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백제 장군 녜식(녜식진), 녜군 형제는 매국노일까?
660년 7월 13일 밤 백제의 도읍 사비성이 함락직전에 이르자 백제의 의자왕은 태자 효와 측근자들을 거느리고 사비성을 빠져나와 북쪽에 위치한 옛 도읍 웅진성으로 도망쳐갔다.
그러자 사비성은 곧 함락되었고, 왕자 태, 융, 연 등이 항복하게 된다.
그리고 18일에 이르러서는 웅진성으로 갔던 의자왕도 태자 효와 장군들을 거느리고 다시 사비성으로 돌아와서 항복하게 된다.
이 때의 상황이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18일에 의자가 태자와 웅진방 령군 등을 거느리고 웅진성으로부터 와서 항복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구당서 권83 열전제33 소정방열전에는,
“其大將禰植又將義慈來降(그 대장 녜식과 장군들이 의자와 (함께) 와서 항복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신당서 권111 열전제36 소정방열전에는,
“其將禰植與義慈降(그 장군 녜식이 의자와 함께 항복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 禰植을 왜 “예식”이라 읽는지 의문이다. 원래의 발음대로 “녜식”이라 읽어야 옳을 것이다.
그런데 중국 서안에서 녜식진(禰植進, 615-672 58세졸), 녜군(禰軍, 613-678 66세졸)의 묘지명이 발견되었는데, 녜식진은 신,구당서 기록 속의 녜식과 동일인이었고, 또 녜군은 녜식진의 형 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들의 묘지명 속에는 그들이 당나라에서 매우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살다가 죽었음이 기록되어 있었다.
[녜식진묘지명 : 대당고좌위위대장군래원현개국자주국녜공묘지명 615-672 58세졸]
[녜군묘지명: 대당고우위위장군상주국녜공묘지명 613-678 66세졸]
녜식진은 당나라에서 “좌위위대장군 래원현개국자 주국”이라는 아주 높은 벼슬을 받았고, 그 형인 녜군은 “우위위장군 상주국”이라는 역시 높은 벼슬을 받고 영화롭게 살다가 죽었음이 밝혀졌다.
그러다보니 그 형제가 백제 멸망시 웅진성으로 갔던 의자왕을 강제로 사로잡아 겁박하여 항복하게 만든 공이 있었기 때문에 당나라에서 분에 넘치는 대우를 받았을 것이라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이 의자왕을 강제로 사로잡고 겁박하여 항복하게 만들었다는 직접적인 기록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학자들 간에는 그들이 매국노다 아니다 하면서 논란이 일게 되었다.
어떤 사람은 구당서의 기록 “其大將禰植又將義慈來降”을 해석하기를, “그 대장 녜식이 의자왕을 끌고 와서 항복했다”라고 해석한다.
그리고는 녜식이 의자왕을 사로잡아 사비성으로 끌고 와서 항복하게 하고 소정방에게 바쳤기 때문에 녜식은 매국노이고, 의자왕은 항복할 마음이 없었으나 녜식의 강요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항복하게 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는 그러한 해석이 별로 잘한 해석으로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其大將禰植又將”은 “그 대장 녜식과 그 휘하 장군들이........” 라는 의미이고,
“義慈來降”은 신당서를 보면, “(與)義慈來降”의 의미로서 “의자와 함께 와서 항복했다”라는 의미일 것이기 때문이다.
☆ 일본서기 제명천황 6년 겨울10월 조의 주를 보면, “백제의 의자왕, 그의 처 은고, 그의 아들 융, 그의 신하 좌평천복, 국변성, 손등 등 모두 50여인이 가을 7월 13일 소장군에 잡혀 당국으로 보내졌다(爲蘇將軍所捉 而送去於唐國)”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기록을 녜식 형제가 의자왕을 잡아 소정방에게 넘겼다는 근거라고도 하고 있는데, 과연 그러할까? 일본서기는 의자왕이 항복하고 포로로 잡혀 당나라로 보내졌던 상황을 객관적 입장에서 담담하게 기록했던 것은 아닐까?
의자왕과 함께 와서 항복한 대장 녜식과 그 휘하 장군들을 과연 매국노라 매도할 수 있을 것인가?
의자왕은 660년 7월 13일 밤에 사비성에서 웅진성으로 도망쳤고, 7월 18일에 다시 사비성으로 와서 항복했다.
녜식이 정말로 반역 할 마음이 있었다면 7월 13일 밤에 의자왕이 사비성에서 웅진성으로 도망쳐 왔을 때 바로 사로잡을 수 있었을 것이고, 곧바로 사비성으로 향하면 늦어도 7월 15일에는 사비성의 소정방에게 의자왕을 바치며 항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사실이 이러했다면 녜식은 분명한 매국노이다.
그런데 대장 녜식과 그 휘하 장군들은 7월 18일에야 의자왕과 함께 웅진성으로부터 사비성으로 와서 항복했다.
7월 14일부터 17일사이 4일간 웅진성에서는 과연 무슨 일이 있었을까?
필자가 추정하기에는 그 기간 동안에 의자왕과 백제의 대신들과 장군들은, 사비성이 이미 함락되었고, 사비성에 있던 왕자, 왕족, 귀족, 장군, 군사, 백성들이 항복하거나 포로로 사로잡혀 있는 이 비상사태를 해소할 방안을 찾기 위하여 심사숙고했을 것이고, 여러 방책에 대하여 논의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결사항전을 해야 한다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이미 사세가 기울었으니 더 이상의 피해를 없게 하려면 항복해야 한다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국운을 판가름해야 하는 중차대한 일이었으므로 쉽게 결론이 났을 리 만무하다.
그리하여 의자왕은 만4일간을 웅진성에 머무르며 묘안을 찾으려 했겠으나, 결국 결론은 항복하자는 쪽으로 기울어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이때 녜식, 녜군 형제는 항복하자는 편에 서서 일정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이기는 한다.
왜냐하면 웅진성에서의 그들의 지위가 매우 높았었고, 의자왕과 함께 와서 항복했으며, 그 후 당나라에서 그들 형제를 예우한 정황이 그렇다는 것이지 그 어떤 확실한 근거는 없다.
그러나 당시 도읍을 함락 당한 비상시국에 항복하자는 의견이 우세한 상황에서 그에 동조했다고 하여 녜식 형제 만을 매국노라 단정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물론 계백장군과 오천결사대처럼 목숨을 바쳐 나라를 지키려고 한 애국자에 비할 수는 없겠지만, 당시 도읍이 함락당한 혼란스런 상황에서 항복하자는 편에 섰다하여 무조건 매국노라 한다면, 녜식보다 더 먼저 항복했고, 그야말로 당나라에서 최고의 예우를 받았으며, 백제 부흥군을 격멸시켜 백제가 부흥할 수 없도록 만든 부여융은 녜식보다 훨씬 더한 매국노이고, 사비성문을 열고 당나라군에 항복한 부여태도 매국노이며, 왕손 부여문사도 매국노이고, 비록 녜식보다 뒤에 항복하기는 했지만 흑치상지, 사타상여 등도 역시 매국노라 할 수 있을 것인데, 정점으로 올라가면 이는 결국 정치를 잘못하여 외세의 침공을 불러들였고, 충신의 말을 따르지 않고 판단을 잘못하여 도읍을 함락당한 의자왕에게 그 책임이 있는 것이지, 백제 멸망의 책임을 일개 장군에 지나지 않는 녜식 형제에게 떠 넘길 일이 아닐 것이다.
의자왕 스스로도 탄식했다.
“한스럽게도 성충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렀다”고........
백제의 명운은 거기까지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