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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광산김씨(光山金氏)가 신라왕자 김수충(金守忠)의 후손이 아닐까?

윤여동 2015. 10. 3. 09:13

윤여동설 - 광산김씨(光山金氏)신라왕자 김수충(金守忠)의 후손이 아닐까?

 

[사계 김장생 선생 묘비 : 유명조선국 가의대부 형조참판 증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세자사 시문원공 사계 김선생지묘]

 

 

  신라의 왕자 신분이라고 역사서에 확실하게 기록이 전하나 그 후의 행적이 묘연한 신라왕자 중의 한 사람이 바로 김수충(金守忠)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33대 성덕왕 3(A.D.704) 조를 보면, “여름5월 승부령 소판 김원태의 딸을 맞아들여 왕비로 삼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삼국유사를 보면 이 왕비는 배소왕후이고 시호가 엄정왕후(嚴貞王后)였다.

  그리고 13(A.D.714) 조를 보면, “2왕자 김수충을 당나라에 보내 숙위 하게하니 당나라 현종이 집과 비단을 주고 그를 총애하여 조회청에서 잔치를 베풀어 주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14(A.D.715) 조를 보면, “왕자 중경을 태자로 봉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15(A.D.716) 조를 보면, “성정왕후(成貞王后)를 궁에서 내보내는데, 비단 5백필, 200, 1만석, 1구역을 주었는데, 집은 강신공의 옛집을 사서 주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16(A.D.717) 조를 보면,

  “6월 태자 중경이 죽었다. 시호를 효상이라 하였다

  “가을9당나라에 갔던 대감 수충이 돌아와 문선왕(공자)과 1072제자의 초상을 바치매 곧 대학에 비치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당시의 사건 정황이 아주 일목요연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때 성덕왕은 왕자 김수충을 당나라에 숙위보낸 후에 왕자 중경을 태자로 봉했고, 성정왕후에게 많은 재물을 주어 궁에서 내 보냈다.

  그런데 그 다음해에 태자로 봉했던 중경이 죽자, 당나라에 가 있던 왕자 김수충이 다시 돌아온다.

[이때 김수충이 공자와 그 제자들의 초상을 가지고 온 것을 보면 김수충은 당나라에 가 있는 동안 유학에 심취해 있었음을 알게 한다]

  이 기록들을 세밀히 보면, 이때 신라왕실에서 성덕왕의 태자자리를 놓고 다투는 상황을 기록한 것임에 틀림없고, 김수충이 신라의 왕자 신분이었음은 확실하다.

  그런데 김수충에 관한 기록은 위 기록이 전부이고 이 후에는 더 이상 역사서에 나타나지도 않는다.

  그리하여 김수충이 과연 신라 어느 왕의 왕자였을까 설왕설래가 많았는데, 위 기록이 삼국사기 신라본기 33대 성덕왕 조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김수충이 실질적인 성덕왕의 장자가 아닌가 하기도 하였고성정왕후를 성덕왕의 실질적인 첫 왕비로 인식하기도 하였다.

 

김수충이 중국 구화산에 들어가 지장왕보살이 된 김교각스님이라고 주장한 중국 학자도 있었으나 김교각스님은 태종무열왕의 왕자 김문주임이 밝혀졌다.

 

  그러나 김수충은 33대 성덕왕의 장자가 아니라 사실은 그 동복형인 신라 32대 효소왕의 유복자로서 그 아버지 효소왕이 죽은 후인 702년 말경에 태어났고, 성정왕후(成貞王后)는 바로 그 효소왕의 왕비로서 김수충의 어머니였고, 33대 성덕왕의 형수였음을 필자가 우리 역사상 맨 처음으로 앞서 밝혀냈었다.

  왕자 김수충은 32대 효소왕 김리홍(金理洪 혹은 金理恭이라고도 한다, 생몰 687.2-702.716세훙)의 외동아들로서 효소왕이 죽었을 때 아직 세상에 태어나지 못하고 뱃속에 있었기 때문에 그리하여 삼국사기에 효소왕이 죽고 아들이 없었다라고 기록되었던 것이고, 후손이 없었던(필자주 : 사실은 아직 태어나지 않았었다] 효소왕의 뒤를 이어 그 동복동생인 김흥광(金興光)이 왕위에 올랐는데, 이가 신라 33대 성덕왕이었다.

 

  성덕왕 김흥광은 서기 702년에 약 14-15세 정도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고, 704년에 첫 혼인을 하였다. 삼국사기에는 성덕왕이 왕위에 오르니 이름은 흥광(興光)이다. 본명이 융기(隆基)였는데 당나라 현종과 이름이 같았기 때문에 선천년간에 고쳤다[당서에는 김지성이라 하였다]. 신문왕의 둘째아들이요, 효소왕의 동복동생이다. 효소왕이 죽고 아들이 없으매 백성들이 이를 왕으로 세웠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는 재위 3(A.D.704) 5월에 승부령 소판 김원태의 딸을 맞아들여 첫왕비(엄정왕후)로 삼았고, 장자인 김중경(金重慶)을 낳았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7142월에 이르자 성덕왕은 장조카인 왕자 김수충을 당나라에 숙위로 보내고는, 71512월에 자신의 장자인 김중경을 태자로 봉한 다음 7163월에는 죽은 효소왕의 왕후였으며, 자신의 형수인 성정왕후(成貞王后)를 궁에서 내보내는 것이다.

  죽은 전왕의 왕후가 궁중에 머물러 살고 있는 것이 결코 득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기록을 보면, 효소왕비 성정왕후는 효소왕이 죽은 후에도 무려 14년 가까이 신라의 왕궁 안에 그대로 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추정해보면 이는 효소왕이 죽고 성덕왕이 왕위에 오를 때 아직 뱃속에 있었던 장조카인 김수충이 태어나 성장하면 그를 태자로 삼아 왕위를 돌려주기로 약속하였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러했기 때문에 성정왕후는 그때까지 효소왕의 유일한 혈손인 왕자 김수충을 왕궁 안에서 키우며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성덕왕은 이 때에 이르러 그 약속을 깨고 자신의 장자인 김중경을 태자로 봉해버리는 것이다.

  김수충의 어머니인 성정왕후로서는 당연히 강하게 반발했을 것이지만, 어찌되었든 성덕왕은 많은 재물을 주어 성정왕후를 왕궁에서 내 보내는데 성공한다.

  물론 이때 성정왕후로서는 왕궁에 계속 머무르며 버티고 싶었겠지만, 태자가 봉해진 상황에서 대세에 밀려 어쩔 수 없이 왕궁에서 나갈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7176월에 이르러 성덕왕이 태자로 봉했던 장자 김중경이 갑자기 죽는 불상사가 발생하게 되는데, 아마 이때 성덕왕에 반대하는 세력이 있어 성덕왕을 제거하려다가 태자 김중경과 그 어머니 엄정왕후 만을 죽이고 실패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이는 태자 중경이 죽자 시호를 효상(孝殤)이라 하였다고 하였고, 3년 후인 7203월에 성덕왕이 다시 이찬 김순원의 딸을 새로운 왕비로 맞아들이기 때문에 그렇게 추정해 볼 수 있다는 말이다.

  한편 이렇게 태자 중경이 죽자 효소왕비 성정왕후는 당나라에 가 있던 김수충에게 빨리 귀국하라는 연락을 취하였고, 9월에 이르러 김수충은 공자와 1072제자의 초상을 가지고 돌아와 대학에 비치하게 되는데, 이때 효소왕비 성정왕후가 김수충을 급히 귀국시킨 것은 그를 태자로 봉할 기회가 왔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성덕왕은 성정왕후의 바램과 달리 왕자 김수충을 태자로 봉하지 않는데, 아마 이때 성덕왕은 성정왕후가 자신을 시해하려했던 세력과 연루되어 있었던 것으로 의심하지 않았나 싶은데, 당시의 상황을 유추해보면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었다고 판단된다.

  그리고는 성덕왕은 3년이 지난 7203월에 이르러 다시 이찬 김순원의 딸을 맞아들여 두 번째 왕비로 삼았는데, 이가 소덕왕후(炤德王后)로서 김승경(金承慶), 김헌영(金憲英), 이름이 전해지지 않은 왕자 1명 이렇게 세 아들을 낳았는데, 성덕왕은 724년 봄에 이르자 이제 겨우 3살쯤에 지나지 않았을 김승경을 새로이 태자로 책봉하게 되고, 후일 이 김승경이 성덕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고, 이가 34대 효성왕이었다.

  그런데 이 효성왕이 후손없이 일찍 죽자 다시 그 동복동생 김헌영이 왕위를 잇게 되고, 이가 35대 경덕왕이었다.

경덕왕은 다시 그 아들 김건운(金乾運)에게 왕위를 전했는데, 이가 신라 36대 혜공왕이었고, 성덕왕의 혈손들은 이 혜공왕을 끝으로 더 이상 신라의 왕위에 오르지 못한다.

  성덕왕이 그렇게 형수인 효소왕비 성정왕후와 죽은 형의 유복자인 왕자 김수충의 가슴에 대못을 박아가면서 빼앗은 왕위였지만 겨우 손자 대에 이르러 끝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런데 필자의 관심은 성덕왕의 후손들이 아니라 이때 왕궁에서 쫓겨났던 효소왕비 성정왕후와 효소왕의 유복자 왕자 김수충이 그 후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갔을까이다.

  이후 기록이 없어 확실히는 알 수 없지만 미루어 생각해보면, 33대 성덕왕이 왕위에 있던 36년 내내 김수충은 철저한 감시 속에 살아야 했을 것이고, 34대 효성왕 재위기간 6년 그리고 35대 경덕왕 재위기간 24년 동안에도 마찬가지였을 것은 확실하다.

  왜냐하면 김수충은 신라 효소왕의 왕자였으므로 언제라도 왕으로 추대될 수 있는 자격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 김수충은 평생동안 감시를 받으며 살아가야 했을 것인데, 당나라에 갔다가 돌아온 그 이후의 기록이 전혀 없는 것이다.

  따라서 김수충이 후손도 없이 쓸쓸히 살다가 죽어 갔는지, 아니면 세상을 원망하며 어느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서 조용히 살다 죽었는지, 신라가 싫어져서 멀리 다른 곳으로 이사 가서 신분을 숨기고 살았는지, 그것도 아니라면 다시 당나라로 가 버렸는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명문거족이며, 유학자가 많이 배출된  광산김씨(光山金氏)들은 그 시조가 신라왕자였다는 것만 전해졌을 뿐 그 확실한 신분은 알지 못한다고 한다. 그리하여 시조의 신위에 신라왕자라고만 표기한다고 한다.

 

광산김씨들은 지금 후대의 기록들을 근거 삼아 시조가 신라왕자 김흥광(金興光)이라 하기도 하고, 45대 신무왕의 3자라고도 한다는데, 확실한 것은 아니라 한다. 신라 33대 성덕왕 김흥광(金興光)과는 동명이인이라고 하는데, 과연 신라왕조에서 선왕의 이름자를 후대의 왕자 이름에 붙일 수 있었을지 의심스럽다.

 

 

  그렇다면 혹시 광산김씨들이 행방이 묘연해진 비운의 신라왕자 김수충의 후손일 가능성은 전혀 없는 것일까?

  왜냐하면 왕위를 빼앗기고 감시 속에서 살아야 했을 효소왕의 왕자 김수충이 신라 서라벌(금성)을 떠나 멀리 나라의 서쪽 끝 무진주[光山]로 옮겨 가서 신분을 숨기고 서민처럼 조용히 살았고, 그 후손들 역시 신분을 노출시키지 않고 살다가 신라가 멸망하고 고려 시대가 되자 그 때에 이르러서야 다시 세상에 나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경주김씨가 아닌 광산김씨로.................

 

  만약 이것이 사실로 확인된다면, 광산김씨의 선세는 족보가 전해지지 않아 알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효소왕, 신문왕, 문무왕, 태종무열왕, 진지왕, 진흥왕, 지증왕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게 되는 것이고, 선세가 아니라 오히려 신라말 혼란스런 시기에 해당하는 중대의 족보가 전해지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인데, 이는 그 시절에 신분을 기록으로 남겨 전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 이해할 수도 있는 것이다.

 

참고로 신라 왕자  김수충과 광산김씨의 족보를 연결시켜보면 아래와 같이 된다.

 

 [광산김씨 혈통 찾기]

 

세대    휘    추정출생연도              신분 및 관직

왕자 김수충   (702- ) 신라 32대 효소왕의 왕자로서 유복자로 출생. 효소왕의 동생이 33대 성덕왕 김흥광이었다.

자         ?         (725- ) (실전)

자         ?       (750- ) (실전)

자         ?       (775- ) (실전)    실전시기는 무진주로 이주하여 신분을 숨기고 살며,

자         ?       (800- ) (실전)    족보를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에 족보를 알 수 없게

자         ?       (825- ) (실전)    되었을 것임

자         ?      (850- ) (실전)

자         ?      (875- ) (실전)

자    김흥광  (900- ) 현재 광산김씨 시조라 함(신라왕자 김수충의 후손으로서 실제 신라왕자가 아니라 왕자의 후손일 것임)

자    김식     (925- ) 각간

자    김길     (950- ) 삼중대광공신 : 신라가 멸망하고 고려시대가 되자 출사한 것으로 추정됨

자    김준     (975- ) 좌복야

자    김책     (1000- ) 평장사 증문정공

자    김정준 (1025- ) 평장사

자    김양감 (1050- ) 문하시중 증문안공

자    김의원 (1075- ) 평장사 증충정공

자    김광준 (1100- ) 비서감(대균,용 형제가 있었음)

자         ?     (1125- ) (실전)

자    김주영 (1150- ) 호부상서 증동지추밀원사

자    김광존 (1175- ) 증지문하부사

자    김대린 (1200- ) 판병부사 증문하시중평장사

자    김련     (1225- ) 첨의시랑찬성사 판판도사사 증양간공

자    김사원 (1250- ) 첨의찬성사 증정경공

자    김진     (1275- ) 정당문학예문관대제학 증장영공

자    김영리 (1300- ) 판군기사사

자    김정     (1325- ) 추성보리공신 광성군

자    김약채 (1350- ) 충청도관찰사 증예조판서 : 충청도 연산현 입향조

자    김문     (1375- ) 예문관검열 증좌찬성 배위 증정경부인 양천허씨 : 조선시대

자    김철산 (1400- ) 광성부원군 사헌부감찰 증영의정 (김문의 유복자)

자    김국광 (1425- ) 좌의정 광산부원군

자    김극뉴 (1450- ) 대사간

자    김종윤 (1475- ) 진산군수 증병조참의

자    김호     (1500- ) 지례현감 증좌찬성

자    김계휘 (1525- ) 예조참판 증이조판서 (실제생몰연도 1526-1582)

자    김장생 (1550- ) 형조참판 증영의정 증문원공 (실제생몰연도 1548-1631)

자    김집     (1575- ) 판중추부사 증문경공 (실제생몰연대 1574-16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