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거란(요)은 부여문화권에 속했던 민족 - 최초주장
부여는 아주 먼 옛날 고조선 단군왕검의 아들 부여에게 주어졌던 나라 서쪽의 영지였고, 후일에 이르러 북부여, 동부여, 졸본부여가 되었다.
☆ 북부여는 졸본부여에 병합되었고, 졸본부여는 후일 고구려가 되었으며, 동부여는 5백여년 후 고구려에 통합되었다.
북부여는 해모수가 건국하여 기원전 232년에 천제의 자리에 올라, 해모수리, 해해사, 해우루, 해부루로 왕위가 이어졌고,
졸본부여는 동명왕이 기원전 108년에 건국하여 기원전 86년에 북부여를 병합하였다.
그러자 북부여 해부루왕은 북부여 땅을 빼앗기고 일부 유민들을 이끌고 동북쪽으로 이동해 가서 다시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동부여라 하게 되고, 다른 일부 역시 북부여를 떠나 흩어져 실위, 고막해, 두막루 등으로 거듭났던 듯하다.
☆ 위서 권100 열전 제88 두막루(豆莫婁) 전을 보면, “두막루국은 물길북쪽 천리에 있다. 낙양에서 6천리(지금의 약 1,380km. 옛날 10리는 지금의 2.3km에 해당) 떨어져 있는데, 옛 북부여이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또 실위(失韋)전에는, 실위의 언어가 고막해, 거란, 두막루국과 동일하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결국 이들은 부여문화권에 속했던 동일 언어민족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원래의 북부여 땅은 졸본부여에 속하게 되었고, 그곳에 살던 백성들 일부는 동부여, 두막루로 갔고, 일부는 그곳에 남아 살아가게 되었을 것인데, 거란족은 바로 이 북부여의 남은 종족이 아닌가 싶은 것이다.
그렇지만 거란족은 가까이 위치하고 있던 강국 동부여와 고구려 때문에 부족형태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때로는 동부여에 속하기도 하고, 때로는 고구려에 속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소수림왕 8년(A.D.378) 조를 보면, “가을9월 거란이 북쪽 변경을 침범하여 8개 부락을 함락시켰다” 라고 거란에 대하여 처음 언급되고, 호태왕비문에는 영락5년(A.D.395) 을미년에 비려(碑麗)를 정벌한 기록이 있는데, 이 비려 역시 원래 북부여의 한 부족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다가 동부여와 고구려가 멸망하고, 발해가 건국되자 다시 해동성국 발해에 속했을 것인데, 발해 말기에 이르러 거란족의 세력이 매우 강성해졌던 듯하다.
그리하여 926년에 이르러 발해(대진국)가 쇠약해지자 야율아보기가 쿠데타를 일으켜 10만 대군을 이끌고 발해 상경(상경용천부)을 공격하여 승리하게 되어 발해(대진국)가 멸망하고, 거란족이 흥기하게 되었던 것이고, 거란(요)은 또 후진을 건국하는데 도움을 준 대가로 연운16주를 할양받게 되어 대제국으로 부상하게 되는 것이다.
거란을 곧 부여족이라 할 수는 없겠지만 옛 고구려, 발해(대진국)에 부용되어 있었고, 또 압록강(현 백하) 유역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후일 거란의 소손녕과 고려의 서희가 서로 자기 나라가 고구려 땅을 더 많이 차지하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거란은 옛 고조선 때부터 고조선의 서쪽에 위치했던 부여에 속했었기 때문에 그들의 생활 속에 고조선의 전통이 많이 남아 있었을 것이고, 또 언어나 풍습이 동부여와 거의 동일했을 것이며, 또 고구려와도 일치하는 부분이 상당히 많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거란이라 하면 고려 때의 침공 때문에 역사적 감정이 좋지 않은데, 사실 거란은 부여문화권에 속했던 나라로서 우리와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민족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