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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백제의 초기강역은 지금의 하북성 도산(都山)을 중심으로 난하 동쪽, 청룡하 서쪽이었다 - 최초주장

윤여동 2018. 6. 15. 17:53

윤여동설 - 백제의 초기강역은 지금의 하북성 도산(都山)을 중심으로 난하 동쪽, 청룡하 서쪽이었다 - 최초주장 

 

 

  백제의 건국지는 한산(漢山) 부근이었다.

  처음에 비류와 온조 그리고 신하들이 한산(漢山) 부아악(負兒嶽)에 올라 도읍할 장소를 물색했는데, 신하들이 한수(漢水) 남쪽에 도읍할 것을 건의했으나 비류는 그곳을 마다하고 미추홀(弥鄒忽)로 갔고, 온조는 신하들이 건의한 한산 부근의 위례성(慰禮城)에 도읍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그를 알 수 있다.

 

 [부아악(負兒嶽) : 어린아이를 업고 있는 형상의 산이라는 의미]

 

  그런데 온조왕 2(B.C.17) 조를 보면, “봄 정월에 왕이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말갈이 우리 북부 국경에 이어져 있고 그곳 사람들이 용기가 있고 거짓이 많으니 의당 병기를 수선하고 식량을 쌓아두어 그들을 방비할 계책을 세워야 한다고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백제 초기에 백제의 북쪽 국경에 말갈족이 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고,

  또 온조왕 3(B.C.16) 조를 보면, “가을9월 말갈이 북부국경을 침입했으므로 왕이 강한 군사를 거느리고 급히 쳐서 대패하게 만들었으므로 살아 돌아간 적이 101, 2명이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말갈이 백제를 침공했다가 거의 전멸했음을 알 수 있으며,

  온조왕 8(B.C.11) 조에도, “2월 말갈적군 3천명이 침입하여 위례성을 포위했으므로 왕이 성문을 닫고 나가지 않았더니 열흘이 지나자 적들이 군량이 떨어져 돌아가자 왕이 정예군사를 뽑아 대부현까지 쫓아가서 일전을 벌여 승리하고 적병 5백여명을 죽이고, 사로잡았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말갈이 백제의 도읍을 포위할 정도로 위협적인 존재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같은 해 가을7월 조를 보면, ”마수성(馬首城)을 구축하고 병산(甁山)에 목책을 세웠더니 낙랑태수(樂浪太守)가 사람을 보내 말하기를 지난날 서로 예방하고 우호를 맺어 한 집안과 같이 생각하고 있는데, 이제 우리의 영역에 접근하여 성을 쌓고 목책을 세우는 것이 혹시 우리 땅을 잠식하려는 음모인가? 만약 옛날처럼 우호의 정을 변하지 않으려거든 성을 허물고 목책을 파괴하여 즉시 억측과 의심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일전을 벌여 승부로 결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하였다. 이에 왕이 대답하기를 요새를 설치하여 나라를 지키는 것은 고금의 떳떳한 일인데 어찌 이것으로서 화친과 우호에 변함이 있을 수 있겠는가! 당신이 의심할 바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만약 당신이 강한 것을 믿고 군사를 발동한다면 우리나라도 또한 그에 대응이 있을 뿐이다하였으므로 이로 말미암아 낙랑과의 사이에 화친이 끊어졌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백제가 낙랑군(樂浪郡)과도 국경을 접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온조왕 10(B,C.9)조를 보면, “겨울10월 말갈이 북부국경을 침략했으므로 왕이 군사 2백명을 보내어 곤미천(昆彌川 : 지금의 폭하로 비정된다) 가에서 싸우다가 우리 군사가 패하여 청목산(靑木山 : 관성 부근으로 비정된다)을 의지하고 지켰는데, 왕이 몸소 정예기병 1백명을 거느리고 봉현(烽峴)으로 나와 구원하였더니 적들이 이를 보고 즉시 물러갔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또 온조왕 11(B.C.8) 조를 보면, “여름4월 낙랑이 말갈을 시켜 병산(甁山)의 목책을 덮쳐 파괴한 후 1백여 명을 죽이고 납치하여 갔다.

  가을7독산(禿山)구천(狗川) 두 곳에 목책을 설치하여 낙랑(樂浪)으로부터 오는 길을 차단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이때 백제 건국초기에 말갈과 낙랑으로부터 계속적인 침공을 당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기록상 병산(甁山), 독산(禿山), 구천(狗川)은 백제의 북쪽 변경에 위치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낙랑과의 경계지역에 쌓았다는 마수성(馬首城) 부근을 말하는 듯하다.

 

  온조왕 13(B.C.6) 조를 보면, 여름5월 왕이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나라의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서 변강을 침공하기 때문에 편안한 날이 적으며, 더구나 요즈음 요상한 징조가 자주 나타나고 어머님이 세상을 떠나 사태가 불안하므로 반드시 도읍을 옮겨야겠다. 내가 어제 나가서 순행하다가 한수(漢水)의 남쪽 토양이 비옥함을 보았으니 그곳으로 도읍을 옮겨 영구히 편안한 계책을 도모 해야겠다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백제초기 말갈과 낙랑의 침공을 견디다 못한 온조왕이 도읍인 위례성이 두 적국 말갈과 낙랑에 가까이 접하고 있음을 불안하게 여겨 안전한 곳으로 도읍을 옮기려 마음먹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당시 주변국의 배치 상으로만 본다면 백제의 북쪽에는 맥국(貊國)이 위치했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삼국사기에는 말갈이 위치했다고 하였으니 맥국에 맥족과 말갈족이 혼거하고 있었을 수도 있고, 말갈족이 맥족과는 달리 지금의 칠로도산 산맥을 따라 남하하여 백제의 북쪽 국경에 실제로 연접되어 있었기 때문에, 온조왕이 백제의 북쪽에 말갈이 위치했고 동쪽에 낙랑(낙랑동부도위)이 위치했다고 말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은 든다.

 

   그 뒤의 기록을 보면 가을7월 한산아래에 목책을 세우고 위례성(慰禮城) 백성들을 이주시켰다. 8월 마한에 사신을 보내 도읍을 옮긴다는 것을 알리고 나라의 영역을 획정하였는데, 북쪽(필자주 : 서쪽의 오기)으로는 패하(浿河 = 패수)에 이르고 남쪽(필자주 ㅣ 동쪽의 오기)으로는 웅천(熊川)까지이며, 서쪽(필자주 : 남쪽의 오기)으로는 대해(大海)에 닿고, 동쪽(필자주 : 북쪽의 오기)으로는 주양(走壤)까지였다[北至浿河 南限熊川 西窮大海 東極走壤]. 9월 성을 쌓고 대궐을 세웠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도읍을 옮길 준비가 착착 진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고, 백제 초기 백제의 강역이 서쪽으로는 패수(패하)까지였고, 동쪽은 웅천까지였으며, 북쪽은 주양이라는 곳까지였고, 남쪽으로는 대해에 닿았음을 알 수 있다.

 

보통 東極走壤(동극주양)을 한반도에 비정하여 주양을 춘천 부근이라 말하는 경우가 있는데, 춘천을 주양이라 기록한 옛 사서는 없다.

그리고 이 기록은 북극주양의 오기이다.

 

 

  그리고 온조왕 14(B.C.5) 조를 보면, “봄 정월 도읍을 옮겼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이때 백제가 첫도읍인 위례성(慰禮城)으로부터 남한성(南漢城)으로 도읍을 옮기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백제의 건국지가 사실은 한반도가 아니라 지금의 하북성에 있는 도산(都山 : 백제 북한산이었다)이라는 산을 중심으로 하는 그 부근으로서 백제 초기의 북쪽강역으로 표기된 패하(패수)는 지금의 난하를 말하는 것이고, 남쪽(필자주 : 동쪽의 오기))의 웅천은 지금의 진황도 노룡을 지나는 청룡하를 말하는 것이며, 서쪽(필자주 : 남쪽의 오기)의 대해는 발해를 말하는 것이고, 동쪽(필자주 : 북쪽의 오기)의 주양은 지금의 평천 동쪽 태두산진 부근을 말한다는데 있다.

  즉 백제의 건국지가 한반도 서울 부근이 아니라 지금의 중국 하북성 진황도에 있는 도산을 중심으로 난하의 동쪽과 청룡하의 서쪽 사이 땅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온조왕 24(A.D.6) 조를 보면, “ 가을7월 왕이 웅천(熊川) 목책을 세웠더니 마한왕이 사신을 보내 책망하기를 왕이 처음 강을 건너와서 발붙일 곳이 없을 때에 내가 동북방 1백리 땅을 나누어 주어 살도록 하였으니 내가 왕을 대우한 것이 후하지 않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이제 은혜를 갚을 것을 생각하기는커녕 지금 나라가 완전해지고 백성들이 모여들어 자기와 대적할 자가 없다고 생각하여 성과 못을 크게 설치함으로써 우리의 영역을 침범하니 이것을 어찌 의리라 할 수 있을 것인가?’ 하였다왕이 부끄러워서 곧 그 목책을 헐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기록 속에서 백제초기 강역이 마한의 동북쪽에 위치한 1백여리 땅이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때 마한은 지금의 북경 동쪽 하북성 당산시 풍윤현(豊潤縣)에 도읍하고 있었으므로 백제 건국 초기 강역으로 여겨지는 도산(都山) 부근은 정확히 그 동북쪽 방향에 위치하는 것이다.

  기록과 실제가 일치함을 알 수 있다.

 

백제의 강역이 건국 초기에는 마한왕의 말대로 1백리 땅에 불과했었을 것이나 세월이 흐르면서 강역이 빠르게 커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온조왕의 백제는 한반도에서 건국된 나라가 아니라 지금의 하북성 도산(都山)을 중심으로 난하의 동쪽, 청룡하의 서쪽 땅에서 건국되어 점점 강역을 넓혀 그곳에서 678년 역사가 이어진 왕조였다. 이것이 소위 대륙백제이다.

  따라서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 백제관련 사서의 기록에 나타나는 위례성, 남한성, 한성, 웅진성, 사비성 등은 모두 대륙에 위치했었지 한반도의 서울, 경기도 광주, 충남 공주, 부여를 말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백제 마지막왕 의자왕은 지금의 충남 부여 구드레나루에서 당나라로 잡혀 갔던 것이 아니라 지금의 북경 동쪽 하북성 난주(난현)에서 당나라로 잡혀갔던 것이고, 백제의 웅진성은 하북성 노룡이었다.   

 

한반도의 백제 흔적들은 백제 12대 계왕의 아들이었던 무광왕이 대륙에서 13대 근초고왕과 왕위찬탈전을 벌이다가 패하자 한반도로 도망쳐 와서 익산 금마에 도읍하고 다시 백제를 세웠던 흔적들이고, 이 백제가 소위 말하는 반도백제이다. 그런데 후일 이 무광왕의 반도백제가 대륙의 백제(대륙백제)를 통합하게 된다. 관세음응험기 기록에 나타나는 백제 무광왕이 바로 그 인물이고, 사서의 기록에 백제의 왕위에 올랐었다고 나타나는 모도왕은 이 무광왕의 후예이다. 반도백제 모도왕은 동성왕과 무령왕의 할아버지 되는 인물로서 동성왕을 대륙백제의 왕으로 임명한 사람이고, 우전팔번신사인물화상경 명문에 나타나는 남제왕은 동성왕과 무령왕의 큰형 되는 인물로서 할아버지인 모도왕을 이어 반도백제의 왕위에 올랐고, 무령왕을 대륙백제의 왕으로 임명한 사람이다.