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태강지리지는 왜 갈석산(碣石山)에서 장성(長城)이 시작되었다고 기록했던 것일까? - 최초주장
춘추전국시대 진장성(秦長城)은 농서(隴西)에서부터 북지(北地)를 지나 상군(上郡)까지였다고 하고,
☆ 농서는 감숙성 난주부근, 북지는 영하회족자치구, 상군은 섬서성 북부지역을 말하는 것이다.
춘추전국시대 조장성(趙長城)은 대(代)에서부터 고궐(高闕)까지 쌓고 운중(雲中), 안문(雁門), 대군(代郡)을 설치했다고 하였으며,
☆ 지금 산서성 태원 북쪽에 운중산이 있고, 안문관이 있으며, 대현도 있다.
조장성을 지금의 태원 북쪽에 쌓았음을 알 수 있다.
춘추전국시대 연장성(燕長城)은 조양(造陽)에서 양평(襄平)까지 쌓고, 5군 즉 요동군, 요서군, 상곡군, 어양군, 우북평군을 설치했다고 하였으며,
☆ 조양(造陽)의 위치는 불분명하나 고대의 요수는 지금의 영정하로 비정된다. 따라서 요수의 동쪽은 요동군으로서 지금의 북경부근을 말하는 것이고, 그 서쪽은 요서군으로서 지금의 방산부근을 말하는 것이다. 연5군은 지금의 영정하 부근에 위치했었다.
진시황이 통일 후 몽염으로 하여금 원래의 진장성, 조장성, 연장성을 연결하게 했다는 소위 만리장성(萬里長城)은 서쪽 끝이 임조(臨洮), 동쪽 끝은 요동(遼東)이라 하였다.
☆ 지금 감숙성 난주시 부근에 임조(臨洮), 농서(隴西)가 있다.
그런데 진(晉) 태강지리지에 “秦築長城所起自碣石(진나라가 쌓은 장성이 갈석산에서 시작되었다)”라고 기록함으로써 여러 사람을 헷갈리게 하였다.
원래의 춘추전국시대의 진장성은 농서에서 상군까지 쌓았다고 했으므로 갈석산에서 시작되지 않았고,
그 후 진시황이 몽염을 시켜 원래의 진장성과 조장성, 연장성을 연결하도록 했다는 장성도 임조에서 요동까지 만여리에 이르렀다고 하였으므로 역시 갈석산에서 시작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진(晉) 태강지리지는 왜 엉뚱하게도 갈석산에서 장성이 시작되었다고 기록했던 것일까?
필자의 연구에 의하면 고대의 갈석산은 지금 하북성 보정 부근에 위치하고 있는 낭아산(狼牙山)을 말하는 것이 틀림없다.[필자주 : 지금 하북성 진황도시 창려현에 있는 갈석산은 가짜이다]
그런데 통전(通典) 권178 주군8 평주 노룡 조를 보면, “盧龍 漢肥如縣 有碣石山 (晉太康地志云 秦築長城所起自碣石 在今高句麗舊界 非此碣石也) 漢遼西郡故城在今郡東 又有漢 令支縣城 臨閭關今名臨楡關 在縣城東一百八十里 盧龍塞在城西北二百里(노룡현은 한나라 때의 비여현으로서 갈석산이 있다. (진 태강지리지에는 이르기를 진나라가 쌓은 장성이 갈석에서 시작되었다고 하였으나, 지금 고구려의 옛 국경은 이 갈석이 아니었다.) 한나라 때의 요서군 고성이 지금 군의 동쪽에 있고 또 한나라 때의 영지현성이 있다. 임려관의 지금 이름은 임유관인데 현성의 동쪽 180리에 있다. 노룡새가 성의 서북쪽 200리에 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통전의 찬자인 두우는 갈석산이 노룡 비여현에 있다고 하면서 고구려의 옛 국경은 이 갈석이 아니었다라고 부정하고 있는 것인데, 실제 갈석산으로 비정되는 지금의 낭아산으로는 장성이 지나지는 않는다.
그리하여 두우는 장성이 갈석산에서 시작되었다고 기록한 태강지리지의 기록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했던 것이다.
☆ 두우는 우리에게 태강연간에 고구려의 국경이 갈석산 부근까지였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셈인데, 천자문에도 “昆池碣石鉅野洞庭(곤지갈석거야동정)”이라고 “갈석”이 언급되어 있을 정도로 갈석산은 중국인들에게 매우 유명한 산이었다.
이러한 상황들을 감안하여 필자가 판단해 본다면, 태강지리지에 장성이 갈석산에서 시작되었다고 기록했던 것은 당시 고구려가 실제 갈석산 부근 지역까지는 차지하고 있었고 소위 만리장성은 요동까지 뻗어 있었겠으나, 진(晉)나라가 자기나라의 지리지인 태강지리지를 편찬하면서 고구려 땅까지 언급할 필요가 없었고, 진(晉)나라 땅의 북쪽 끝 부근에 갈석산만큼 잘 알려진 대표적 지형지물이 달리 없었기 때문에 옛날 아홉 황제들이 올랐다는 유명한 산이었던 갈석산 부근에서 장성이 시작되었다는 의미로 그렇게 기록했던 것 뿐이라고 이해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만리장성은 갈석산에서 시작되지 않았고, 요동 양평에서 시작되었다.
☆ 晉太康地志云 秦築長城所起自碣石 在今高句麗舊界 非此碣石也에 대한 해석은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