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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한반도 경주, 김해의 고대 문화유적들은 흉노족의 작품 - 최초주장

윤여동 2018. 2. 23. 18:16

윤여동설 - 한반도 경주, 김해의 고대 문화유적들은 흉노족의 작품 - 최초주장

 

 

           [한반도 경주 대릉원 : 흉노족의 무덤 양식인 적석목곽분이다]

 

  한민족의 유구한 역사 속에 한반도 남부에 신라, 가야는 없었다.

  신라와 가야는 지금의 중국 하북성 진황도와 요하 서쪽 사이에 위치하고 있었고, 백제는 그 서남쪽 난하 하류에, 고구려는 그 서쪽 난하 중상류에, 옥저는 그 서북쪽 내몽골 옹우특기, 적봉 부근에, 예(동예)는 그 북쪽 내몽골 고륜기 부근에, 맥은 능원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다.

  한반도 남부 경주, 김해 부근의 고대 문화유적들은, 원래 흉노족인 김일제의 후손들이 대륙에서 왕망과 함께 신()나라를 세웠다가 광무제가 신나라를 없애고 한(: 후한)을 재건하자 서기 20년경 대륙에서 한반도 남부로 도망쳐 와서 다시 세운 왕국의 흔적들이다. 한반도에는 이때 한자(漢字)가 전래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따라서 경주나 김해의 문화유적들은 농경민족의 시각이 아닌 유목민족인 흉노족(匈奴族)의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그 해석이 가능해 진다.

 

  미국인들이 혈통이 다른 아메리칸 인디언을 선조라 하지 않듯, 지금 한반도의 우리 한민족 역시 혈통이 다른 흉노족을 선조라고 할 수는 없다. 흉노족과 한민족은 엄연히 피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역사학자라는 사람들은 한반도 경주, 김해의 흉노문화유적들을 우리 선조들이 남겨놓은 훌륭한 문화유산이라고 하면서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으니 우리 한민족이 흉노족의 후예란 말인가?

  한마디로 잘 알지도 못하는 한심한 족속들이 신성한 우리 한민족 피의 역사를 분탕질치고 있는 것이다.

  이를 어찌 진정한 한민족의 역사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 한반도의 고대 역사는 처음부터 새롭게 다시 해석하여 바르게 정립하여야 한다.

 

 

     [경주 괘릉 : 흉노족 왕의 왕릉일 것인데, 역사학자라는 사람들은 한반도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신라의 원성왕릉이라고 하고 있으니 어찌 우리 고대 역사를 정확히 해석할 수 있으랴]

 

 

                   [서역 페르시아인의 모습이 확연한 경주 괘릉의 무인상]

 

 

 

                                         [금관총금관 : 경주 금관총에서 출토된 흉노금관과 연결되는 왕관]

 

 

                        [황금보검 : 흉노문화와 연결되는 장식용 황금칼]

 

 

          [동복(청동솥)을 말에 싣고 다니는 흉노풍습의 기마인물상]

 

                             [동복(청동솥) : 김해에서 출토된 유목민의 동복]

 

 

[석굴암 : 신라 김대성이 만든 것이 아니라 흉노족들이 만들었을 것이다. 옛날 흉노족들의 땅이었을 투루판 화염산 부근의 베제크릭석굴사원과 건축기법이 비슷하다고 한다. 사실 한반도 경주에 신라가 위치하고 있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김대성이 경주에 석굴암을 만들 수 있었을까나. 대륙 신라의 기록을 한반도 경주에 대입하여 무리하게 해석한 결과일 뿐이다]

 

  

                                                    

[경주 첨성대 : 사실 이 건축물이 실제 어떤 용도로 사용되었는지 아직 확실하게 밝혀진 것은 없고, 각각의 주장들만 무성하다. 따라서 흉노문화와 연결시킬 근거가 아직은 부족하다고 할 수 있다. 다만 필자는 이 건축물이 천문을 관측하기 위한 것일 수는 절대 없고, 시신을 육탈시키는 용도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유목민족들이 시신을 산 위에 놓아두고 독수리로 하여금 살을 뜯어 먹게 한 후 뼈만 간추려 매장했던 풍습의 변형이 아닐까 추정하고 있는 것인데, 이는 가까운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왕실이나 양반가에서는 시신을 가매장하여 육탈을 시킨 후 뼈만 간추려 매장하는 풍습이 있었기 때문이다]

 

 

[첨성대 내부에서 올려다 본 상부내부 구조 : 이렇듯 좁고, 불편한 통로를 이용하여 매일, 매시 천문을 관측하려 수시로 첨성대 꼭대기까지 올라 다녔다고라? 옛 사람들을 바보 취급해도 분수가 있어야지 원]

 

 

 

[첨성대 상단과 출입구 그리고 정자석 : 좁디좁은 이곳 어디에, 어떻게 천문관측기구를 설치할 수 있었을까나? 상단에 천문관측기구를 설치하지 않았고, 그냥 맨 눈으로 관측한다면 수고롭게 굳이 그 꼭대기까지 올라가서 천문을 관측할 일이 있을까? 그냥 땅 바닥 또는 조금 높은 언덕에 올라가서 관측해도 충분했을 것 같은데......]

 

 

 

 

[북경에 있는 옛 천문관상대이다. 이렇듯 각종 천문관측기구가 설치되어 있다. 경주의 첨성대라는 것이 천문을 관측하기 위한 건축물이라면 꼭대기에 이러한 천문관측기구들을 설치할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하고, 편리하게 오르내릴 수 있는 계단이 설치되어 있어야 한다. 따라서 경주의 첨성대라는 것은 천문대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이 역시 대륙에 위치하고 있던 신라의 기록을 한반도 경주에 대입시켜 무리하게 해석한 결과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