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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부여(동부여)의 녹산(鹿山)을 찾았다 - 최초공개

윤여동 2017. 9. 1. 11:27

윤여동설 - 부여(동부여)의 녹산(鹿山)을 찾았다 - 최초공개

 

 

 

 

 

 

  부여(동부여)가 녹산(鹿山)이라는 산 일원에 위치했음은 사서의 기록으로 전해져 알려졌다.

  그리하여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동부여의 정확한 위치를 확인하기 위하여 기록 속의 녹산을 찾게 되었다.

  그런데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에 이르러 이름만 전해진 그 녹산을 어찌 쉽게 찾을 수 있었겠는가!

  더구나 많은 사람들은 동부여가 위치한 적도 없는 엉뚱한 한반도의 백두산 북쪽에서 동부여를 찾으려 했고, 녹산을 찾으려 했으니 아무도 찾아낼 수가 없었던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런데 필자는 일찌감치 우리의 삼국과 가야가 한반도가 아닌 지금의 발해 북쪽 북경 부근에서 건국되었다가 멸망했음을 파악하고 있었고, 따라서 동부여 역시 한반도 북쪽이 아닌 북경의 북쪽 방향인 지금의 내몽골 정람기 부근에 위치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었다. 그러다보니 정람기 부근의 지형을 살피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정람기 부근의 지형지세가 과연 사서의 기록과 일치하는지를 확인해야 했기 때문이다.

  잘 아시다시피 내몽골 정람기 부근은 내몽골 평원 초원지역이다.

  그런데 사서에는 부여(동부여)가 동이 중에서 가장 평탄한 지역이었고, 넓은 호수도 있는 곳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기록과 정람기 부근의 지형은 거의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또 자치통감에는 부여(동부여)에 녹산(鹿山)이라는 산도 있다고 하였으니 그 녹산도 찾아야 동부여의 위치를 확신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녹산(鹿山)이란, 사슴산, 순록산이라는 의미로 볼 수 있을 것인데, 왜 하필이면 그 산 이름을 녹산이라 불렀을까 하는 것이 의문으로 대두되는 것이다.

  그 산에 사슴(순록)들이 많이 살기 때문에?

  그 산의 형상이 사슴(순록)을 닮아서?

  그런데 옛 사람들은 대개 그 지형의 특징을 따서 이름을 붙인 경우가 많다.

  즉 용산(龍山)이라 붙여진 산의 경우 대개 그 산의 형상이 용머리를 닮은 경우가 많고, 봉황산(鳳凰山)이라 붙여진 산은 거의 새 머리 모양이 나타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리하여 필자가 동부여로 추정되는 정람기 부근을 샅샅이 뒤져보았더니 그 동쪽에 커다란 사슴(순록)형상을 하고 있는 산이 있었던 것이다.

  그 산이 사슴(순록)의 형상을 닮았기 때문에 옛 사람들이 그를 알고 녹산(鹿山)이라 이름 붙였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이야 인공위성에서 찍은 사진을 누구나 볼 수 있기 때문에 찾기가 쉽지만 옛 사람들이 어떻게 그 산의 형상이 사슴(순록)을 닮았음을 알 수 있었는지 신기하기만 한데, 그 산은 지금 내몽골 정람기와 적봉 사이에 위치한 대광정자산(大光頂子山) 부근이다.

  부여의 녹산은 지금의 대광정자산 부근을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고, 결국 부여(동부여)는 그 부근에 위치한 나라였던 것이다.

  필자의 비정이 옳았던 것이다.

  부여를 한반도 북쪽에서 찾지 마라.

  북경 북쪽 내몽골 정람기 부근이 옛 동부여였다.

 

내몽골 정람기 부근에는 옛 고성터가 많은데, 필자가 보기에는 그 중에서 지금 학자들이 원 상도성터라고 하는 큰 성터가 옛 동부여의 도읍성이었던 부여성으로 비정되는 곳이다.

 

부여(동부여)의 위치

 

  부여국은 현토의 북쪽 1천리에 있다. 남쪽은 고구려, 동쪽은 읍루(말갈), 서쪽은 선비와 접하였고, 북쪽에는 약수(弱水)가 있다. 땅이 2천리인데 본래는 예()의 땅이었다.[후한서 부여국전]

 

 부여는 장성의 북쪽에 있는데, 현토에서 1천리 거리에 있다. 남쪽은 고구려, 동쪽은 읍루(말갈), 서쪽은 선비와 접했고, 북쪽에는 약수가 있다. 땅이 사방 2천리이며 백성은 8만호이다. 그 나라 사람들은 흙으로 집을 짓고 살며, 궁실, 창고, 감옥이 있다.

  산과 능선이 많고, 넓은 못이 있으며, 동이지역에서는 가장 평탄하다. 토질이 오곡은 잘 되나 오과(과일)는 생산되지 않는다. 그 나라 사람들은 체격이 크고 성질은 강건하고 용감하며, 근엄하고 후덕하여 침략하거나 노략질하지 않는다.[삼국지 부여전]

 

  부여국은 현토의 북쪽 1천여리에 있다. 남쪽은 선비와 접했고, 북쪽에는 약수가 있다. 땅이 사방 2천리이고, 백성은 8만호이다. 성읍과 궁실이 있으며, 토양은 오곡이 잘된다. 그 사람들은 강건하고 용감하다.[진서 부여국전]

 

부여(동부여)의 녹산(鹿山)에 대한 자치통감의 기록

 

  영화2(A.D.346) 처음에 부여는 녹산에 있었으나 백제(?)의 침공을 받고 부락이 쇠산해져서 서쪽으로 연나라 가까이 옮겨갔는데, 미처 방어할 설비를 갖추지 못했다. 연왕 황(모용황)이 세자 준(모용준)을 보내 모용군, 모용각, 모여근과 군사 17천의 기병을 이끌고 부여를 습격하였다. 준이 중앙에서 지휘하고 군사의 일은 모용각에게 일임하여 마침내 부여를 정벌하고 그 왕 현과 부락민 5만여명을 포로로 잡아 돌아왔다. (모용황)이 현을 진군장군으로 삼고, 그 딸은 처로 삼았다

[永和二年(A.D.346) 初 夫餘居于鹿山 爲百濟所侵 部落衰散 西徙近燕 而不設備. 燕王皝遣世子儁帥慕容軍·慕容恪·慕輿根三將軍·萬七千騎襲夫餘. 儁居中指授 軍事皆以任恪 遂拔夫餘 虜其王玄及部落五萬餘口而還. 皝以玄爲鎭軍將軍 妻以女] [資治通鑑 卷九十七 晉紀十九 孝宗穆皇帝上之上]

 

백제가 부여를 공격했다(爲百濟所侵)는 것은 고구려의 오기임이 확실하다.

위 그림에서 보듯 백제가 고구려를 넘어 동부여를 침공할 수는 없다.

 

☆ 대광정자산(大光頂子山)은 고대의 태백산(太白山), 백두산(白頭山), 장백산(長白山)으로 비정되는 산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