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반도백제 무광왕(武廣王)이 세운 제석정사(제석사)의 창건연대는 370년경이다 - 최초주장
[익산 제석사지 목탑지 발굴당시 사진]
[제석사지 목탑 심초석 발굴, 정비 전 사진]
[익산 제석사지 출토 제석사(帝釋寺)명 와당]
[익산 왕궁리 5층석탑 출토 사리병]
관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 중 백제 무광왕 관련 기사를 보면,
百濟 武廣王 遷都 枳慕密地 新營精舍
백제 무광왕이 지모밀지로 천도하고 정사(절)를 새로 지었다.
以貞觀 十三年 歲次 己亥 冬十一月
그런데 정관 13년(A.D.639) 기해년 겨울 11월에
天大雷雨 遂災帝釋精舍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져 제석정사에 불이 났다.
佛堂七級浮圖 乃至 廓房 一皆燒盡
불당과 일곱 개의 탱화와 곽방 한 개가 모두 불탔다.
塔下礎石中 有種種七寶 亦有佛舍利 睬水精甁
탑아래 초석 가운데에는 여러 가지 칠보와 불사리가 들어있는 채수정병
又以銅作紙 寫金剛波若經 貯以木漆函
그리고 구리로 만든 얇은 판에 금강반야경을 베껴 목칠함에 넣었었다.
發礎石開視 悉皆燒盡
초석의 뚜껑을 열어보니 모두가 타버렸고,
有佛舍利甁與波若經漆函如故
불사리병과 반야경칠함만 남아 있었다.
水精甁內外徹見 蓋亦不動
수정병 내외가 보였으나 뚜껑이 열리지 않았다.
而舍利悉無 不知所出
그런데 사리는 하나도 없었다. 어떻게 나갔는지 알 수 없었다.
將甁以歸大王
얼마 후 병을 대왕에게 가져다 놓고
大王請法師 發卽懺悔 開甁視之
대왕이 법사를 청하여 참회하게 하고 뚜껑을 열어보니,
佛舍利 六箇俱在處內甁
불사리 여섯 개가 병 안에 고스란히 들어있었다.
自外視之右一條 普門品云 火不能燒
이와같은 것을 볼 때 보문품은 불로도 능히 태울 수 없는 것이다.
夫聖人神迹 導化無方
무릇 성인의 신기한 기적은 온 세상을 인도하고 교화하도다.
若能至心仰信
어찌 마음으로부터 우러나 믿지 않을 손가
無不照復捨
다시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을 리 없을 것이다.
右條追繼焉
이와같은 일은 계속하여 일어나리라.
라고 기록되어 있어 많은 사람들은 제석정사(제석사)가 정관 13년인 639년 기해년에 지어졌고, 완공되자마자 불이 나서 모두 소실되어 폐사지가 되었다고 생각하여 제석정사(제석사)가 백제 30대 무왕 때 창건된 절이었다고 확신하는 듯하다.
그러나 절을 지은 시기와 불에 탄 시기가 다르다면 이야기가 많이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절을 짓고 나서 100년 후 또는 200년 후, 300년 후에 불이 날 수도 있는 것이니까.............
그런데 이 제석정사(제석사)는 “백제 무광왕이 지모밀지로 도읍을 옮기고 나서 절을 새로 지었다”고 하였으니, 이 절의 창건연대를 알려면 무광왕이 천도한 시기를 알면 되는 것이고, 창건연대를 알게 되면 불이 난 시기인 서기 639년(정관 13년)과 비교하여 제석정사(제석사)가 창건된 지 몇 년 후에 폐사되었는지도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런데 무광왕의 천도시기를 알아내기 위해서는 먼저 백제왕실에 피비린내 나는 왕위다툼이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원래 백제의 건국지는 한반도가 아니라 지금의 중국 하북성 진황도에 위치하고 있는 도산(都山) 남쪽 부근이었는데, 8대 고이왕이 7대 사반왕의 왕위를 찬탈하므로 해서 그 때부터 백제는 장자파와 차자파 간에 왕위쟁탈전을 벌이게 되는 것인데, 고이왕은 차자파였다.
그러다가 장자파인 11대 비류왕이 왕위를 쟁탈했고, 다시 차자파인 12대 계왕이 344년 10월에 왕위에 올라 재위 3년만인 346년 9월에 죽게 되는데, 이때 죽은 계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사람은 계왕의 아들이 아니라 장자파인 13대 근초고왕이었다.
이때 장자파인 근초고왕이 차자파인 계왕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아 백제의 왕위에 올랐다는 말이 된다.
그러자 차자파인 계왕의 아들은 빼앗긴 왕위를 되찾으려 하였고, 그 왕위를 빼앗기지 않으려는 장자파 근초고왕 사이에 왕위다툼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결국 백제는 두 파로 나누어지게 되었고 내란으로 치닫게 된다.
그러다가 20여년의 내란끝에 365년경에 이르러 승패가 판가름 나게 되고, 결과는 장자파인 근초고왕이 승리하고 차자파인 계왕의 아들이 패하게 되어 승리한 근초고왕은 대륙백제의 왕위를 지켰고, 패한 계왕의 아들은 어디론가 도망쳐야만 했을 것이다.
그런데 관세음응험기에 “백제 무광왕이 지모밀지로 천도하고 절을 새로 지었다”라는 기록이 나타나고,
남제서에는 동성왕에게 그 할아버지 백제 모도왕의 작위를 계승하게 한다고 하면서 백제 모도왕이 언급되며,
무령왕은 503년에 기술자를 보내 남제왕의 만수무강을 기원하기 위하여 동경(스타하치망 인물화상경)을 제작하는데,
삼국사기를 아무리 뒤져봐도 백제의 왕 중에 무광왕은 없고, 모도왕도 없으며, 남제왕도 없는데, 이들은 왜 이러한 기록들을 남겼던 것일까? 이들은 어디에서 어떻게 왕위에 올랐기에 백제왕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일까?
도대체 백제 무광왕은 누구인 것이며, 동성왕의 할아버지인 백제 모도왕은 또 누구이며, 남제왕과 무령왕은 무슨 관계이기에 무령왕이 남제왕을 위하여 동경을 만들어 바치는 것일까?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백제는 역사상 네 번의 위기상황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첫 번째 위기는 12대 계왕이 죽고 13대 근초고왕이 왕위에 오른 346년부터 근초고왕과 계왕의 아들 사이에 왕위다툼을 벌여 내란으로 번졌던 때였고,
두 번째는 396년에 광개토대왕의 침공을 받고 한성이 함락지경에 이르자 아신왕이 항복했을 때였으며,
세 번째는 475년에 고구려 장수왕의 침공을 받아 한성을 함락 당하고 개로왕이 잡혀 죽었을 때였고,
네 번째는 660년에 나당연합군의 침공을 받았을 때로서, 백제는 이 네 번째 위기는 넘기지 못하고 결국 나라가 멸망하고 말았는데, 나라가 분국이 될 위기상황은 근초고왕과 계왕의 아들 사이에 발생했던 왕위다툼 때 뿐이다.
따라서 무광왕이라는 인물은 대륙에서 근초고왕과의 왕위다툼에서 패한 계왕의 아들로 볼 수밖에 없는 것이고, 무광왕은 이때 대륙을 떠나 지금의 한반도 익산 금마에 도읍하고 다시 백제의 왕위에 올랐던 것이다.
☆ 필자는 두 백제를 구분하기 위하여 근초고왕의 백제를 대륙백제라 부르고, 무광왕의 백제를 반도백제라 부르고 있다.
그렇다면 무광왕은 바로 근초고왕(재위 346-375)과 동시대 인물이므로“백제 무광왕이 지모밀지로 천도하고 절을 새로 지었다”라는 관세음응험기 기록 속의 사찰인 제석정사(제석사)의 창건연대를 가늠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제석정사(제석사)는 무광왕이 365년경 한반도 지모밀지(지금의 익산 금마)에 도읍한 뒤 추진하여 짓기 시작했을 것이므로 370년경 창건되었을 것이고, 270여년 후인 정관 13년 639년 기해년에 화재로 불타 폐사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제석정사(제석사)의 창건연대가 고구려에 불교가 전래된 372년(소수림왕 2년)이나 대륙백제에 불교가 전해진 384년(침류왕 원년)보다 빠른 시기로서, 한민족 최초의 절은 370년경에 세워진 바로 이 제석정사(제석사)일 가능성이 많다.
☆ 반도백제 무광왕이 세운 제석정사(제석사)가 639년에 불탈 때 목탑의 심초석에 들어 있었다는 사리병과 금강경판 등과 같은 사리장엄구가 익산 왕궁리 5층석탑에서 출토되었는데, 추정해보면 제석정사(제석사)가 불 타버리자 당시 반도백제의 왕실에서는 그 절이 반도백제의 개국시조인 무광왕 때 지은 유서깊고 의미있는 절이기는 하지만 이미 519년 기해년에 지은 대가람인 미륵사가 있었기 때문에 제석정사를 제자리에 다시 복원하는 것은 포기하고 제석정사에서 수습된 사리장엄구를 장소를 옮겨 왕궁 내에 5층석탑을 새로 쌓고 그 속에 사리장엄구를 다시 넣었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