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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백제 5백리장성의 진짜위치 - 최초주장

윤여동 2017. 6. 9. 22:00

윤여동설 - 백제 5백리장성의 진짜위치 - 최초주장

 

   삼국사기를 보면 고구려, 백제, 신라가 각각 장성(長城)을 쌓았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실제 한반도에서 장성의 흔적은 어느 한곳도 발견되지 않고 있고, 후대인 고려시대에도 천리장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으나 그 역시 한반도에서는 장성의 흔적도 찾지 못하고 있다.

  왜 한반도에서는 역사서에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는 장성의 흔적들을 찾을 수 없는 것일까?

 

 

 

  백제 16대 진사왕 2(A.D.386) 조를 보면,

  "봄 국내의 15세 이상 되는 사람들을 징발하여 관방을 설치했는데, 그 길이가 청목령으로부터 북쪽으로 팔곤성에 닿고, 서쪽으로 바다까지 이르렀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삼국사기 기록 자체가 한반도의 반도백제에 관한 기록이 아니라 패수였던 지금의 난하를 중심으로 존재했던 대륙백제에 관한 기록이기 때문에 진사왕 때 쌓은 백제장성은 한반도가 아닌 대륙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다.

 

  앞서 백제는 근초고왕 때 고구려를 침공하여 평양성 전투에서 고구려 고국원왕을 활로 쏘아 죽이며 승전하였고 그 여세를 몰아 요서 진평현까지 진출하여 그 땅을 차지함으로써 국력이 급격히 강해졌고, 도읍을 남한성에서 북한산(한성)으로 옮겨 고구려를 압박하게 되는데, 이때 백제가 옮긴 도읍 한성(북한성)은 지금의 진황도 도산(都山) 남쪽이었다.

  그리고 뒤를 이은 근구수왕 때에도 수곡성(水谷城 : 지금의 하북성 승덕현 부근으로 비정된다)까지 진출했다는 기록이 전하고 있고, 침류왕 때에도 백제는 여전히 강국이었다.

 

  그런데 진사왕이 왕위에 오르고 난 후 국내의 15세 이상 된 백성들을 총동원하여 장성을 쌓는다.

  이때 백제의 진사왕은 지금의 하북성 관성(寬城 : 후일의 고려 도읍 개경으로 비정되는 곳이다) 부근의 청목령(靑木嶺)으로부터 장성을 쌓기 시작하여 서쪽으로 향하여 패수(난하)를 건너 지금의 유하(柳河) 부근을 따라 성을 쌓아 팔곤성(八坤城)에 이르렀고, 다시 서남쪽으로 방향을 돌려 흥륭 무령산 부근을 지나 밀운수고까지 장성을 쌓았을 것이다.

  이는 필자가 역사상 처음으로 주장하는 것으로서 그 거리가 약 500리쯤 되므로 백제 5백리장성이라 명명했다.

  그런데 이 백제 5백리장성은 고구려의 도읍이었던 평양성(평양성, 황성, 장안성으로서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 부근)의 바로 턱밑에 장성을 쌓은 셈이었다.

  [이 백제장성의 축성 위치는 후일 고려 때 원나라가 동녕부를 설치할 때 국경으로 했다는 자비령(절령이라고도 한다) 부근에 장성을 쌓은 듯하다]

  이는 백제로서는 도읍인 한성과 옛 마한, 대방지역을 고구려의 침공으로부터 막아내기 위하여 장성을 쌓은 것이겠지만 이 축성작업이 결국에는 고구려를 과도하게 자극하여 불과 몇 년 후인 392년에 고구려 광개토왕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백제를 침공하여 한수 북쪽과 관미성을 빼앗아 가게 되고, 영락 6년인 396년에 이르러서는 광개토왕에게 다시 58개성과 7백개촌을 빼앗겨야 했으며, 더구나 도읍인 한성(漢城)까지 포위당하여 백제 아신왕이 광개토왕 앞에 무릎꿇고 영원히 노객이 되겠습니다라고 맹세해야 하는 수모를 당하고 말았으니, 이때 진사왕이 쌓은 백제 5백리장성이 강역을 지키는데 이롭기 보다는 오히려 화근이 된 경우라 하겠고, 이후 백제는 서서히 국력이 쇠약해져 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