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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원래의 창해군 예(蒼海郡, 滄海郡 ,濊)와 이동 후 동예(東濊)의 위치 찾기 - 최초공개

윤여동 2017. 10. 21. 12:11

윤여동설 - 창해군 예(蒼海郡, 滄海郡, 濊)와 이동 후 동예(東濊)의 위치 찾기 - 최초공개

 

 

 

  후한서 예() 전을 보면,

  “()는 북쪽으로는 고구려와 옥저, 남쪽으로는 진한과 접했고, 동쪽은 대해에 닿았으며, 서쪽은 낙랑까지이다.

, 옥저, 고구려는 본래 모두 조선(고조선) 땅이었다.

 

  원삭 원년(B.C.128) 예군(濊君) 남려(南閭) 등이 우거(위만조선 3대왕)를 배반하고 28만구를 이끌고 요동(요동군)으로 내속하였으므로 (전한) 무제는 그 땅을 창해군(蒼海郡)으로 만들었다가 수년 후에 폐했다.

 

이때 예()가 전해지지 않은 어떤 이유로 위만조선과 갈등을 빚어 그 영향력에서 벗어나 전한(前漢)의 영향권 안으로 들어갔다는 말이고, 그 후에도 위만조선이 임둔국, 진번국 등 영향권 안에 있던 나라들의 전한과의 교류를 차단하자 결국 전한과 위만조선이 갈등을 빚게 되어 기원전 108년에 이르러 한 무제가 순체와 양복을 보내 위만조선을 침공하게 되는 것이다.

 

  원봉3(B.C.108)에 이르러 조선(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낙랑, 임둔, 현토, 진번으로 나누었다.

  소제 시원5(B.C.82)에 이르러 임둔과 진번을 폐지(필자주 : 이때 임둔군은 동예가 되었고, 진번군은 맥국이 되었다) 하여 낙랑과 현토에 병합했다.

  현토를 다시 구려(필자주 : 기원전 75년에 현토군을 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겼다)로 옮기고 단단대령 동쪽의 옥저와 동예, 맥(필자주 : 이때 옥저, 동예, 맥의 남은 일부를 낙랑군에 붙이고, 낙랑동부도위를 설치하게 된다)은 모두 낙랑에 속하게 하였다.

  뒤에 그 지역이 넓고 멀어 다시 대령(단단대령) 동쪽의 일곱 개 현을 나누어 낙랑동부도위를 설치하였다................

  건무 6(A.D.30) 도위(낙랑동부도위)를 폐지하고 대령(단단대령) 동쪽의 땅을 포기하고 그 거수로서 현후를 삼고 모두 때때로 조하하도록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동(), 맥(貊)이 고구려, 옥저의 남쪽, 진한(신라)의 북쪽, 낙랑의 동쪽 바닷가에 위치했음을 알게 하고,

  또 후한서 예전과 삼국지 예전을 보면 그 나라 노인들이 말하기를 자기들은 고구려와 동종이다라고 한다고 기록하고 있고, 언어와 법속도 대체로 같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삼국지 부여(동부여)전을 보면,

  “부여는 장성의 북쪽에 있는데, 현토에서 1천리 떨어져 있다.

  남쪽은 고구려, 동쪽은 읍루, 서쪽은 선비와 접했고, 북쪽에는 약수가 있다.

  땅이 사방 2천리이며 백성은 8만호이다..............

  그 나라의 옥새에 예왕지인(濊王之印)이라 새겨져 있고, 나라 가운데에 예성(濊城)이라 부르는 옛 성이 있으니 아마 이곳이 본래는 예(濊), 맥(貊, 필자주 : 이 맥은 오기일 것이다)의 땅이었으나 부여가 그곳을 차지하고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자기들 스스로 망명해온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이 말은 곧 동부여의 시국처가 원래는 예국(濊國) 땅이었음을 알게 하고, 또 동부여의 백성들은 그곳에 원래부터 살던 사람들이 아니라 타 지역에서 그곳으로 이주해 온 사람들이었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이는 곧 예가 원래 자기들이 살던 땅을 동부여에게 빼앗기자 다른 곳으로 옮겨 갔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동부여는 언제 예의 땅을 빼앗아 건국되었으며, 또 예는 그 땅을 빼앗기고 어디로 옮겨 갔던 것일까?

 

  삼국유사 기이제1 동부여 조를 보면, “북부여의 왕 해부루의 대신 아란불의 꿈에 천제가 내려와서 말하기를, ‘장차 내 자손으로 하여금 이곳에 나라를 세울 것이니 너는 다른 곳으로 피해가도록 하라(이것은 동명왕이 장차 일어날 조짐을 말함이다). 동해 바닷가에 가섭원이라는 곳이 있는데, 땅이 기름지니 왕도를 새울 만할 것이다하였다. 이에 아란불은 왕에게 권하여 그곳으로 도읍을 옮기고 국호를 동부여라 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환단고기 북부여기 하 5세단군 고두막(혹은 두막루) 을미 23(A.D.86) 조를 보면, “북부여가 성읍을 들어 항복하였는데, 여러 차례 (사직을) 보전하고자 애원하므로 단제가 이를 듣고 해부루를 낮추어 제후로 삼아 차릉(岔陵)으로 옮기게 하고는 북치고, 나팔 불며 수만 군중을 이끌고 도성에 들어와 북부여(필자주 : 졸본부여이다)라 칭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동부여의 건국시기가 기원전 86년이었음을 알 수 있고, 따라서 예도 그 시기에 원래 그들이 살던 땅을 동부여에게 빼앗기게 되자 이동하여 옥저의 동남쪽이며, 진한의 북쪽, 낙랑의 동쪽에 해당하는 곳인 바닷가에 다시 나라를 세운 것으로 이해되고, 예가 장소를 옮겨 다시 세운 나라를 동예라 불렀는데, 필자가 보기에 그곳은 바로 한사군 중 임둔군에 해당하는 곳이었다.[위 그림참조]

 

4군 중 임둔군과 진번군은 원봉 3년인 기원전 108년에 지금의 내몽골 고륜기, 능원 일원에 설치되었다가 소제 시원 5년인 기원전 82년에 이르러 폐지된다.

예가 원래 자기들이 살던 땅을 동부여에게 빼앗기자 그곳을 떠나 개마산(또는 단단대령) 동쪽의 임둔군 땅으로 옮겨가 예(濊 : 동예)를 다시 재건하고, 진번군 땅에서 맥국이 세워지자  한나라에서는 그 임둔군과 진번군을 폐지하게 되고, 한나라에서는 그들을  예와 맥이라 부르게 되어 원래의 창해군 위치를 찾기가 힘들었다고 판단된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예가 위치를 이동하였음을 간과하고 원래부터 진한의 북쪽에만 위치했던 것으로 사서의 기록을 이해했기 때문에 창해군의 위치에 대하여 설왕설래 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된다.

 

 

  결론적으로 한 무제가 처음 창해군(滄海郡, 蒼海郡)을 설치했던 곳은 원래의 예국(濊國)이 위치했던 후일의 동부여 땅이라 할 수 있을 것인데, 동부여의 위치가 지금의 내몽골 정람기 부근으로 나타나므로 바로 그 부근이 한 무제 때인 기원전 128년에 처음 창해군이 설치되었던 곳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