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제왕운기는 왜 백제에 34왕이 있었다고 기록했을까? - 최초주장
이승휴의 제왕운기 백제기를 보면,
“......소정방에게 명하여 사비로 진격해서
수륙으로 비처럼 시석을 퍼부었네.
수많은 궁녀들은 청류에 투신하고
낙화암만 대왕포에 우뚝 솟아있네.
돌아보니 678년에 34왕이 천복을 누리었네” 라고 노래하고 있다.
제왕운기는 고려 충열왕 13년(A.D.1287)에 당시 64세였던 이승휴(李承休)가 삼척 두타산에 은거하며 저술한 서사시로서 충렬왕에게 바쳐졌던 글인데, 내용 중 우리의 상식과 다른 부분들이 눈에 띈다.
그 중에서 우리의 역사상식으로는, 백제는 기원전 18년에 온조왕이 나라를 세워 서기 660년 31대 의자왕 때 이르러 나당 연합군의 침공을 받고 멸망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지금 백제가 31왕 678년 만에 멸망하였고, 그 땅을 신라가 차지하였다고 알고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승휴는 제왕운기에서 백제의 역년이 678년이라는 것은 우리의 상식과 일치하게 기록했으나, 백제가 34왕까지 이어졌다고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기록이 있다보니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지으면서 역사를 왜곡했다고 하는 사람까지 생겨나게 되었고,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믿지 못하겠다는 사람들이 있으나 이는 삼국역사를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헛된 주장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승휴는 왜 백제가 31왕이 아닌 34왕까지 이어졌다고 노래했던 것일까?
백제 초기의 왕위계승도를 그려보면 아래와 같다.
시조 온조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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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실명 :온조왕보다 먼저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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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대 다루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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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실명 : 다루왕보다 먼저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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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 기루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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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실명 : 기루왕보다 먼저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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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 개루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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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대 초고왕
이랬을 경우,
2대 다루왕은 시조 온조왕의 손자로서 그 할아버지 온조왕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은 경우가 되고,
3대 기루왕은 2대 다루왕의 손자로서 그 할아버지 다루왕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았다는 말이 되며,
4대 개루왕은 3대 기루왕의 손자로서 그 할아버지 기루왕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았다는 말이 되고, 백제 초기에는 왕위계승이 간신 간신히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때 2대 다루왕은, 온조왕의 태자로 봉해졌었으나 그 아버지 온조왕보다 일찍 죽는 통에 왕위에 오르지 못한 자신의 생부에 대하여 어떠한 예우를 할 수 있으며,
3대 기루왕 역시, 다루왕의 태자로 봉해졌었으나 그 아버지 다루왕보다 일찍 죽는 통에 왕위에 오르지 못한 자신의 생부에 대하여 어떠한 예우를 할 수 있으며,
4대 개루왕 역시, 기루왕의 태자로 봉해졌었으나 그 아버지 기루왕보다 일찍 죽는 통에 왕위에 오르지 못한 자신의 생부에 대하여 어떠한 예우를 할 수 있었을까?
필자가 보기에 그 죽은 아버지를 왕으로 증직하는 제도를 활용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왕으로 증직한다는 것은 그 인물이 생전에 실제로 왕위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죽은 그에게 왕위를 부여하고 모든 면에 있어 실제 왕위에 올랐던 왕들과 동일하게 예우한다는 의미이다.
즉 묘를 왕릉의 격에 맞도록 고치고, 종묘에 위패를 봉안하며, 다른 왕들과 나란히 철따라 제사지내는 것 등이다.
왕으로의 증직은 자식된 도리로서는 그 죽은 아버지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예를 다하는 것이라 할 수 있으니, 아마 백제 시대에도 이랬을 가능성이 많은 것이다.
이렇게 3왕을 추가하면 백제는 31왕이 아니라 34왕이 된다.
아마 이승휴는 이렇게 왕으로 증직(추증)되어 있는 어느 기록을 보고 백제의 왕대가 34왕이라고 했던 것이 아닌가 싶은 것이다.
☆ 삼국사기에는 2대 다루왕을 온조왕의 원자, 3대 기루왕을 다루왕의 원자, 4대 개루왕을 기루왕의 아들이라 기록하고 있으나 생몰연대를 따져볼 때 사실 일 수 없다. 손자를 아들로 잘못 기록한 것이다.
졸본부여 건국시조 동명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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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대 부여무서왕 ?(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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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건국시조 주몽왕 부여우태 = 소서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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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왕 비류 백제 건국시조 온조왕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백제는 졸본부여 동명왕의 후예가 세운 나라로서 졸본부여는 건국시조 동명왕 2대 부여무서왕으로 이어졌는데, 이때 아들없이 딸만 셋을 둔 부여무서왕이 동부여에서 도망쳐 졸본으로 온 주몽을 둘째 사위로 삼았고, 왕이 죽은 후 주몽이 그 왕위를 잇게 되고, 다시 그 뒤를 유리왕이 잇게 된다.
백제 시조 온조와 비류의 할아버지는 지금 실명되어 그 이름을 알 수 없다. 아버지는 부여우태였고 어머니는 소서노였는데, 부여우태는 비류, 온조가 어릴 때 죽었다.
그리하여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어 있던 그 어머니 소서노는 비류와 온조 두 아들을 데리고 당시 졸본부여의 왕위에 올라 있던 주몽왕과 재혼을 하게 되는데, 이는 졸본부여의 다음 왕위를 자신이 낳은 아들에게 물려받게 하려는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정작 칼자루를 쥐고 있는 주몽왕은 비류나 온조에게 왕위를 물려 줄 마음이 전혀 없었고, 자신이 동부여에 있을 때 낳은 친아들 유리가 오면 왕위를 물려주겠노라 선언하게 된다.
그리하여 소서노는 자신의 아들로 졸본부여의 왕위를 잇게 할 수 없음을 깨닫고 두 아들을 데리고 졸본을 떠나 진번 남쪽 한산부근으로 옮겨가 살다가 그곳에 백제를 건국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백제 시조 온조왕은 왕위에 오른 후 자신들이 졸본부여 동명왕의 혈통을 이어 받았다는 의미로 위례성에 맨 먼저 동명왕의 사당을 세웠고, 백제의 왕들은 왕위에 오르면 반드시 동명왕의 사당에 고했다.
그렇다면 왕위에 오른 온조왕은 자신의 실명된 친할아버지와 친아버지인 부여우태를 어떻게 예우할 수 있었을까?
“왕으로 증직”하는 방법이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백제 왕실에서 졸본부여의 건국시조 동명왕과 온조왕의 실명된 할아버지 그리고 온조왕의 아버지 부여우태 두 명을 증직한 후 백제 역사에 합하면 백제의 왕대 31왕에 3왕을 더하면 34왕이 되지만 이렇게 했을 경우 백제의 역년 678년과는 일치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