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한반도 김해는 금관가야의 도읍 금관성이 아니다 - 최초주장
삼국사기 신라본기 파사이사금 8년(A.D.87) 조를 보면,
"가을8월 왕이 명령을 내려 말하기를 '내가 덕이 없이 나라를 가져 서쪽으로는 백제와 이웃하고, 남쪽으로는 가야를 접하였는데도, 덕망은 백성들을 안정시키지 못하고 위엄은 외국이 경외하게 하기에 부족하다. 그러므로 성새와 보루를 수리하여 외적의 침략에 대비하라'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신라의 서쪽 국경은 백제와 접하였고, 남쪽국경은 가야와 접하고 있었음을 알게 하고,
삼국유사 가락국기를 보면,
『즉위 2년(B.C.43) 계묘 정월에 왕이 말하기를,
“내가 도읍을 정하려 한다” 하고는 곧 임시궁궐의 남쪽 신답평(新畓坪)으로 나아가 사방의 산악을 바라보다가 좌우 사람들을 보고 말했다.
“이 땅은 협소하기가 여뀌잎과 같지만 수려하고 기이하다.....” 하고는 여기에 1,500보 둘레의 성과 궁궐과 전당 및 여러 관청의 청사와 무기고와 곡식창고를 지을 터를 마련한 뒤에 궁궐로 돌아왔다.
두루 나라 안의 장정과 기술자들을 불러 모아 정월 20일에 성 쌓는 일을 시작하여 3월 10일에 공사를 끝냈다. 궁궐과 관청은 농사일이 바쁘지 않은 틈을 이용하니 그해 10월에 시작해서 갑진(A.D.44) 2월에 완성되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조선시대부터 한반도 김해를 금관가야의 도읍 금관성(金官城)이라고 인식하게 되었다.
그리고는 그곳의 어느 이름 모를 무덤을 가야 김수로왕릉과 허왕후릉이라 하고 있고, 김해에서 가야의 도읍성이었던 금관성터를 찾으려 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착각일 뿐 역사적 사실은 아니다.
[가야왕성으로 추정되는 지금의 요녕성 흥성고성]
금관가야의 금관성은 한반도의 김해(金海)가 아니라 지금의 발해 북쪽 요녕성 흥성(興城)을 말하는 것이다.
[산의 형상이 거북이를 닮아 구지봉이라 했을 것이다]
그곳의 흥성고성(興城古城)이 옛 금관가야의 왕성 금관성(金官城)으로 추정되는 곳이고, 그곳의 수산(首山)이 구지봉(龜旨峰)이며, 그 남쪽 앞바다에 있는 국화도(菊花島)가 망산도(望山島)이다.
한반도 김해에서 가야를 찾지 마라. 또한 금관성터도 찾지 마라.
천년을 찾아도 한반도 김해에서는 진짜 가야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왜냐하면 한반도 김해는 투후 김일제의 후손인 흉노족들이 왕망의 신(新)나라가 멸망하자 한반도로 도망쳐 와서 다시 왕국을 이루고 살던 곳이다. 그리하여 그곳의 고분들에서 흉노유물들이 출토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