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백제 의자왕의 아들들 출생순서는?
의자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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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자 |차자 |왜국볼모 |태자 |5남 |서자
부여효 부여태 부여풍 부여융 부여연 부여궁
(웅진도독 대방군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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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문사 부여문선 부여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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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차녀
부여경 장녀 부여태비(690-738 49세훙)
(웅진도독 대방군왕) 690년에 태어나 711년에 당 황족 이옹과 혼인,
718년 괵왕비에 책봉되었 고,
727년 남편 이옹이 사망한 후 731년에 태비에 책봉되었다가
738년 에 사망하였고,
장안 당 고조 이연의 헌릉(獻陵) 주변에 남편인 이옹과 합장 되었다.
삼국사기에 백제 의자왕의 적자로 보이는 다섯 아들 이름 효(孝), 태(泰), 융(隆), 연(演), 풍(豊)이 나타나고, 또 서자 41명을 좌평에 임명하고 각각 식읍을 주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서자 중 유일하게 궁(躬) 한명의 이름 만이 전해졌다.
☆ 의자왕의 아들 중에 부여용(扶餘勇)이라는 인물이 있었다고도 한다.
그런데 그 태어난 순서가 확실하게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기록에 나타나는 의자왕의 아들들의 출생순서에 대해 추정해 보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은 의자왕이 재위 4년(A.D.644)에 융(隆)을 태자로 세웠다는 삼국사기 기록을 보고는 융(A.D.615-682)이 의자왕의 장자가 아닌가 생각하기도 하였고, 또 660년 나당연합군의 침공을 받아 사비성이 함락 직전에 이르자 의자왕이 태자 효(孝)와 함께 사비성을 빠져나가 북쪽(웅진성)으로 갔다는 기록도 있으므로 언제 태자가 융(隆)에서 효(孝)로 바뀌었던 것일까 갸우뚱 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의자왕과 태자 효가 웅진성으로 가버리자 의자왕의 둘째아들 태(泰)가 스스로 왕위에 올라 사비성을 굳게 지키고 있었다는 기록이 나타나므로 의자왕의 둘째아들 이름이 태(泰)였음을 알 수 있으며, 그 외에도 융(隆), 연(演)이 나타나고, 서자 궁(躬)의 이름도 나타난다.
또한 백제 부흥을 도모하던 복신이 왜국에 볼모로 가 있던 전왕의 왕자 풍(豊)을 귀국시켜 왕으로 세웠다는 기록도 있으므로 의자왕에게 풍(豊)이라는 아들도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들의 출생 순서는 태(泰)가 의자왕의 차자라는 것만 기록에 나타날 뿐 나머지 아들들의 출생순서는 확실하게 알 수가 없었다.
기록들을 감안하여 그들의 태어난 순서를 추정해 보면,
장자 태자 부여효(扶餘孝) : 확실하게 의자왕의 장자라고 단언할 수 없겠으나 삼국사기에는 태자 융 대신 새롭게 태자로 봉해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장자가 아닌가 생각해 볼 수 있고, 사비성이 함락지경에 이르자 의자왕과 함께 웅진성으로 도망쳤다가 다시 돌아와 660년 7월 18일 항복한 후 당나라로 끌려갔다.
차자 부여태(扶餘泰) : 의자왕의 차자임이 기록 상 확실하고 의자왕과 태자 효가 웅진성으로 가버리자 스스로 왕위에 올라 사비성을 사수하려고 하였으나 내분으로 실패하고 결국 사비성문을 열고 항복한 후 당나라로 끌려갔다.
3자 부여풍(扶餘豊) : 확실하게 언제 출생했는지 알 수 없으나 왜국에 볼모로 보내졌었고, 백제 멸망 후 귀국하여 복신의 추대로 왕위에 올라 부흥운동을 펼쳤으나 내분으로 실패하고 고구려로 망명하였다고 하는데, 그 후의 행적에 대하여는 나타나지 않는다.
4자 부여융(扶餘隆 A.D.615-682) : 서기 615년에 태어나 682년에 68세의 나이로 죽어 낙양 북망 청선리에 묻혔다.
30세 때에 백제 의자왕의 태자로 봉해졌고, 당서에는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도 그가 백제의 태자였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항복하고 당나라로 끌려갔는데, 당나라에서 융을 웅진도독, 백제군공, 웅진도총관 겸 마한도안무대사, 태상경, 대방군왕 등으로 임명하여 백제 유민들을 위무한 것으로 보면 그가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태자였던 것이 역사적 사실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낙양에서 그의 묘지명이 출토되었으므로 죽은 후 낙양 북망산에 그의 무덤을 조성했던 듯하다. 사후 당나라에서 그에게 보국대장군, 부여군을 증직하였다.
사후 손자인 부여경(扶餘敬)에게 그의 작위가 이어졌으나 이때는 이미 옛 백제 땅이 신라, 발해, 말갈 등으로 나누어져 나라의 계통이 끊어졌다고 하였다.
5자 부여연(扶餘演) : 기록들에 항상 마지막으로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연은 의자왕의 적자 중 막내쯤으로 보이는데, 사비성에서 항복한 후 당나라로 끌려갔다.
서자 부여궁(扶餘躬) : 서자 중 유일하게 이름이 전해졌고, 그의 출생 순서 역시 가늠하기 어렵다. 역시 당나라로 끌려갔을 것이다.
[부여융묘지명]
大唐故光祿大夫行太常卿使持節熊津都督帶方郡王扶餘君墓誌銘
公諱隆字隆百濟辰朝人也元▨▨孫啓祚暘谷稱雄割據一方跨躡
千載仁厚成俗光揚漢史忠孝立名昭彰晉策祖璋百濟國王沖撝淸
秀器業不羣貞觀年詔授開府儀同三司柱國帶方郡王父義慈
顯慶年授金紫光祿大夫衛尉卿果斷沈深聲芳獨劭趨藁街而沐
化績著來王登棘署以開榮慶流遺胤公幼彰奇表夙挺瓌姿氣蓋三
韓名馳兩貊孝以成性愼以立身擇善而行聞義能徙不師蒙衛而▨
發慙工未學孫吳而六奇閒出顯慶之始王師有征公遠鑒天人深知
逆順奉珍委命削衽歸仁去後夫之凶革先迷之失款誠押至襃賞荐
加位在列卿榮貫蕃國而馬韓餘燼狼心不悛鴟張遼海之濱蟻結丸
山之域皇赫斯怒天兵耀威上將擁旄中權奉律呑噬之筭雖
稟廟謀綏撫之方且資人懿以公爲熊津都督封百濟郡公仍
爲熊津道摠管兼馬韓道安撫大使公信勇早孚威懷素洽招攜邑落
忽若拾遺翦滅姦匈有均沃雪尋奉明詔脩好新羅俄沐
鴻恩陪覲東岳勳庸累著寵命日隆遷祑太常卿封王帶方郡公事君
竭力徇節亡私屢獻勤誠得留宿衛比之秦室則由余謝美方之漢朝
則日磾慙德雖情深匪懈而美疢維幾砭藥罕徵舟壑潛徙春秋六十
有八薨于私第贈以輔國大將軍諡曰公植操堅慤持身謹正高
情獨詣遠量不羈雅好文詞尤翫經籍慕賢才如不及比聲利於遊塵
天不憖遺人斯胥悼以永淳元年歲次壬午十二月庚寅朔卄四日癸酉
葬于北芒淸善里禮也司存有職敢作銘云
海隅開族河孫效祥崇基峻峙遠派靈長家聲克嗣代業逾昌澤流㴲
水威稜帶方餘慶不孤英才繼踵執尒貞慤載其忠勇徇國身輕亡家
義重迺遵王會遂膺天寵桂婁初擾遼川不寧薄言攜育寔賴
威靈信以成紀仁以爲經宣風徼塞侍蹕云亭爵超五等班參九列虔
奉天階肅恭臣節南山匪固東流遽閱敢託明旌式昭鴻烈
그리고 부여융의 묘지명에 의하면, 부여융은 615년에 태어나 682년에 68세로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 부여융묘지명 원문에는 永淳元年歲次壬午十二月庚寅朔卄四日癸酉에 낙양 북망 청선리에 장사지냈다고 되어 있으나, 영순 원년인 서기 682년 임오년 음력 12월 초하루 일진은 기미이고, 24일 일진은 임오로서 맞지 않는다. 그런데 11월 초하루 일진은 경인이고, 24일 일진은 계축이므로 이를 보면 부여융은 서기 682년 임오년 11월 경인삭 24일 계축일에 장사지냈을 것이다.
따라서 부여융묘지명 중 이 부분은 잘못 기록된 듯하다
따라서 660년에 백제가 멸망하고 당나라로 끌려갈 때 융의 나이는 46세였고, 그 후 웅진도독 대방군왕 등으로 책봉되어 옛 백제유민들을 위무했다.
☆ 의자왕의 출생연도가 아직까지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는데,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의 출생연도가 서기 615년이므로 그 아버지인 의자왕의 출생연도는 서기 590년쯤이고 40여세인 서기 632년에 태자로 봉해졌다가 50여세에 왕위에 올랐고, 70여세에 백제가 멸망하고 당나라로 끌려가 바로 죽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서안에서 출토된 부여태비묘지명에 의하면, 당 황족인 이옹과 혼인하여 괵왕비가 되었다가 남편 사후 태비에 봉해졌던 부여씨(690-738)가 바로 백제 부여융의 손녀(의자왕의 증손녀)이었음이 밝혀졌고, 그 가계가 기록되어 있었다. 백제 의자왕의 후손들은 당나라에 끌려가서도 상당한 대우를 받으며 살았던 듯한데, 그렇더라도 내 나라에서 사는 삶보다 더 좋았을 리는 없었을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부여융에게는 세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장남 부여문사(扶餘文思), 차남 부여문선(扶餘文宣), 3남 부여덕장(扶餘德璋)이 있었고, 괵왕비와 태비로 봉해졌던 부여씨는 부여덕장의 둘째 딸이었다.
다만 지금까지도 부여융 이외에 의자왕의 다른 아들들과 그 후손들이 당나라에서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어 안타깝지만 언젠가 밝혀진다면 그들은 우리에게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