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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대당고김씨부인(大唐故金氏夫人)은 재당신라인이 아니다 - 최초주장

윤여동 2015. 8. 28. 22:44

윤여동설 - 대당고김씨부인(大唐故金氏夫人)은 재당신라인이 아니다 - 최초주장

 

 

 

 

 

 

 

 

  어느 교수라는 사람이 1954년 중국 섬서성(陝西省) 서안(西安) 동쪽 교외 곽가탄(郭家灘)에서 출토되었다는 이 "대당고김씨부인묘명(大唐故金氏夫人墓銘)"의 기록을 인용하여 이 김씨부인이 재당신라인이었다고 말도 안되는 주장을 하였다.

  그러다보니 일반인들은 그 주장이 사실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필자가 그 묘지명을 아무리 세세히 살펴보아도 이 김씨부인이 재당신라인(필자주 : 당나라에 가서 살고 있던 신라인이라는 의미) 이었다는 기록(근거)은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다.

[필자주 : 그런데도 대당고김씨부인이 재당신라인이었다는 주장을 아직까지도  철회하지 않고 있고, 역사학자라는 사람들도 그 주장에 강력하게 반론을 제기하지 않고 있으니 이들은 모두 무뇌아들인가?]

  

  단지 그녀는 투후 김일제의 후예로서 선조가 왕망의 신()나라가 멸망하고 후한 광무제가 한(漢 : 후한) 나라를 재건하는 난리통에 요동(遼東)으로 도망쳐 숨어 살았는데, 가문을 일으켜 언젠가부터 그녀의 조상들이 다시 벼슬길에 나아갔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고,[필자주 : 후한 광무제의 입장으로서는 전한을 멸망시키고 신(新)나라를 세웠던 왕망에게 적극 동조했던 투후 김일제의 후예들을 모두 잡아 죽이려 했을 것이므로 그들은 어디론가로 도망쳐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때 이 김씨부인의 선조들은 요동으로 도망쳐 숨어살았었고, 세월이 흐른 후에 다시 가문을 일으켜 중국의 벼슬길에 나아갈 수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을 뿐 신라와 관련이 있다는 기록자체가 어디에도 없는데 어떻게  이 김씨부인을 신라와 연관시키려 하는지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것이다]    

  이구라는 사람의 두 번째 부인으로 시집을 갔으나, 자식없이 전처 소생 3형제를 친자식처럼 잘 기르다가 32세의 젊은 나이에 불치의 병을 얻어 함통(咸通) 5(A.D.864) 529일 영표라는 곳에서 죽었고,

  함통 5127일에 영구를 영표로부터 만년현(萬年縣) 산천향(滻川鄕) 상부촌(上傅村)으로 옮겨 이구의 선영(先塋) 묘역에 안장했다는 것 뿐이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신라가 요동을 차지했던 적이 없었고,

  김씨부인의 조상들은 한 때 요동으로 도망쳐 숨어살다가 그곳에서 다시 번성했다고 하였을 뿐인데,

  그 교수는 묘지명 어디를 보고 그녀가 재당신라인이었다는 얼토당토 않은 주장을 했던 것일까?

  멍청이.   

 

[참고]

 

대당고김씨부인묘명(大唐故金氏夫人墓銘)

() 지계양감(知桂陽監)이자 장사랑(將仕郞)이며 시어사(侍御史)와 내봉공(內供奉)인 이구(李璆)의 부인(夫人)인 경조(京兆 : 장안) 김씨(金氏) 묘지명(墓誌銘)과 그 서문.

향공진사(鄕貢進士) 최희고(崔希古)가 비문을 짓고 한림대조(翰林待詔) 승봉랑(承奉郞)이자 수건주장사(守建州長史)인 동함(董咸)이 묘지문(誌文)과 전액(篆額)을 쓰다.

 

태상천자(太上天子)께서 나라를 태평하게 하시고 집안을 열어 드러내셨으니 이름하여 소호씨금천(少昊氏金天)이라 하니, 이분이 곧 우리 집안이 성씨를 받게 된 세조(世祖)이시다.

그 후에 유파가 갈라지고 갈래가 나뉘어 번창하고 빛나서 온 천하에 만연하니 이미 그 수효가 많고도 많도다.

먼 조상 이름은 일제(日磾)시니 흉노 조정에 몸담고 계시다가 서한(西漢)에 투항하시어 무제(武帝) 아래서 벼슬하셨다.

명예와 절개를 중히 여기니 (황제께서) 그를 발탁해 시중(侍中)과 상시(常侍)에 임명하고 투정후(秺亭侯)에 봉하시니, 이후 7대에 걸쳐 벼슬함에 눈부신 활약이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경조군(京兆郡)에 정착하게 되니 이런 일은 사책에 기록되었다. 견주어 그보다 더 클 수 없는 일을 하면 몇 세대 후에 어진 이가 나타난다는 말을 여기서 징험할 수 있다.

(漢 : 후한)이 덕을 드러내 보이지 않고 난리가 나서 괴로움을 겪게 되자, 곡식을 싸들고 나라를 떠나 난을 피해 멀리까지 이르렀다.

그리하여 우리 집안은 멀리 떨어진 요동(遼東)에 숨어 살게 되었다.

문선왕(文宣王.공자의 시호)께서 말씀하시기를 "말에는 성실함과 신의가 있어야 하고 행동에는 독실하고 신중함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비록 오랑캐 모습을 했으나 그 도()를 역시 행하니, 우리 집안은 요동(遼東)에서 불이 활활 타오르듯 다시 번성했다.

부인의 증조는 이름이 원득(原得)이시니 황실에서 공부상서(工部尙書)에 추증되셨고,

할아버지는 성함이 충의(忠義)시니 한림대조(翰林待詔) 검교좌산기상시(檢校左散騎常侍) 소부감(少府監) 내중상사(內中尙使)라는 벼슬을 지내셨다.

아버지는 성함이 공량(公亮)이시니 한림대조 장작감승(將作監丞) 충내작판관(充內作判官)을 역임하셨다.

조부께서는 문무의 예리함에 여유가 있어 평자(平子.유명한 천문학자)를 궁구하여 관상(觀象)의 규모를 관찰하셨고, 공수자(公輸子.저명한 기술자)를 궁리하여 신과 같은 기술을 갖추셨다.

이에 기예로 천거받아 금문(金門 : 황실 혹은 조정)에 들어가 여섯 조정을 섬겨 봉록과 직위를 갖고서 처음부터 끝까지 훌륭한 삶을 살다 아름답게 마치셨다.

(이구의) 전 부인은 농서 이씨로 대대로 벼슬한 든든한 집안 출신이었다.

그리고 (김씨) 부인은 판관의 둘째 따님으로 유순하고 곧은 마음은 날 때부터 스스로 그러한 품성이었고, 여성으로서의 일솜씨와 부녀자의 도리는 옛날 일로부터 스스로 힘써 부지런히 배운 바다.

이씨 집안에 시집감에 이르러 중외(中外) 친척들이 모두 현명한 부인이라 일컬었다. 그러나 부인에게는 뒤를 이을 자식이 없어 전 부인이 낳은 세 아들을 기르고 훈육하니 친자식보다 더했다.

장차 선행을 쌓아 넉넉한 보답을 받으려고 기약했으나, 어찌 천명(天命)을 일일이 헤아려 길고 짧음의 운명을 정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연이어 병을 앓아 무당과 편작(扁鵲) 같은 의원도 병을 다스리지 못하다가 함통(咸通) 5(864) 529일 영표(嶺表.지명)에서 돌아가시니 향년 32세였다.

단공(端公. 시어사의 별칭으로 여기서는 김씨 부인의 남편)은 지난날의 평생을 추모하여 신체를 그대로 보전하여 산을 넘고 강 건너기를 마치 평평한 땅과 작은 개울 건너듯 하며 어렵고 험함을 피하지 않고 굳은 마음으로 영구(靈柩)를 마주 대하며 마침내 대대로 살던 고향으로 돌아왔다.

맏아들 경현(敬玄)과 둘째 아들 경모(敬謨), 그리고 막내 아들 경원(敬元)은 모두 슬퍼하며 몸과 얼굴이 바짝 여위고, 멀리서 영구를 모시고 따르며 한없이 슬피 울부짖었다.

경현 등이 남은 수명을 겨우 부지하며 삼가 예문을 갖추어 함통 5127일에 영구를 만년현(萬年縣) 산천향(滻川鄕) 상부촌(上傅村)으로 옮겨 선영(先塋)의 묘역에 안장했다.

부인의 숙부는 한림대조로 앞서 소왕부(昭王傅)를 지냈고 친형은 수우청도솔부병조참군(守右淸道率府兵曹參軍)이니 연이어 나란히 조정에 벼슬하며 가문의 업을 이었다.

 

나 최희고(崔希古)는 부인의 형과 오랜 친구 사이로 죽은 이의 지난 일을 슬퍼하는 글을 짓고 명문(銘文)을 청하므로 이에 다음과 같이 명()한다.

 

하늘과 땅이 인자하지 못하여 도균(陶鈞.부모)보다 먼저 돌아가시니,

누가 옳고 누가 그르며 소원함도 없고 친함도 없도다.

쌓은 선행 누리지 못하고 대명(大命)은 영원하지 않으니,

어찌 그 훌륭함이 오직 뛰어난 성인만이겠는가?

이 짧은 세월을 만나 태산에 노닐고 진령(秦嶺)을 건너 다녔도다.

대도(大道)는 오로지 만물의 변화를 좇아 함께 할 뿐이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