊之境)을 자주 침범하여 왔다”
“거란의 무리들과 합세하여 바다 수비병들을 죽였으며, 말갈의 습속을 본받아 요서(遼西)를 침략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탁군, 발해와 갈석, 요, 거란, 요서 등의 지명이 언급되고 있는데, 당시 수나라와 고구려 국경부근에 위치했던 지명과 종족이름이다.
그리고 수 양제가 고구려를 침공하기 위하여 출발시킨 군사의 총 수가 113만 3천 8백명이었다고 하였고, 이를 좌12군, 우12군으로 나누었다고 하였는데, 아래와 같다.
좌12군 : 제1군 누방도,
제2군 장잠도,
제3군 해명도,
제4군 개마도,
제5군 건안도,
제6군 남소도,
제7군 요동도,
제8군 현토도,
제9군 부여도,
제10군 조선도,
제11군 옥저도,
제12군 낙랑도
우12군 : 제1군 점선도,
제2군 함자도,
제3군 혼미도,
제4군 임둔도,
제5군 후성도,
제6군 제해도,
제7군 답돈도,
제8군 숙신도,
제9군 갈석도,
제10군 동이도,
제11군 대방도,
제12군 양평도
를 따라 진군하여 평양에 총집결하라고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당시 수나라 육군의 주력군이었던 9군의 실제 진격로는,
1군 좌익위대장군 우문술 : 부여도
2군 우익위대장군 우중문 : 낙랑도
3군 좌효위대장군 형원항 : 요동도
4군 우효위대장군 설세웅 : 옥저도(? 오기가 아닐까)
5군 우둔위장군 신세웅 : 현토도
6군 우어위장군 장근 : 양평도
7군 우무후장군 조효재 : 갈석도
8군 탁군태수검교좌무위장군 최홍승 : 수성도
9군 검교우어위호분낭장 위문승 : 증지도
를 따라 행군하여 모두 요수 서쪽에 모여 부교를 설치한 후 간신히 요수를 건너 요동성으로 향하였고, 다시 을지문덕을 쫓아 압록강을 건너 평양성을 향하여 진격하였는데, 처음 9군이 요동에 도착했을 때 군사의 총 수가 30만 5천이었는데, 평양성 부근까지 침공해 들어갔다가 실패하고 철군하면서 고구려의 공격을 받고 쫓겨 요동성으로 되돌아온 군사가 2천7백명 뿐이었다고 하였다.(30만 2천 3백명은 전사하였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렇다면 수 양제가 탁군에서 출발시켰다는 군사의 총 수 113만 3천 8백명은 무엇이고, 요동에 도착했던 9군의 총 수 30만 5천명은 또 무엇일까? 군사 수효에 있어 무려 82만 8천 8백명이나 차이가 난다.
도대체 무슨 기록이 이따위인가 싶은 것이다.
그리하여 필자는 이를 이렇게 이해했다.
수 양제 고구려 2차 침공시의 좌12군, 우12군이라는 것은 수나라의 육군주력인 9군 30만 5천명과 고구려를 둘러 싼 주변 나라들에게 참전을 독려한 결과 그 나라들로부터 군사 몇 명씩을 참전 시키겠노라는 언질을 받고 이를 조서에 기록했던 것이 아닌가 싶은 것이다.
즉 실제 참전했던 군사 수가 아니라 문서상으로만 기록된 군사수일 가능성이 많다는 말이다.
필자가 왜 이러한 생각을 하느냐 하면,
좌 12군 중 요동도(형원항군), 현토도(신세웅군), 부여도(우문술군), 옥저도(설세웅군 : 필자 주 : 옥저는 고구려의 동북쪽에 위치한 나라였는데 고구려의 서남쪽 탁군에서 출발한 설세웅군이 어떻게 옥저도를 따라 진군하여 압록강 서쪽에 집결했다는 말인지 도대체 이해되지 않는다. 당시 공수부대가 있어 옥저까지 비행기로 이동시키지 않고는 펼칠 수 없는 작전이므로 기록이 잘못되었을 것이다), 낙랑도(우중문군)
우12군 중 갈석도(조효재군), 양평도(장근군)는 수나라 주력군인 9군이 길을 나누어 진격했다고 기록되어 있기는 하나 실제는 일렬종대로 행군한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 9군의 진격로 중 위 기록 이외에 수성도(최홍승군), 증지도(위문승군)가 있었다.
그렇다면 수나라의 육군 주력군인 9군이 이용했던 진격로를 뺀 나머지 즉 좌12군 중 누방도, 장잠도. 해명도, 개마도, 건안도, 남소도, 조선도와 우12군 중 점선도, 함자도, 혼미도, 임둔도, 후성도, 제해도, 답돈도, 숙신도, 동이도, 대방도는 어느 군사가 진격할 수 있었을까?
대개의 지명이 지금 그 위치가 정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좌12군 중 누방이라는 곳은 수경에서 패수가 발원했다고 하는 곳으로서 전한 낙랑군의 속현이었고, 장잠과 해명 역시 전한 낙랑군 25개현에 속했던 현의 이름이고, 개마는 서개마라는 명칭으로 전한 현토군 3개현 중의 하나로 나타나고, 건안은 평곽이라는 명칭으로 전한 요동군 18개현 중의 하나로 나타나고, 남소는 고구려의 서쪽 또는 서북쪽에 위치했던 곳이고, 조선은 기자에게 봉해졌다는 곳으로 그 위치가 명확치 않으나 고구려 평양성 부근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12군 중 점선, 함자, 혼미, 제해, 동이, 대방 등은 전한 낙랑군에 속해 있던 현 이름이고, 후성은 요동군에 속했던 현의 이름이며, 숙신은 말갈, 여진의 전신으로서 고구려의 동북쪽에 위치했던 민족의 이름이다.
그런데 수 양제의 조서에 나타나는 좌12군, 우12군의 지명을 보면 고구려를 중앙에 놓고 둥그렇게 포위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때 실제 고구려 주변 나라들이 수 나라의 고구려 침공에 동조하고 적극적으로 이 전쟁에 참전했었는지는 알기 어렵지만, 이때 백제는 수나라와 고구려 사이에서 양쪽을 지지하는 이중적인 행동을 취하였고, 신라는 이 전쟁 때에 고구려로부터 죽령 서북쪽 5백리 땅을 빼앗았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보장왕 3년(A.D.644) 조를 보면, 연개소문이 당나라에서 온 사신 현장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신라와 틈이 벌어진 지는 이미 오래이다. 지난날 수나라가 (고구려를) 침입하였을 때(A.D.612)에 신라는 그 틈을 타서 우리의 땅 5백리를 빼앗아 그 성읍을 모두 점거하고 있으니 그들이 우리에게 빼앗아간 땅을 자진하여 돌려주지 않는다면 아마 싸움은 그칠 수 없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신라가 고수전쟁의 틈을 타서 고구려의 땅 5백여리를 빼앗았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결국 좌12군, 우12군이라는 기록은 수나라가 고구려를 침공하기 위한 실제 군사들의 진격로라고 보기 보다는 문서상으로만 작성된 선언적 의미가 크다고 할 것이고, 수나라군의 실제 진격로는 9군이 진격했던 길 뿐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고, 또 이때 수 양제가 고구려 침공을 위하여 동원했던 실제 군사의 수도 육군 35만정도와 수군 5만 정도였을 것이다.
수 양제가 뻥을 친 것이라 이해하면 될 것이고, 실체도 없어 보이는 좌12군, 우12군에 대하여 핏대 세우며 논쟁을 할 필요도 없는 사안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