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고대의 요동군 양평현(襄平縣)은 지금의 북경 창평(昌平) 부근 - 최초주장
전한서 권28하 지리지 제8하를 보면,
“요동군
진나라 때 설치했는데, 유주에 속한다.
55,972호이고, 인구는 272,539명이며, 다스리는 현은 18현이다.
양평(襄平) : 목사관이 있고, 왕망이 창평(昌平)으로 고쳤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지금 많은 사람들은 전한서 기록 속 “요동군(遼東郡) 양평현(襄平縣)”의 위치를 전혀 엉뚱한 곳에서 찾고 있다.
양평(襄平)은 춘추전국시대 연나라가 고조선 땅 1천여리를 빼앗은 후 조양(造陽)에서부터 양평(襄平)까지 장성[이를 연장성이라 한다]을 쌓고 그곳에 요동군, 요서군, 상곡군, 우북평군, 어양군[이를 연5군이라 한다]을 설치했다는 곳이고,
후세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이 비려를 정벌하고 돌아올 때 고구려의 서쪽 국경지역에 위치하고 있던 양평(襄平)을 거쳐서 돌아 왔다고 기록되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후한 말의 어지러운 틈을 타서 요동을 차지하고 공손씨 정권을 세웠던 공손도(公孫度)의 출생지 역시 유주 요동군 양평현이라고 전한다.
그렇다면 진짜 고대의 요동군은 지금의 어디를 말하는 것이며, 양평현은 또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지금의 요하 동쪽이 고대에도 요동군이었을까?
아니다.
고대의 요동군은 지금의 북경 부근을 말하는 것이고, 고대의 요수는 지금의 영정하를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요동군 양평현은 당연히 지금의 북경 부근에서 찾아야 하는 것인데, 지금 북경 서북쪽 명13릉 가까이에 북경시 창평구(昌平區)가 있다.
“창평(昌平)”은 전한과 후한 사이 잠깐 존재했던 신(新)나라의 왕망이 요동 양평(襄平)을 창평(昌平)으로 바꾸었다는 곳인데, 지금 북경 서북쪽 가까이에 창평(昌平)이 옛날 왕망이 정해준 그 지명을 사용하고 있었는데도 역사학자들조차 그 창평(昌平)이 바로 옛 요동군 양평현(襄平縣)이었음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요동군을 지금의 북경부근이 아닌 요하동쪽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인데,
요동군의 위치를 제대로 찾아내지 못하면 옛 사서의 기록들을 올바르게 해석할 수 없게 된다.
요동군을 확실하게 찾아야만 옛날 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침공할 때의 기록을 제대로 해석할 수 있고,
수 양제의 고구려 침공기록을 제대로 해석할 수 있게 되며,
당 태종의 고구려 침공기록을 정확히 해석할 수 있게 된다.
또한 고려 말 요동을 정벌하려다가 회군했다는 이성계의 위화도회군 기록도 제대로 해석할 수 있게 된다.
요동군을 확실하게 찾으면 우리 고대사의 절반은 찾은 것이나 다름없다.
☆ 이글을 읽으신 역사연구자분들께서는 고려로부터 그 이전 우리 고대 역사에서 언급되는 요동군을 북경 부근으로 비정하고 사서의 기록들을 대입하여 해석하여 보시면 좋은 결론을 얻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