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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위만의 옛 도읍 험독(險瀆)은 지금의 북경 남쪽 대흥부근 - 최초주장

윤여동 2017. 4. 15. 09:28

윤여동설 - 위만의 옛 도읍 험독(險瀆)은 지금의 북경 남쪽 대흥부근 - 최초주장

 

 

 

 앞서 위만이 연나라로부터 고조선으로 망명해 오자 고조선의 준왕은 위만을 나라 서쪽(사실은 서남쪽이다) 변경 백리 땅에 봉하여 그곳에서 살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그러자 위만은 그곳에 자리잡고 험독(險瀆)을 치소로 삼아 다스렸고, 가까이 위치한 제나라, 연나라, 조나라의 유민들을 끌어들여 세력이 강해지자 고조선의 도읍 왕검성(왕험성이라고도 한다)을 공격하여 준왕을 쫓아내고는 스스로 왕위에 올랐는데, 이가 곧 위만조선의 시작이었다.

  그런데 위만이 고조선으로 망명해 온 후 첫 치소로 사용했었다는 험독(險瀆)”의 위치는 지금까지 그 위치가 어디인지 오리무중이었다.

  험독(險瀆)에 대하여 전한서에는 요동군의 속현으로 기록되어 있고, 후한서에는 요동속국의 속현으로 나타나는데, 낙양 동북 3,260리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이 요동속국의 위치를 찾아낼 수 있다면, 험독의 위치도 좀 더 정확히 비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후한서 지제23 군국5를 보면,

  遼東屬國故邯鄕 西部都尉 安帝時以爲屬國都尉

  別領六城 雒陽東北 三千二百六十里

  昌遼故天遼 屬遼西

  賓徒故屬遼西

  徒河故屬遼西

  無慮有醫無慮山

  險瀆[史記曰王險 衛滿所都]

  房

  (요동속국은 옛 한향이다. 서부도위로서 안제 때 (요동)속국도위가 되었다.

  별도로 6개성을 다스리는데 낙양 동북 3,260리에 위치하고 있다.

  창요는 옛 천요로서 요서에 속했다

  빈도는 옛날에는 요서에 속했다

  도하는 옛날에는 요서에 속했다

  무려에는 의무려산이 있다

  험독[사기에 이르기를 왕험으로서 위만의 도읍이라 하였다]

  방)

 

험독과 왕험이 같은 곳이라는 생각은 틀린 것이다. 험독과 왕험은 서로 1천리 이상 떨어져 있는 완전히 서로 다른 곳이다. 원래 험독은 전한 시기에는 요수(필자주 : 지금의 영정하를 말한다)의 동쪽에 위치했던 요동군에 속해 있었고, 후한 때는 요동속국에 속해 있있었으며, 왕검성(왕험성)은 요동에서 동북쪽으로 1천리쯤 떨어진 패수동쪽에 위치했었다. 패수는 지금의 난하이다.]

 

  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전한 때 요동군에 속했던 험독(險瀆)이 후한 때는 요동군이 아닌 요동속국에 속했었음을 확인할 수 있고, 요동속국이 낙양 동북 3,260리에 위치했음을 알게 하는데, 같은 책인 이 후한서에는 요동군이 낙양동북 3,600리에 위치했다고 기록되어 있고, 요서군은 낙양 동북 3,300리에 위치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결국 이 요동속국은 요동군의 일부와 요서군의 일부를 나누어 설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요수의 동쪽에 위치했던 요동군은 지금의 북경 일원을 말하는 것이고, 요수의 서쪽에 위치했던 요서군은 지금의 영정하(필자주 : 이 강이 옛 요수였다) 서쪽 방산(房山) 일원을 말하는 것이므로 이 요동속국은 방산의 남쪽 영정하(옛 요수) 좌우에 설치되었을 것인데, 험독(險瀆)은 전한 시대에는 요동군에 속한 현이었으니 지금 방산의 남쪽 영정하 동쪽에 위치했을 것으로 추정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대개 지금의 북경 남쪽 대흥 부근이 옛날 위만이 고조선으로 망명해 와서 처음 자리 잡고 살았던 험독(險瀆)으로 비정되는 곳이다.

  그런데 찾고보니 험독의 위치가 옛날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침공할 때 고생하며 건너야 했던 요택(遼澤 : 요동늪)부근으로 나타나는데, 험독이 물에 의지하여 험하므로 험독(險瀆)이라 불리웠다고 하였으니 지형과도 일치한다.

  우리 역사의 비밀을 푸는 열쇠는 바로 요동군(遼東郡)의 위치를 올바로 찾는 것이다.

  지금의 북경 일원이 옛 요동군이었는데,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은 이 요동군의 위치를 알지 못하고, 지금의 요하 동쪽에서 맴돌고 있으니 사서에 기록되어 있는 역사의 현장을 찾지 못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