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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구려(句麗)의 위치찾기 - 최초공개

윤여동 2016. 2. 27. 07:42

윤여동설 - 구려(句麗)의 위치찾기 - 최초공개

 

 

  후한서 고구려전을 보면,

  고구려에 이어 구려(句麗)”에 대하여 별도로 기록을 남기고 있다.

  그런데 아직까지 이 구려가 정확히 지금의 어디를 말하는지 밝혀지지 않고 있었는데 이제 그 위치를 찾아 공개한다.

  우선 후한서의 구려(句麗)에 대한 기록을 보자.

 

  “구려는 일명 맥()이라 한다.

  별종으로서 소수(小水)에 의지하여 살기 때문에 소수맥(小水貊)이라 한다.

  좋은 활이 생산되는데 소위 맥궁(貊弓)이라 한다.

  왕망 초에 구려의 군사를 징발하여 흉노를 정벌하게 하였으나 그들이 가지 않으려해 강압적으로 보냈더니 모두 국경 너머로 도망한 뒤 중국의 군현을 노략질 하였다.

  요서대윤 전담이 그들을 추격하다가 전사하자 왕망이 장수 엄우로 하여금 치게 하였다. 엄우는 구려후 추를 유인하여 국경 안으로 들어오게 한 뒤 목을 베어 그 머리를 장안에 보냈다. 왕망은 매우 기뻐하며 고구려왕의 칭호를 하구려후라고 부르게 하였다. 그리하여 맥인이 변방을 노략질하는 일이 더욱 심해졌다.

  건무8(A.D.32) 고구려가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므로 광무제가 그 왕호를 회복시켰다.

  건무 23(A.D.47) 겨울 구려의 잠지락 대가 대승 등 1만여명이 낙랑에 투항하였다.

  건무 25(A.D.49) 봄 구려가 우북평, 어양, 상곡, 태원을 침입하여 노략질 하는 것을 요동태수 제융이 은의와 신의로 대하니 모두 요새 밖으로 철수 하였다.

  후에 구려왕 궁(태조대왕)이 태어나면서 눈을 뜨고 능히 볼 수 있었으니 나라 사람들이 경외하였다. 장성하여 용감한 장부가 되어 변경을 자주 침범하였다.

  화제 원흥 원년(A.D.105) 봄에 다시 요동을 침입하여 6개현을 노략질 하므로 태수 경기가 격파하고 그 거수를 죽였다.

안제 영초 5(A.D.111) 궁이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치고 현토에 속하기를 원했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기록 속에서 이 구려의 위치를 추정해 볼 수 있다.

  즉 구려는 요수의 지류인 소수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고, 낙랑군, 요동군, 현토군과 접경하고 있었으며, 우북평, 어양, 상곡, 태원을 쉽게 침공할 수 있는 위치였으며, 흉노와도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었음을 알 게 한다.

 

  구려(句麗)는 지금의 북경 북쪽 연경(延慶) 부근을 말하는 것으로서 이 부근이 후일 고구려의 도읍 국내성이 되는 곳이다.[위 지도참조]

  연경은 팔달령장성과 협곡의 경치가 매우 좋은 용경협(龍慶峽)으로 더욱 유명해 진 곳인데, 그 부근에 옛 구려의 선조들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선사주거지 고애거(古崖居)라는 곳도 있고, 또 지금은 퇴락했지만 옛 고구려의 국내성터로 비정되는 영녕고성(永寧古城)도 있으니 고구려를 생각하며 둘러보면 의미가 새로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