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백제 무령왕릉 또 하나의 미스테리
결혼식을 할 때 신랑은 동쪽(左)에 서고, 신부는 서쪽(右)에 서는 것이 원칙이고, 회갑, 칠순, 팔순연에도 남편은 동쪽에 앉고, 부인은 서쪽에 앉는다.
이를 남좌여우(男左女右)원칙이라고 하는데, 그리하여 죽은 부부의 무덤을 조성할 때도 남편은 동쪽(左)에, 부인은 서쪽(右)에 매장한다.
[많은 사람들이 좌측(왼쪽)이 동쪽을 말하고, 우측(오른쪽)이 서쪽을 말하는 것이라는 것을 모르고, 거꾸로 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옛날 조선시대에 경상좌도는 경상동도라는 의미이고, 경상우도는 경상서도라는 의미였음을 생각해 보면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것이고, 강좌라고 하면 강의 동쪽을 말하는 것임을 생각하면 된다.]
그리고 머리방향은 능선일 경우 높은 쪽으로 향하도록 매장하고, 남쪽 방향으로 뻗어내린 능선에 무덤을 조성할 경우 머리방향은 북쪽방향으로 향하도록 매장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백제 25대 무령왕릉은 많은 미스테리에 싸여 있는 능인데, 필자는 오늘 또 하나의 미스테리를 더하려고 한다.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듯이 무령왕릉(송산리 7호분)은 처녀분이었고, 잘 만들어진 전축분이었다. 그리고 외부에서 침입했다거나 도굴의 흔적이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처음 발굴할 때 이상하게도 부장품들이 매우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고, 석수(진묘수)의 다리 하나는 부러져 있었는데, 지금까지도 그 이유를 명쾌하게 설명하는 이가 없다.
☆ 신라 41대 헌덕왕 때 웅천주도독 김헌창이 일으킨 난 때 죽은 김헌창의 시신을 고총(옛무덤)에 숨겨 두었었다는 삼국사기 기록을 보고는 그 고총이라는 곳이 곧 무령왕릉일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럴 듯하지만 이는 사실은 아니다. 만약 당시 무령왕릉 묘실에 누군가가 들어갔었다면 금붙이와 옥구슬 등 값비싼 보물들을 보고도 가져가지 않고, 단지 흐트려 놓기만 할 사람은 세상에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부부가 죽어 무덤을 합장으로 조성할 경우, 시신의 머리는 북쪽방향, 또는 지형상 높은 쪽으로 향하도록 한다.
☆ 묘소에 세워져 있는 비문들을 보면 “유인(孺人) 본관 ◯씨 부좌(祔左)”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는데, 이는 부인을 그 남편의 왼쪽(左:동쪽)에 매장했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연도에서 무령왕릉 내부묘실을 바라보면,
왕의 관이 동쪽에, 왕비의 관이 서쪽에 놓여 있었고, 머리는 연도 방향(南)으로 향하도록 놓여 있었다.
시신의 위치는 남좌여우의 원칙에 따라 매장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나, 이상한 것은 무령왕릉(송산리 7호분)은 그 동북쪽 송산리 1,2,3,4호분으로부터 능선이 뻗어 내려오는 곳에 위치하고 있고, 출입구 역할을 하는 연도는 능의 남쪽방향에 설치되어 있으므로 왕과 왕비의 머리가 연도방향으로 놓여 있었다는 것은 사실은 머리와 발의 방향을 돌려 거꾸로 장사지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이는 일반적인 매장관습과는 정반대이다.
백제 왕실에서 장례예법을 몰랐을 리 없었을 것이고,
또 불경스럽게도 왕과 왕비의 시신의 머리방향을 거꾸로 돌려 장사지낼 리도 없었을 것인데, 왜 무령왕릉은 예법에 어긋나게 그렇게 조성했던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